정유정의 <종의 기원>을 읽고

심약자 주의 소설

by송주

그간 출구 없는 대륙에 갇혀 지냈다. 중드라 불리는 중국 드라마에 빠져 자나 깨나 대륙의 미남 배우 생각뿐이었다. 알고리즘은 영특하게도 내 휴대폰 곳곳에 중국 드라마와 배우들의 짤이 자동 생성되도록 만들어 놨다. 그 덕에 늘어나는 건 벌린 입 밖으로 과하게 흐르는 침과 대출 기간 안에 읽지 못한 도서들이었으니... 누구를 탓하랴... 미남에 대한 내 동경은 젊을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렇게 대륙의 미남에 빠져 일상을 지장 받고 있는 와중에도 순식간에 완독 한 소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었다.


<종의 기원>은 박한상 존속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써낸 사이코 패스 소설이다.

주인공 유진은 10살 때 아빠와 형을 잃고 엄마와 살고 있다. 유진의 엄마는 자신의 남편과 큰아들의 죽음에 유진이 개입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정신과 전문의인 동생 혜원에게 유진의 심리 검사를 의뢰한다. 유진은 최고 등급의 사이코 패스였다. 유진의 엄마와 이모 혜원은 유진에게 이 사실을 숨긴다. 그리고 흥분과 충동을 억누르는 약을 간질약이라 속이며 평생을 복용하게 한다. 어느 날 유진은 약을 먹지 않았을 때 느끼는 흥분과 충동감 속에서 희열을 맛본다. 특히 자신을 두려워하며 걸음을 재촉하는 여자를 우연히 만난 후 그 흥분도는 극에 달한다. 어느 날 발광하듯 개병(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 상태)이 도진 유진은 집을 나갔다 피범벅이 된 채 돌아온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후 피웅덩이를 만든 채 죽어 있는 엄마를 발견한다. 기억을 어렵게 되짚어 본 유진은 길을 가던 젊은 여자를 죽였고 엄마를 죽인 사람 역시 자신임을 알게 된다. 곧 엄마와 연락이 닿지 않아 찾아온 이모까지 살해한다.

소설 속 유진은 세 건의 살인 사건 후에도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 처참한 상황에서 벗어날 궁리만 한다.

"나는 방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텅 비어 있었다. 이마 한가운데에서 핏 줄이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기어코 나가셨단 말이지. 양쪽 귀 뒤에서부터 어른어른,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살이 따끔거리고 등과 다리의 근육이 저릿저릿해왔다. 온갖 소리들이 귓속으로 뒤섞여 들어왔다. 먼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 소리, 단지 내 어딘가에서 울리는 아이들의 날카로운 웃음소리,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소리, 주방에서 돌아가는 냉장 고 소리, 맥박이 이마를 치는 소리, 개구멍으로 나가고 싶을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흥분하는 나와 억누르는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 작용이었다."


얼마 전 유퀴즈에 출연한 정유정 작가를 봤다. 작가는 만약 소설 속에 시체가 등장한다면 그 시체의 무게, 시체의 느낌, 시체의 냄새 등을 독자가 완벽하게 느낄 수 있도록 묘사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종의 기원>을 열어 본 순간 작가가 말하는 묘사는 내 기대치를 훨씬 넘어섰다. 피비린내가 집안 어디선가 나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이 작가는 시체 하나를 놓고 바카라 한 권을 거뜬히 써낼 수 있는 내공을 지닌 듯했다. 그야말로 살인 사건 현장에 내가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소름 돋는 표현들이 가득했다. 그건 마치 웃지도, 울지도,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얼굴 하나를 계속 마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 소설의 시점이다. 소설은 사이코 패스인 유진의 시점에서 1인칭으로 쓰였다. 살인을 한 후 유진의 감정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다. 작가 자신이 사이코 패스인 유진으로 변해 소름 끼치도록 덤덤하게 소설을 이끈다. 죄바카라감을 찾기 힘든 문장들은 끝까지 힘을 잃지 않고 사이코패스인 유진을 설명했다. 내가 사이코 패스가 되어 내 이야기를 해 나간다는 게 일반인들의 상상력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였지만 이 작가는 정상인이다.


"도덕적이고 고결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깊은 무의식 속에서는 금지된 행위에 대한 환상, 잔인한 욕망과 원초적 폭력성에 대한 환상이 숨어 있다. 사악한 인간과 보통 인간의 차이는 음침한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 작가의 말 중

나는 성악설을 믿는다. 인간은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내재된 욕망을 밖으로 들어내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바카라을 읽는 내내 인류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과 인간의 폭력을 떠올렸다. 또 나를 돌아봤고 내 주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유진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독자가 바카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드는 심약자 금지 소설 <종의 기원>이었습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