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로그

아버지

by천시록

《신의 로그》

PART 3 — 〈몽골〉


제18화 〈아버지〉



칸의 전령이 가져온 지도에는 서쪽이 비어 있었다.


카스피해의 동쪽과 남쪽에는 강과 도시, 산맥과 길이 이어져 있었지만, 물 건너 서쪽으로 갈수록 지명은 드문드문 끊겼고 코카서스의 높은 산줄기 너머부터는 양피지 본래의 누런빛이 드러날 만큼 넓은 여백이 남아 있었다.


제베가 그 빈 곳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어디까지 가라는 건가?”


“칸께서는 서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길과 강, 산맥과 도시, 그곳에 사는 자들과 그들이 가진 군대까지.”


“끝은?”


전령이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제베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수부타이는 아무 말 없이 지도를 내려다봤다. 빈 공간 너머에도 사람들이 살고 길이 이어져 있을 것이었다. 다만 그 길을 건너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직 이 지도에 닿지 않았을 뿐이었다.


수부타이가 두루마리를 말았다.


“그럼 가보면 알겠군.”


말들이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



지도 위의 여백에 선이 자라기 시작했다.


제베와 수부타이의 군대는 카스피해 남쪽의 길을 따라 이란 북부를 가로질렀고,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을 지나 조지아 왕국과 맞부딪쳤다. 여름에도 눈을 머리에 인 코카서스의 봉우리 아래로 수만의 말이 길게 늘어섰으며, 바위틈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은 말발굽에 부서져 은빛 물보라를 일으켰다.


정찰대가 돌아올 때마다 지도에 없던 강과 길이 생겨났다. 말이 건널 수 있는 여울, 겨울에도 얼지 않는 샘, 많은 기병이 지나갈 수 있는 고개와 풀이 풍부한 초원이 하나씩 표시되면서 양피지의 빈 공간은 조금씩 채워졌다.


몽골군의 지도에 새로운 선 하나가 그어질 때마다, 그 땅에서는 누군가가 길을 잃었다.


정찰대가 우물과 목초지를 표시하고 지나간 자리에서 마을 사람들은 서둘러 가축을 몰고 숲이나 산으로 몸을 피했으며, 몽골 병사들이 다음 원정을 위해 건너기 좋은 여울을 찾아내는 동안 강 건너의 주민들은 불타는 집을 뒤로한 채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길을 떠났다.


몽골군에게 그것은 정찰이었다.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침략이었다.


코카서스의 길목을 지나자 오늘날 러시아 남부에서 흑해 북쪽과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광대한 평원이 열렸다. 봄이면 풀밭이 바람을 따라 거대한 물결처럼 일렁였고, 겨울이면 지평선까지 흰 눈에 잠기는 땅이었다.


그곳에는 먼저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알란과 킵차크의 말들이 동쪽에서 나타난 낯선 말들과 같은 초원을 달렸고, 한 세력이 무너지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음 부족과 왕국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전령들이 몽골군의 숫자와 이동 방향을 알리며 서쪽으로 달릴 때마다 아직 전쟁을 보지 못한 땅에도 제베와 수부타이라는 이름이 먼저 도착했다.


1223년, 칼카강 유역에서는 루스의 여러 공국과 킵차크가 연합해 몽골군의 길을 막았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그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몽골군이 겁을 먹고 달아난다고 믿은 연합군은 서로의 행군 속도를 맞추지 못한 채 추격했고, 앞선 부대와 후방의 간격이 충분히 벌어졌을 때까지도 자신들이 거대한 전열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몽골군이 말머리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흩어진 부대들은 서로를 구원하지 못했고, 칼카강 주변의 초원은 사람과 말, 버려진 깃발과 부러진 창으로 뒤덮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몽골군보다 먼저 서쪽으로 달려가 그 이름과 전투 방식을 퍼뜨렸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승리한 땅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지나온 강과 고개, 부족과 도시의 이름을 지도 위에 남긴 채 동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말들이 되짚어간 길 뒤에는 전투의 흔적이 남았지만, 한 번 선이 그어진 지도는 다시 빈 양피지로 돌아가지 않았다.


몽골은 이제 코카서스 너머의 땅을 전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었다.


어느 강이 깊고 어느 여울을 말이 건널 수 있는지, 산맥을 넘으면 얼마나 넓은 초원이 펼쳐지는지, 그 땅의 사람들이 어떤 갑옷과 무기를 사용하고 누구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모으는지까지 알아냈다.


처음에는 길을 찾기 위한 원정이었다.


그러나 길은 한번 발견되고 나면 다시 사용될 수 있었다.



───



시간이 흘렀다.


제베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칭기즈 칸도 죽었다.


그들의 죽음과 함께 한 시대가 저물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어린 시절 수부타이의 말을 돌보던 에센은 십호장에서 백호장으로, 다시 천호장으로 올라갔다. 그에게 맡겨진 사람의 수는 늘었지만, 전장을 보는 방식은 처음 십호를 맡았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진격 명령이 떨어져도 적보다 자기 병사들의 말부터 살폈고, 앞선 부대가 달아나는 적을 좇아 대열을 이탈하면 전리품보다 사람을 먼저 모았다. 부상자가 생기면 두 사람을 붙여 데려오게 했으며, 싸움이 끝나면 주인 없이 돌아온 말부터 살펴 누구를 잃었는지 확인했다.


화려한 승리로 이름을 알리는 장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따라 나간 병사들은 다른 부대보다 더 많이 돌아왔다.


어느 날부터 천 명의 기병이 그의 손이 향하는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수부타이도 더는 한 부대를 이끌고 먼저 성벽에 오르던 젊은 장수가 아니었다. 여러 왕족과 장수들이 같은 전장에 모이면 병력이 언제 움직이고 어디에서 적을 맞아야 하는지를 의논하는 중심에 그가 있었고, 젊은 장수들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 먼저 그가 펼친 지도를 들여다봤다.


검었던 머리와 수염에는 어느새 겨울 초원의 서리처럼 흰빛이 내려앉았다.


십여 년 뒤, 몽골의 말들은 다시 서쪽을 향했다.


이번에는 정찰을 겸한 추격대가 아니었다. 칸의 혈족들이 참가하고 여러 만호가 하나의 목적 아래 움직이는 대원정이었다. 오래전 제베와 수부타이가 지도 위에 그어놓았던 선은 강을 건너고 초원을 가르며 다시 서쪽으로 뻗었다.


그 선은 늙지 않았다.


1237년부터 루스의 도시들이 차례로 무너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몽골군이 오기 전에 서쪽으로 달아났다. 겨울이면 얼어붙은 강이 군대의 길이 되었고, 봄이 오면 진창 위에 다시 수레와 말의 흔적이 이어졌다.


그러던 1240년 겨울.


오래전 칼카강에서 마주쳤던 루스 세계의 오래된 중심에 몽골군이 도착했다.


키이우.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가 자리한 곳이었다.



───



도시는 무너지고 있었다.


성벽 안쪽에서 솟아오른 불길이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뛰었고, 검은 연기가 낮은 겨울 하늘을 덮을 때마다 붉은 불티가 바람에 휩쓸려 골목 위로 흩어졌다. 깨진 벽돌과 돌조각이 널린 길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렸지만, 어느 쪽으로 가야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교회로 가!”


누군가의 외침이 비명 사이를 뚫었다.


사람들의 흐름이 한꺼번에 꺾였다. 아이를 가슴에 품은 여자는 한쪽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얼어붙은 길을 달렸고, 피 묻은 천으로 머리를 감싼 노인은 벽을 짚으며 그 뒤를 따랐다. 등에 자루를 짊어진 남자가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넘어지자 곡식과 옷가지가 진흙 위로 쏟아졌지만, 그는 평생 모은 살림을 돌아보지도 않고 몸만 일으켜 다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데샤티나 교회였다.


두꺼운 벽과 높은 지붕 아래로 들어가기만 하면 살 수 있으리라는 마지막 희망 때문에 입구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의 등을 밀었다. 가까스로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성화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었고, 아이의 울음과 노인의 신음,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빠른 기도가 높은 천장 아래에서 뒤엉켰다.


그러나 도시를 울리며 가까워지는 말발굽 소리는 그 모든 목소리를 조금씩 삼켜가고 있었다.


에센은 교회에서 멀지 않은 길목에 말을 세웠다.


마흔넷.


금나라 원정에 처음 따라갔던 열다섯 살 소년은 이제 웃을 때 눈가에 잠깐 스치는 표정 속에만 남아 있었다. 관자놀이에는 흰 머리가 섞였고 왼쪽 눈썹 위로는 오래된 상처가 지나갔으며, 수많은 겨울과 전쟁을 견딘 얼굴에는 젊은 병사들에게서 찾기 힘든 느긋함과 피로가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에센이 손을 들었다.


“남쪽 골목을 막아. 민가 안으로 흩어지지 말고, 교회 쪽으로 몰리는 사람들 사이에 무장한 병사가 있는지 먼저 확인해.”


명령이 천호 아래의 백호와 십호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기병들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고, 말발굽이 얼어붙은 땅을 후려칠 때마다 재와 먼지가 낮게 피어올라 사람과 말의 다리를 감쌌다.


그 먼지 사이로 수부타이가 다가왔다.


에센은 멀리서도 그를 알아봤다.


수십 년 동안 수천 번 보아온 모습이었다. 말 위에 앉은 자세도, 먼 곳을 볼 때 조금 앞으로 숙이는 어깨도, 생각에 잠기면 엄지로 검지 마디를 문지르는 버릇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수부타이가 에센 곁에 말을 세운 뒤 안장에서 내려 교회 쪽을 바라봤다. 에센도 말에서 내려 고삐를 가까운 병사에게 넘겼다.


“교회로 몰리는군.”


수부타이가 사람들로 가득 찬 입구를 바라봤다.


“안에 너무 많이 들어갔습니다.”


“병사들도 섞여 있다. 입구를 놓치지 마라.”


“알겠습니다.”


에센의 시선은 교회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는 아이에게 잠깐 머물렀다.


수부타이가 그를 돌아보더니 입가를 조금 올렸다.


“그 표정은 여전하구나.”


“무슨 표정 말입니까?”


“내 명령이 마음에 안 들 때 짓는 표정.”


에센도 웃었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스무 살 때부터.”


“그전에도 그랬을 겁니다. 장군님께서 못 보셨겠지요.”


수부타이가 낮게 웃자 에센의 얼굴에도 잠깐 소년 시절의 표정이 돌아왔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다.



───



교회 쪽으로 엉겨 있던 연기가 옆으로 밀려나면서 맞은편 건물의 검게 그을린 벽이 드러났다. 무너진 지붕 아래로 위층의 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고, 불에 탄 창틀 뒤의 어둠 속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에센은 별생각 없이 그곳을 바라봤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살기 위해 아래로 뛰고 있는데 그 사람만 움직이지 않았다. 창틀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등 뒤에서 불길이 흔들릴 때마다 얼굴은 붉은빛 속에 나타났다 다시 어둠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찰나였다.


그런데 에센은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그 사람은 몸을 숨기지 않았다. 창틀을 짚은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잠깐 에센에게 머물렀던 눈은 곧 그의 어깨를 지나 옆으로 움직였다.


에센도 그 시선을 따라갔다.


수부타이.


가슴 한가운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다시 창가를 보는 순간 어둠 속에서 길고 휘어진 선 하나가 올라왔다.


활이었다.


왼팔이 앞으로 뻗어 나오고 오른손이 뺨 가까이까지 당겨지면서 활대가 팽팽하게 휘었다. 시위 위에 놓인 화살촉이 연기 사이로 들어온 겨울 햇빛을 받아 하얗게 번뜩였다.


화살은 수부타이의 가슴을 향하고 있었다.


“장군님!”


에센의 외침과 함께 창가의 손가락이 펴졌다.


시위가 튕겼다.


에센은 생각하지 않았다.


수부타이 앞으로 몸을 던지며 등을 창가 쪽으로 돌렸고, 양팔과 어깨로 그의 가슴을 거칠게 밀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은 수부타이가 옆으로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순간, 연기를 가르고 날아온 화살이 에센의 오른쪽 어깨뼈 아래로 파고들었다.


짧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화살촉은 갑옷을 뚫고 갈비뼈 사이로 깊숙이 들어갔고, 몸 밖에 남은 화살대가 충격을 견디지 못한 채 크게 흔들렸다.


에센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수부타이가 두 팔로 그를 받아 안았다.


“에센!”


주변에서 고함이 터졌다. 병사들이 활을 꺼내 창가를 향해 화살을 쏘았고, 다른 병사들은 건물 입구와 골목으로 달려갔다. 창틀과 벽에 화살이 잇달아 부딪치면서 돌가루와 불탄 나무 조각이 아래로 쏟아졌다.


그러나 에센에게 그 모든 소리는 깊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멀었다.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가슴이 뜻대로 부풀지 않았다. 입을 벌려 다시 숨을 끌어당길수록 등에서부터 날카로운 통증이 번졌고, 목구멍 깊은 곳에서는 뜨겁고 비린 맛이 올라왔다.


수부타이는 에센을 받아 안은 채 무릎을 꿇었다. 등에 남은 화살대가 땅에 닿지 않도록 몸을 옆으로 돌려 받쳤지만, 그 작은 움직임에도 에센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치료할 사람을 불러라!”


수부타이의 손이 등에 박힌 화살대로 향했다가 멈췄다.


수많은 전장에서 상처 입은 병사를 보아온 손이었다. 피 묻은 갑옷을 벗기고 상처를 누르며, 울부짖는 부하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화살대 가까이에서 멈췄던 손가락이 젖어드는 옷자락을 더듬었고, 에센이 몸을 떨자 그것마저 놓았다.


수부타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에센은 그 손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봤다.


어린 시절 말고삐를 제대로 잡지 못하던 자신의 손을 덮어주었던 손이었다. 단검을 만지려다 붙잡힌 적도 있었고, 마리암을 잃고 처음 무기를 갖추던 날에는 그 손이 등에 걸린 화살통의 끈을 직접 당겨주었다.


그때도 수부타이는 말보다 오래 손을 움직였다.


끈을 조이고, 이미 붙어 있는 화살통을 다시 눌러보고, 어깨에서 한동안 손을 떼지 않았다.


상처를 돌볼 줄 아는 병사가 달려와 에센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병사는 갑옷을 묶은 끈을 끊고 화살 주변의 옷을 갈랐으며, 수부타이가 에센의 어깨를 받치는 동안 등에서 배어 나오는 피를 접은 천으로 눌렀다.


에센이 기침했다.


입가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병사의 얼굴이 굳었다.


“뽑아라!”


수부타이가 소리쳤지만 병사는 곧바로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깊이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뽑으면 피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럼 막아. 피부터 막으란 말이다!”


병사는 젖은 천 위에 새 천을 겹쳤다. 다른 병사가 에센의 몸과 함께 흔들리는 화살대를 조심스럽게 붙들었고, 곁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바람을 막으며 필요한 물건을 찾으러 서로를 불렀다.


수부타이는 병사의 손 옆으로 제 손을 밀어 넣어 천을 눌렀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 사이로 배어 나와 손목과 소매까지 적셨다.


“괜찮……습니다.”


“말하지 마.”


“장군님…….”


“입 다물어. 치료할 수 있다.”


그 목소리가 너무 다급해서 에센은 웃고 싶었다.


수많은 성을 무너뜨리고 거대한 군대를 움직이면서도 명령을 서두르지 않던 사람이 지금은 제 손바닥 아래의 피를 막으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에센이 손을 들어 수부타이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팔을 붙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손은 소매를 타고 조금씩 미끄러졌고, 수부타이가 다른 손으로 그것을 받아 쥐었다.


에센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죽어가는 사람을 너무 많이 보았다.


숨을 끌어당길 때마다 가슴 안에서 젖은 소리가 났고, 손끝에서부터 감각이 멀어지고 있었다. 곁의 병사가 무언가를 외쳤지만 말뜻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부타이의 품은 따뜻했다.


에센은 그 온기를 놓치지 않으려 어깨를 조금 움직였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깊어진 눈과 이마의 주름, 흰빛이 섞인 수염이 가까이 있었다.


자신도 늙었다.


둘이 함께 늙었다.


늘 곁에 있었기에 어제와 오늘 사이의 작은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가까이 바라보니, 검은 머리의 장수를 올려다보던 아이와 그 아이의 손을 잡아주던 사람이 함께 보낸 시간이 그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에센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수부타이가 그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내 곁에 있어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더 있어.”


에센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수부타이가 얼굴을 가까이 숙이자 겨우 짧은 숨을 삼키며 그를 불렀다.


“장군님.”


“말하지 말랬다.”


“한 번만…….”


수부타이가 에센을 내려다봤다.


에센은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 말만큼은 마지막 남은 숨과 함께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평생 하지 않았던 말.


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다고 믿었던 말.


“아버지…….”


수부타이의 얼굴이 굳었다.


에센은 그 표정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한 번은……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붙잡힌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수부타이는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에센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기에 아직 무슨 말이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흘러나온 숨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에센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



수부타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에센.”


대답이 없었다.


그는 에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다음 숨을 기다렸다. 조금 전까지 피를 토하면서도 들썩이던 가슴이 다시 움직일 것 같아, 제 손에 잡힌 손가락까지 가만히 붙들고 있었다.


“에센.”


조금 더 크게 불렀다.


곁의 병사가 상처를 누르던 손을 멈췄다. 수부타이는 그 손을 보고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멈추지 마.”


병사는 다시 천을 눌렀지만 에센의 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수부타이가 피 묻은 손으로 그의 뺨을 쓸었다.


“눈 떠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시는 여전히 죽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건물이 무너지며 돌과 목재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굉음이 일었고, 데샤티나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의 기도와 비명이 뒤엉켰다. 불붙은 지붕에서 솟구친 불티가 겨울 하늘로 올라가 붉은 별처럼 흩어졌으며, 화살이 날아온 건물에서는 몽골 병사들의 고함과 문을 부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모든 소리와 빛 한가운데서 수부타이는 죽은 에센을 품에 안고 있었다.


자신의 명령을 받고 적진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어제까지 함께 말을 달리던 부하가 다음 날에는 주인 없는 말로만 돌아오는 일도 흔했다.


죽음은 그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품 안의 사람만은 달랐다.


아직 말할 것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 에센이 부른 말에 자신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수부타이의 손이 에센의 뺨에서 멈췄다. 그는 입을 열었다가 다문 뒤 엄지로 눈가에 남은 물기를 닦았다. 피가 묻은 손끝이 지나가면서 뺨 위에 가느다란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창가가 보였다.


비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활을 들고 있던 사람도, 겨울 햇빛을 튕기던 화살촉도 사라지고 검게 탄 창틀 사이로 연기만 느리게 흘러나왔다.


“찾아라.”


주변의 병사들이 수부타이를 돌아봤다.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저 화살을 쏜 자를 찾아.”



───



키이우의 불길이 잦아든 뒤에도 수색은 계속되었다.


병사들은 화살이 날아온 건물과 주변 골목을 뒤졌고, 무너진 집과 불탄 창고, 시신이 쌓인 길까지 헤집었다. 그러나 그날의 키이우는 한 사람의 흔적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흩어졌고,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도 비명과 연기 속에서 서로 엇갈렸다.


건물 안에서는 부러진 화살 몇 대와 사람이 뒤편으로 빠져나간 듯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창 아래의 짚더미가 깊게 꺼져 있었고, 낮은 돌담의 모서리에는 새로 긁힌 자국과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며칠 뒤, 서쪽으로 빠져나간 피란민 가운데 늙은 궁수 하나가 섞여 있었다는 증언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어느 길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수부타이가 물었다.


“어디로 갔나?”


“서쪽으로 향했다는 것까지만 확인했습니다.”


서쪽.


키이우 너머에는 아직 밟아보지 못한 땅이 이어져 있었다. 숲과 강 너머로 여러 왕국이 흩어져 있었고, 길은 유럽의 더 깊은 곳으로 갈라져 들어갔다.


쫓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먼저 보내야 할 사람이 있었다.



───



데샤티나 교회에서 멀지 않은 옛 성벽 가장자리, 무너진 담장과 오래된 길 사이에는 겨울 풀로 덮인 완만한 땅이 있었다.


곡괭이가 언 흙에 부딪칠 때마다 쇠가 돌을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고, 몇 번을 내리쳐야 겨우 흙덩이 하나가 갈라져 굴러내렸다. 서쪽으로 기운 해는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를 땅 위로 길게 끌어냈으며, 키이우를 뒤덮었던 연기는 아직도 하늘 한쪽에 검은 띠처럼 걸려 있었다.


이곳까지 따라온 소음은 거의 없었다.


바람이 마른 풀 끝을 훑는 사각거림과 병사들이 언 땅을 파내는 소리만 낮게 이어졌다.


에센은 깨끗한 옷을 입고 누워 있었다.


몸속의 화살촉을 꺼내려면 상처를 다시 벌려야 했다. 수부타이는 그대로 두게 했다. 몸 밖으로 길게 남은 화살대만 짧게 잘라내고 상처를 천으로 덮은 뒤, 피를 닦아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피와 먼지를 걷어낸 얼굴에서는 전쟁터의 긴장이 사라져 있었다. 눈가와 이마에 깊어진 세월의 흔적은 그대로였지만, 입가만큼은 조금 전 길목에서 함께 웃던 때처럼 느슨했다.


수부타이는 한동안 그 곁에 앉아 있었다.


가까이 매인 말 한 필이 고개를 흔들자 굴레의 쇠고리가 부딪쳤다. 수부타이는 습관처럼 소리가 난 쪽을 바라봤다가 다시 에센에게 눈을 돌렸다.


이제 저 소리를 듣고 먼저 일어날 사람이 없었다.


병사들이 에센을 무덤 안으로 옮겼다. 머리와 어깨, 다리를 받친 손들이 조심스럽게 내려갔고, 한 병사가 옷자락을 펴 발목을 덮어준 뒤 물러났다.


수부타이도 몸을 낮춰 무덤 가장자리에 무릎을 짚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풀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몸에서 떨어진 적이 거의 없던 물건이었다.


그는 에센의 오른손을 들어 굳어 있는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차가워진 손바닥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다시 몸 곁에 놓았고, 손끝 가까이의 흙을 손으로 고른 뒤 단검을 내려놓았다.


손을 조금만 움직이면 닿을 만큼 가까운 자리였다.


“가져가라.”


그 말 뒤에는 아무것도 붙이지 못했다.


에센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수부타이의 시선이 그 손목으로 내려갔다.


붉은 홍옥수들이 낡은 끈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겨울의 흐린 빛 아래에서는 대부분 어두운 갈색처럼 보였지만, 가장자리가 깨진 한 알은 희끗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래전 오트라르에서 돌아오지 못한 마리암의 팔찌에서 남은 세 알.


에센은 그것들을 자신의 팔찌에 더해 함께 차고 다녔다. 계절이 바뀌고 전쟁터가 달라져도 풀어놓지 않았으며, 끈이 낡으면 새 끈으로 갈아 끼우고 매듭이 느슨해지면 다시 조였다.


수부타이는 그 손목을 들어 올렸다.


매듭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손톱 끝으로 조여 있는 끈을 조금씩 밀어내다가 손을 멈추고, 에센의 팔이 당겨지지 않도록 아래를 받친 뒤 다시 풀었다.


팔찌가 손목에서 미끄러져 그의 손바닥 위로 내려왔다.


수부타이는 그 작은 돌들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목에 감았다. 끈의 길이를 조금 고쳐 매자 홍옥수들이 피부에 차갑게 닿았다.


단검은 에센에게 주었다.


팔찌는 자신이 가져갔다.


수부타이가 무덤 밖으로 물러나자 병사들이 흙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다가 깨진 흙덩이가 낮은 소리를 내며 에센의 옷 위로 흩어졌고, 검은 흙은 다리에서 가슴으로, 다시 팔을 따라 천천히 차올랐다.


수부타이의 시선은 에센의 오른손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손끝 가까이에 단검이 놓여 있었다.


기울어진 겨울 햇빛이 낡은 금속 장식에 걸리자 작은 빛 하나가 튀었다.


그 빛을 보는 순간 수부타이는 전혀 다른 아침을 떠올렸다.


아직 자신의 머리와 수염이 검던 시절이었다.


게르 안으로 들어온 아침빛이 칭기즈 칸의 손에 들린 단검에 닿아 있었다. 칸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고, 수부타이는 앞으로 나아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때의 칼집에는 지금처럼 깊은 흠집이 없었다.


손안에 들어온 무게도 낯설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 무게는 허리 한쪽에 늘 있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말을 타고 내릴 때면 손이 먼저 칼집의 위치를 확인했고, 잠자리 곁에 풀어놓았다가도 아침이면 다시 같은 자리에 찼다.


그날 이후 그 칼은 자신의 허리에서 세상을 보았다.


금나라의 성벽 아래에서는 검은 화살비를 맞으며 달렸고, 호라즘의 사막에서는 말발굽에 걷어차인 모래가 황금빛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길을 건넜다. 카스피해에 처음 닿았던 날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물 위에서 햇살이 수천 수만 개의 조각으로 부서졌으며, 코카서스의 눈 덮인 고개에서는 칼집에 내려앉은 눈이 밤새 얼어붙었다.


그 모든 길에 단검이 있었다.


그리고 에센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기 말의 고삐를 붙잡고 따라오던 아이였다. 말에게 물을 먹이고 안장을 손질하던 소년은 어느 날 자신의 사람들을 맡았고, 열 명을 이끌던 손짓에 백 명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세월이 더 흐른 뒤에는 천 명의 기병이 그의 명령을 기다렸다.


그래도 수부타이에게 말을 가져올 때면 한 번은 복대를 더 당겨봤다.


이미 확인했다고 말해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느슨해진 곳이 없다는 것을 제 손으로 알아본 뒤에야 고삐를 내밀었다.


앞으로도 수부타이의 말을 챙길 병사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손은 다시 오지 않았다.


흙이 떨어졌다.


기억 속의 단검은 게르 안으로 들어온 아침빛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눈앞의 단검에 걸린 겨울빛은 조금씩 좁아졌다.


흙이 칼집을 덮었다.


에센의 손등 가까이까지 흙이 올라왔다.


수부타이는 자신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소매 아래에서 홍옥수들이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고, 손가락을 움직이자 매끈한 구슬들 사이에서 작은 흠 하나가 걸렸다.


다시 흙이 떨어졌다.


마지막까지 드러나 있던 단검의 금속 장식이 저무는 햇빛을 받아 한 번 반짝였다.


그리고 사라졌다.


수부타이는 오래도록 그 자리를 바라봤다.


자신의 젊은 날과 함께해온 물건은 에센 곁에 놓여 땅속으로 내려갔고, 에센이 평생 잊지 못한 사람의 흔적은 이제 자신의 손목에 남았다.


어린아이를 곁에 둔 날부터 함께 살아온 세월, 전쟁터를 함께 달린 스물아홉 해가 흙 아래와 위로 나뉘었다.


겨울 해가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면서 봉분 위에 남아 있던 마지막 빛도 천천히 걷혔다.


흙 아래에서는 에센이 단검과 함께 잠들었다.


나무로 된 화살대와 옷, 살은 긴 시간 속에서 사라졌지만, 흉곽 깊숙이 박힌 철제 화살촉과 오른손 곁에 놓인 단검은 흙 속에 남았다.


그 잠은 팔백 년 넘게 이어졌다.



───



2050년.


이스탄불 HLP 본부 분석실.


키이우에서 수습한 유골의 흉곽은 갈비뼈 사이를 채운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토양 블록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외부로 드러난 뼈의 기록과 기본 분석을 마친 뒤, 보존팀은 굳은 흙을 아주 얇은 층으로 나누어 제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갈비뼈 안쪽에서 짙은 적갈색 부식 흔적이 발견됐다.


주변 토양과는 경계가 뚜렷했고, 가까운 갈비뼈에도 미세한 손상이 남아 있었다.


흉곽 블록은 곧바로 고해상도 단층촬영 장비로 옮겨졌다.


대형 화면 위로 갈비뼈와 척추, 굳은 토양의 단면이 한 층씩 나타났다. 노라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서로 겹쳐 있던 물질이 밀도에 따라 다른 색으로 표시되었고, 뼈와 흙 사이에 묻혀 있던 작은 금속성 물체 하나가 화면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녹과 굳은 흙이 한데 엉겨 겉에서는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남아 있는 금속과 부식층의 경계를 따로 표시하자, 뾰족한 끝과 양옆으로 벌어진 윤곽이 드러났다.


현승이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화살촉?”


노라가 물체를 회전시켰다.


“철제 화살촉으로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러워. 위치와 갈비뼈의 손상을 함께 보면 오른쪽 등에서 안쪽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어.”


화면 위에 화살촉의 위치와 갈비뼈의 손상 부위를 잇는 가느다란 선이 나타났다.


현승이 물었다.


“그럼 이게 사인이야?”


“그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화살촉이 몸 안에 있었다는 것과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이었다는 건 구분해야 해. 뼈에 치유 흔적이 있는지도 더 살펴야 하고, 연조직은 남아 있지 않으니까 어느 장기를 다쳤는지도 확정할 수 없어.”


“지금 표시한 선도 추정이고?”


“응. 매장된 뒤에 뼈나 물체가 움직였을 가능성까지 확인해야 해.”


현승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화살촉 옆에는 유골의 방사성탄소연대와 성별, 추정 연령 자료가 떠 있었다.


13세기.


성인 남성.


사망 당시 나이는 대략 마흔 전후에서 마흔 중반.


그 옆에는 이미 여러 차례 분석했던 또 하나의 유물이 있었다.


단검.


부식으로 거칠어진 금속 표면 위에 남은 문양과 앞서 판독한 이름이 다시 확대됐다.


수부타이.


그러나 그 이름을 이 남자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수부타이는 키이우에서 죽지 않았다. 키이우 함락 뒤에도 서쪽 원정에 참가했고, 그보다 더 오래 살았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른 곳에 있었다.


키이우에서 화살촉을 몸 안에 남긴 채 묻힌 남자.


그 곁에 놓인 수부타이의 단검.


현승은 두 화면을 번갈아 바라봤다.


누가 단검을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 남자와 함께 묻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현승은 턱을 괴고 유골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화면 위의 뼈는 분석 대상이었다. 성별과 연대, 손상 상태와 매장 환경을 기록해야 하는 오래된 인골이었다.


그런데 흉곽 안에서 화살촉 하나가 발견되자 그가 살아 있던 마지막 순간이 궁금해졌다.


화살에 맞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혼자였을까, 곁에 누군가 있었을까.


죽은 뒤 그의 곁에 단검을 놓아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현승은 화면 속 단검을 확대했다. 날과 손잡이의 윤곽은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을 내려놓던 손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손의 주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남은 것은 뼈와 화살촉,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단검뿐이었다.


현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럼…….”


분석실의 흰빛이 유골과 단검, 녹슨 화살촉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 사람은 누구야?”



제1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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