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 소설 소개: 마흔 살, 출판사 편집자. 어느 날 20년 전 투고된 미출간 원고를 발견한다.
육아에 지치고, 온라인 게임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원고 속 여자의 삶이 소름 끼치도록 내 삶과 닮아 있다. 이 여자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 원고에는 내 미래까지 적혀 있을까.
요동치는 마음을 붙잡고 원고를 읽어 내려간다.
원고 속 주인공은 작은 출판사에 다니고 있다. 육아에 치이고 일에 파묻히고 인간관계에 참을수 없을 때 그럴때면 옥상에 올라간다. 꽤나 자주. 옥상에서 보는 풍경을 좋아한다. 수도권임에도 개발제한구역에 묶여 논밭에 둘러싸인 건물 옥상에 서면 오른편으로 2층짜리 작은 건물 한 채인 초등학교가 보인다. 초등학교에서는 정확히 50분에 한 번씩 학교 종이 울린다. 주인공은 그 종소리를 좋아한다. 학교 맞은편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작은 문방구가 보인다. 문방구 건물 위에는 빨간 십자가가 박혀 자신이 신의 주문을 성실히 수행하는 교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 주변으로는 별다른 건물이 없다. 그저 가을빛에 샛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는 논밭과 정확히 시야의 반으로 갈라진 부분에 파란 하늘이 펼쳐져있다. 온라인 게임생활에 치이고, 육아에 지친 40살의 주인공은 옥상에 펼쳐진 풍경을 사랑한다.
'옥상이라..'
원고 속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중학생 시절 모습이 떠오른다. 3층 짜리 6세대 정도 살았던 다주택의 한편에 살았다. 다행인지, 아니면 제일 저렴했어서인지 3층 꼭대기 구석이 우리 집이었다. 엄마를 잃고 홀로 나와 살던 아빠는 가난에 치이고 궁핍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3층 구석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10년 정도 살았다. 월세가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비싸진 않았을 터였다. 3층 문 바로 앞에는 옥상으로 가는 꽈배기 모양의 철제 계단이 있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강아지를 안고 그 빙글빙글 철제 계단을 꽤나 자주 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외로웠고, 집엔 아무도 없었고, 그 위험한 계단을 위태롭게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한발 한발 올라도 혼내는 사람이 없었다. 사춘기였다. 그렇게 까딱하면 대천사를 만날 것만 같은 빙글 계단을 오르고 올라선 옥상에는 까만 밤하늘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커다란 달이 덩그러니 떠있었다. 딱히 신앙심이 충만한 건 아니었으나 강아지를 품에 안은 채 두 손을 모아 달님을 위해 기도했었다. 눈물이 났지만, 왜 그랬는지. 뭘, 또 뭘 위해서 기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옥상에서 그랬던 날들이 있었다.
원고 속 주인공의 시선이 옥상 밖 풍경에서 주인공이 서있는 건물 옥상 위로 옮겨간다.
주인공이 서있는 곳 오른편에는 만든 지 얼마 안 됐는지 쨍한 분홍빛 벤치가 하나 놓여있다. 주인공이 두세 걸음을 옮겨 벤치에 앉는다.
무이위 무불위(無為而 無不為)
-장자
벤치 등받이 오른편 위쪽에 여섯글자의 검정색 한글과 한자가 쓰여있다. 작가를 꿈꾸는 편집자답게 원고 속 주인공은 그 뜻을 알고 있다. 억지로 이루려고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온라인 게임에서 인정받고 싶어 아등바등 노력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끝이 없는 것 같아 지쳐하는 주인공에게 여섯글자는 선명하게 다가온다. 온라인 게임도, 육아도, 자신의 꿈도. 노력해도 이루어질지 말지 모르는데, 그 노력도 끝이 없고, 그 끝도 끝이 없이 느껴져서 지친 주인공에게 선명한 위로가 된다.
벤치 옆에는 마찬가지로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이는 자판기가 보인다. 200원을 넣으면 데워진 우유를 먹을 수 있고, 300원을 넣으면 맥심커피를 먹을 수 있다. 주인공은 동전을 챙겨 오는 걸 좋아한다. 커피를 먹기 위해 300원을 꺼낸다. 200원 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따뜻한 우유를 꺼내 먹는다. 제법 쌀쌀해진 가을 노을빛 때문인지 따뜻한 우유의 온기가 좋다. 눈앞에 풍경도 좋다. 자판기 반대 편 벤치 옆에 누군가 가꾸는 게 분명한 3평 남짓한 크기의 작은 화단이 있다. 화단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초록빛 풀과 무언가를 이미 수확했는지 낮은 흙 언덕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딩동댕- 학교에서 정겨운 종소리가 울리고 아이들이 하나둘씩 나오더니, 순식간에 수많은 아이들이 운동장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논밭밖에 없는 이 동네에 저렇게 많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벤치 옆에 잠시 놓아둔 우유가 바람결에 쏟아진다. 200원이 아까운 만도 한데 주인공은 무심한 손길로 텅 빈 하얀 종이컵을 집어 화단 구석 한편에 있는 기다란 종이컵 수거 플라스틱에 던져 넣는다. 주인공이 습관적으로 수거 플라스틱에 꽂혀있던 이미 쓴 종이컵 갯수를 헤아린다. 9개다. 본인의 종이컵이 아래로 떨어진다. 10개가 된다. 다시 일하러 가기 전 크게 숨을 마셔 가을 공기를 몸속에 채운다. 몸을 돌려 옥상문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서있던 곳 옥상 바닥에 있던 낮은 단층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발을 헛디디고 넘어진다.
"엄마!!!!!!!!!!!!"
엄마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방으로 향해 날렵한 몸동작으로 진경이의 옆에 눕는다.
"음~ 엄마 화장실 갔다 왔어. 아직 새벽이니 자자~ 우리 진경이 코오~"
5살. 365일. 365 곱하기 5는.. 천팔백일 남짓. 단순계산을 해도 천팔백일이다. 그 하루하루, 그날들의 매일 밤마다 아이를 돌봤다. 처음에는 2시간에 한 번씩 아이가 깼고, 100일의 기적을 보여준 진경이 덕분에 처음으로 6시간을 통잠으로 잔 날 그렇게 행복했었다. 밤에 자다 깬 아이는 늘 "엄마" 두 글자로 나를 찾았다. "엄마"라는 두 글자는 그렇게 나를 물들여갔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손길로 아이의 등을 토닥이고, 엄마의 숨소리로 아이를 안심시킨다. 그런 밤들이 있었다. 지금처럼.
'원고 마저 보고 싶은데... 괜찮은 원고 같은데 왜 출간이 안되고 창고에 처박혀있었을까.'
아이의 숨소리가 꿈나라로 향하는 시그널을 보내자 내 머릿속은 다시 원고를 떠올린다. 이상하게 원고를 읽을수록 마흔을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내가 대학생 시절 쓴 게 아니었나 착각될 정도로. 비슷하고 어떤 부분은 똑같게 닮아있다. 이상한 일이다.
'당연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침대에 누운 채로 핸드폰을 연다. 수많은 네모난 앱들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유튜브. 웹툰. 소설 보는 앱. 당근. 다이소. 인스타그램 등등. 손 한 번에 터치로 아이를 재우는 이 캄캄한 방에서 핸드폰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갈 수가 있다.
유튜브를 연다. 수많은 영상들과 수많은 커다란 글자들이 서로 자기를 주목해 달라고, 제발 터치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어떤 걸 볼까 하다가 내 손이 유튜브 창을 닫는다. 웹툰을 연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그림들과 제목들이 자기를 봐달라고 아우성치고 있다. 빠르게 스크롤을 내려도 끊이지 않는 다르게 생긴 웹툰들이 올라오고 올라온다. 현기증이 날 것 같다. 다시 웹툰창을 닫고, 당근 앱을 누른다. 마찬가지다. 수많은 물건들이 서로 자기를 봐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다이소도, 쇼핑어플도, 정작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이 핸드폰 속에서 서로 아우성치고, 소리 지르고, 난리를 치고 있다.
인스타그램 창을 연다. 여긴 더 난리다. 번쩍거리고 휘청거리고 잘 정리되어 있지만 어수선하다. 그러다 문예창작과 신입 대학원생 모집이라는 카드뉴스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빠르게 손가락을 화면 옆으로 넘겨본다. 대학별 모집요강과 기간 등의 정보들이 정리되어 있다. 가고 싶은 대학원의 정보도 있다. 입학금, 등록금의 숫자들도 떠있다.
답이 없다. 숫자들이 모여있으면 응당 답이 있어야 하거늘.
답도 없는 문제다.
당장 통장에 쓸 수 있는 내 용돈이 10만 원도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얼른 다른 게시물로 스크롤해 버린다. 또다시 시끌벅적한 사람들이 온갖 것들을 떠들며 자신을 봐달라고 아우성친다.
작가니, 대학원이니, 꿈이니.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을 쫓기에
세상은 너무나 소란스럽다.
마치 꿈꾸는 그 꿈에 닿지 못하게 방해라도 하겠다는 듯.
이 캄캄한 새벽에도.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