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로그

대가(代價)

by천시록

《신의 로그》

PART 3 — 〈몽골〉


제17화 〈대가〉



장수의 손이 내려왔다.


평원을 둘러싸고 있던 몽골 병사들이 일제히 움직이자, 조금 전까지 낮게 깔려 있던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물러났고, 밀려난 몸이 다시 뒤의 사람들을 떠밀면서 수천 명의 군중이 한꺼번에 출렁였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등 뒤에도 기병과 창끝이 길을 막고 있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여자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 허리가 굽은 노인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앞사람의 옷자락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따로 모여 있던 장인 몇 명이 가족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병사들이 가로로 세운 창대가 그들의 가슴을 밀어냈다.


아버지의 옷이 찢어지면서 뒤로 넘어졌던 아이는 아직도 손안에 남은 천 조각을 쥐고 있었다.


“아버지!”


소년이 장인들의 무리를 향해 달렸다.


몇 걸음 가지 못했다. 앞에서 밀려온 사람의 허리에 부딪친 아이는 몸을 돌려 다른 틈을 찾았지만, 그곳에도 사람의 다리와 옷자락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른들의 몸 사이에 갇힌 채 몇 번이나 뛰어올라도 아버지의 얼굴은 찾을 수 없었고, 사방에서 밀려드는 무릎과 팔꿈치가 작은 몸을 이쪽저쪽으로 밀어냈다.


조금 전까지 하산을 부르던 여자도 군중 속에서 목이 터져라 같은 이름을 외쳤다.


“하산! 어디 있어? 대답해!”


이번에는 멀리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비명과 울음에 묻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여자는 그 목소리를 알아봤다. 아이의 손을 잡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돌렸으나, 바로 앞에서 늙은 남자 하나가 가슴을 움켜쥔 채 무너졌다.


그의 등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노인의 몸이 앞으로 넘어지자 뒤따르던 사람들이 발을 멈추지 못하고 그 위로 쓰러졌다. 누군가 바닥에 깔린 채 살려달라고 외쳤지만, 한꺼번에 밀려드는 몸무게가 가슴과 배를 눌렀고 입에서 터져 나온 피가 먼지와 섞여 검붉은 진흙이 되었다.


첫 번째 칼이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말을 탄 병사가 달아나는 남자의 등을 비스듬히 내리치자 옷과 살이 함께 벌어졌고, 남자는 몇 걸음을 더 달리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뒤따르던 말이 그를 피하지 못했다. 발굽이 등에 내려앉을 때 둔탁한 소리가 났고, 부러진 갈비뼈가 살 속으로 꺼지면서 몸이 짧게 들썩였다.


다른 칼들이 뒤따랐다.


화살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쏘아지지 않았다. 서로 붙어 달아나는 등과 목, 아이를 끌어안은 팔을 향해 낮고 곧게 날아왔다. 화살을 맞은 사람이 쓰러질 때마다 군중 속에 작은 구멍이 생겼지만, 뒤에서 밀려온 사람들이 곧 그 위를 덮었다.


처음에는 모두 바깥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 가도 말과 창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사람들은 평원의 가운데로 몰렸다. 아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아버지가 제 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외쳤고, 품에 갓난아이를 안은 여자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린 채 아이를 배 아래로 감쌌다.


사람의 몸으로 만든 벽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기병들이 바깥을 돌며 달아나려는 사람들을 다시 안쪽으로 몰았고, 보병들은 창과 칼을 앞세운 채 간격을 좁혔다. 창끝이 들어올 때마다 앞줄의 몸들이 뒤로 밀렸고, 피할 공간을 잃은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 채 그 위로 올라섰다.


발밑에서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누군가는 그 손을 붙잡아 일으키려 했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밟고 지나갔다.


하산을 부르던 여자는 마침내 남편을 발견했다.


젊은 남자들이 분리된 줄의 끝에서 하산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백 명의 사람과 몽골 병사들이 있었고, 누군가 몸을 돌릴 때마다 남편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밀고 나갔다. 달아나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떠밀렸지만, 하산이 보일 때마다 다시 방향을 잡았다. 아이가 넘어질 듯 휘청거리자 팔을 끌어 올려 제 몸에 붙였고, 앞을 막은 사람의 어깨를 밀며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하산도 줄 밖으로 뛰쳐나왔다.


병사 하나가 창대를 뻗어 가슴을 막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몸으로 창대를 밀어내고 아내와 아이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으며, 다른 병사가 옆에서 칼을 휘두르는 순간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칼날이 목덜미를 깊게 갈랐다.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어깨와 등을 적셨지만 하산은 곧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도 몇 걸음을 더 달렸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온 아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자도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손끝 사이에는 한 걸음도 남지 않았다.


뒤따라온 병사의 두 번째 칼이 하산의 옆구리로 들어왔다.


몸이 무너지면서 내민 손이 아내의 손가락을 스쳤다가 먼지 위로 떨어졌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녀는 남편의 몸 위에 엎드려 한 손으로 목의 상처를 막고 다른 손으로 얼굴을 두드렸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피가 계속 밀려 나왔지만, 여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눈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이름을 불렀다.


아이도 아버지의 소매를 붙잡았다.


기병의 그림자가 세 사람 위로 드리워졌다.


말의 콧김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흔들었고, 피 냄새를 맡은 말이 불안한 듯 앞발을 굴렀다. 기수는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 칼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칼이 내려왔다.


여자는 마지막 순간 아이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



해가 저물어도 죽이는 일은 끝나지 않았다.


사람의 발과 말발굽이 일으킨 먼지는 피를 머금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른 땅에는 검붉은 웅덩이가 생겼고, 서로를 붙잡은 채 쓰러진 몸들 사이로 아직 숨이 남은 사람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병사들은 시신 사이를 걸으며 움직이는 사람을 찾았다.


죽은 사람 아래에 몸을 숨긴 남자가 숨을 참다가 등에 얹힌 시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짧게 숨을 토해냈다. 가까이 있던 병사가 그 소리를 듣고 멈췄으며, 창끝을 시신들 사이로 밀어 넣어 몇 번 휘저었다.


살을 찌르는 저항이 손잡이를 타고 전해졌다.


아래에서 몸이 크게 떨렸다.


병사는 창을 뽑지 않은 채 체중을 실어 더 깊이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신 밑의 움직임도 멎었다.


장인들이 모인 곳에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찢어진 옷자락을 늘어뜨린 아버지는 아이가 마지막으로 보였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사람들 틈에서 작은 머리가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이제는 그곳에 누운 몸들을 아무리 살펴도 제 아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발을 한 번 옮겼다가 멈췄다.


줄을 벗어나려 한 사람 몇 명이 이미 창에 찔려 죽어 있었다. 앞을 가로막은 병사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창대를 고쳐 쥐었다.


어떤 이는 눈을 감았다.


어떤 이는 끝까지 가족의 시신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밤이 내려온 뒤에도 횃불이 평원을 오갔다. 불빛이 움직일 때마다 겹겹이 쌓인 몸과 벌어진 입, 흙과 피로 색을 잃은 얼굴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음 날, 병사들은 시신을 다시 살폈다.


그다음 날에도 살아남은 사람을 찾았다.


죽은 사람의 몸 아래에서 아이가 발견되었다.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의 피였고, 아이는 어머니의 굳은 팔 안에 웅크린 채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병사가 어머니의 몸을 걷어냈다.


아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추위와 공포에 굳은 손으로 어머니의 옷깃만 붙잡고 있었다.


병사가 아이의 발목을 잡아 시신 사이에서 끌어냈다. 작은 몸이 피 묻은 흙 위로 미끄러졌고, 그제야 아이가 눈을 뜨며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


대답은 없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시신으로 덮인 평원 위를 지나갔다.


잠시 뒤 그 목소리도 끊어졌다.



───



메르브의 거리는 비어 있었다.


시장 좌판에는 주인이 미처 거두지 못한 향신료와 말린 과일이 남아 있었고, 화덕 위에서 식어버린 솥에는 얇은 기름막이 굳어 있었다. 바람에 밀린 문짝이 열릴 때마다 어두운 집 안에서 생활의 흔적이 드러났다. 벽에 걸린 옷, 반쯤 짜다 만 천, 바닥에 놓인 아이의 신발 한 짝.


사람만 없었다.


주인을 잃은 개들이 한동안 골목을 돌아다녔다. 익숙한 문 앞에 앉아 안쪽을 바라보거나 성문을 향해 코를 들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의 발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훗날 역사가 주바이니는 메르브에서 죽은 사람을 세는 데 열사흘이 걸렸으며, 그 수가 백삼십만 명을 넘었다고 기록했다.


죽은 사람에게는 저마다 이름이 있었다.


기록에는 거대한 숫자가 남았다.



───



니샤푸르에는 이미 갚아야 한다고 여겨진 피가 있었다.


칭기즈 칸의 사위 토쿠차르는 니샤푸르 일대의 전투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죽었다. 갑옷 사이를 파고든 화살을 뽑았을 때 피가 멈추지 않았고, 병사들이 천으로 상처를 눌러도 그의 몸에서는 온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남편의 시신을 받아든 여인이 있었다.


칭기즈 칸의 딸이자 토쿠차르의 아내였다.


그녀는 피로 검게 굳은 갑옷과 남편의 몸에서 뽑아낸 화살을 오래 바라봤다. 울부짖지도, 사람들 앞에서 옷을 찢지도 않았다. 다만 화살대를 쥔 손가락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을 주었고, 니샤푸르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 손이 다시 굳어졌다.


1221년, 툴루이가 이끄는 군대가 니샤푸르를 에워쌌다.


성벽 위에서는 화살과 돌이 쏟아졌고 몽골군은 공성 장비를 앞으로 밀어붙였다. 거대한 돌이 성벽에 부딪칠 때마다 흙과 돌가루가 터져 나왔으며, 낮 동안 벌어진 싸움은 해가 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횃불이 성벽 아래를 붉게 물들이는 동안 나무가 부러지고 돌이 깨지는 소리, 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명이 밤새 이어졌다.


며칠 뒤 성벽 한쪽이 무너졌다.


벌어진 틈으로 몽골 병사들이 밀려들면서 싸움은 골목으로 옮겨갔다. 집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갔고, 성문으로 달아나던 이들은 이미 안쪽까지 들어온 기병과 마주쳐 다시 방향을 돌렸다. 좁은 길에서는 도망치는 사람과 들어오는 병사가 부딪쳐 서로 넘어졌으며, 집집마다 닫힌 문이 부서질 때마다 그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비명이 터졌다.


그날 니샤푸르에는 관용이 없었다.


토쿠차르의 미망인은 남편의 몸에서 뽑아낸 화살을 지닌 채 도시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명령이 내려왔다.


살아 있는 것을 남기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사람에게 향하던 칼은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병사들은 침상 밑과 곡식단 사이, 우물과 지하 저장고까지 뒤졌다. 담 아래에서 주인의 집을 지키며 으르렁거리던 개에게 창이 날아들었고, 깨진 항아리 사이로 달아난 고양이는 피 묻은 발자국을 남기며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병사 하나가 그 뒤를 따라갔다.


고양이는 무너진 벽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지만 뒷다리가 미처 들어가기 전에 창끝이 등을 꿰뚫었다. 날카로운 울음과 함께 몸이 벽에 부딪쳤고, 잠시 뒤 꼬리 끝만 몇 번 떨리다가 멎었다.


거리 모퉁이에서는 개 한 마리가 죽은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주인의 얼굴을 핥다가 다가오는 병사들을 향해 이를 드러냈고, 창에 옆구리를 찔리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두 번째 창이 목을 꿰뚫자 개는 주인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니샤푸르의 참극을 전하는 기록에는 백칠십만 명을 넘는 죽음의 숫자가 남았다.


사람뿐 아니라 개와 고양이까지 죽였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졌다.


그 도시에서 복수의 대상은 토쿠차르를 죽인 사람이 아니었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되었다.



───



헤라트에서는 처음에 다른 결말이 찾아왔다.


툴루이가 성벽 앞에 도착해 항복을 요구했지만, 도시를 지키던 장수는 이를 거부하고 몽골의 사절까지 죽였다. 전투가 시작되자 성벽 위에서는 화살과 돌이 쏟아졌고, 몽골군도 공성 장비를 끌어와 쉬지 않고 성벽을 때렸다.


싸움이 이어지던 중 수비를 이끌던 장수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자신들에게 저항을 명령하던 사람이 사라지자 주민들은 더 싸워야 할 이유를 두고 갈라졌다. 끝까지 버티자는 수비병도 있었지만, 집과 가족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성문을 열고 항복하자고 요구했다.


마침내 헤라트의 성문이 열렸다.


저항을 이끌었던 수비병들은 죽었다.


그러나 일반 주민들은 살아남았다.


몽골군이 떠난 뒤 며칠 동안 닫혀 있던 문들이 하나씩 열렸다. 어두운 지하와 창고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햇빛 아래로 나왔고, 말발굽과 피로 어지럽혀진 거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빵집의 화덕에도 다시 불이 들어왔다.


처음 피어오른 연기는 젖은 장작 때문에 매웠지만, 반죽이 익으며 구수한 냄새를 퍼뜨리자 굶주렸던 아이들이 가게 앞에 모여들었다. 물동이를 든 사람들은 다시 우물로 향했고, 살아남은 상인들은 부서진 좌판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도 골목으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집 가까이에서 부모의 눈치를 보며 놀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공을 차고 서로를 쫓아다니는 발소리가 다시 담장 사이를 누볐다. 사람들은 죽은 이를 묻고 무너진 벽을 고치면서도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헤라트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른 전장에서 몽골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도시에 들어오자,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억눌려 있던 분노가 터졌다. 주민들은 다시 무기를 들었고, 도시에 남아 있던 몽골 관리들과 병사들을 죽였다.


그 소식도 결국 몽골군에게 돌아갔다.


이번에 온 사람은 툴루이가 아니었다.


엘지기데이가 이끄는 징벌군이 성벽을 에워쌌다.


포위는 계절이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 안에서는 밀과 보리가 먼저 줄었고, 그다음에는 말과 가축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가죽을 삶아 씹었고 나무껍질과 풀뿌리까지 먹었다. 우물가에서는 먼저 물을 길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으며, 밤마다 성벽 아래에서 들리는 망치와 삽 소리는 몽골군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여섯 달이 넘는 포위 끝에 성벽이 무너졌다.


첫 번째 항복에서 주어졌던 선택은 다시 오지 않았다.


한때 아이들이 뛰어다니던 골목으로 병사들이 들어왔다. 다시 불을 지폈던 빵집의 화덕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그 앞에는 깨진 물동이와 뒤집힌 빵판이 흩어져 있었다.


빵집 주인은 화덕 뒤 좁은 틈에 손녀를 숨겼다.


“무슨 소리가 나도 나오면 안 된다.”


노인은 오래전에 비어버린 밀가루 자루와 부서진 빵판을 틈 앞에 세워 아이를 가린 뒤 문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고함과 쇳소리가 들렸고, 무거운 것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루와 빵판 사이로 들어오던 빛이 병사의 장화에 가려졌다.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와 화덕과 선반을 살피더니 창끝으로 앞에 세워진 것들을 찔러 밀어냈다.


첫 번째 자루가 찢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창끝이 빵판을 걷어내자 뒤에 걸쳐놓았던 자루들도 함께 무너졌고, 거친 천에 남아 있던 밀가루 먼지가 아이의 얼굴 앞에서 희뿌옇게 일어났다.


세 번째 창끝이 어깨 옆을 지나 벽에 부딪쳤다.


아이가 놀라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목 안으로 마른 가루가 들어왔다. 입을 막은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었지만, 그 사이로 아주 작은 기침이 새어 나왔다.


장화가 멈췄다.


병사가 자루를 걷어냈다.


오랜 포위 끝에 함락된 헤라트에서는 살아남은 사람을 찾기 위한 수색대가 주변의 골짜기와 동굴까지 들어갔다. 도시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들도 바위틈과 마른 수로에서 발견되었고, 한 번 살아남았던 도시는 두 번째에는 살아남지 못했다.


빵 냄새가 돌아왔던 골목에는 다시 연기와 피 냄새가 남았다.



───



헤라트가 다시 포위되기 전인 1221년, 바미안에서는 또 다른 죽음이 전쟁의 이유가 되었다.


높은 산들이 계곡을 둘러싸고 있었고, 절벽에는 오랜 세월 사람의 손으로 파낸 수많은 동굴과 거대한 불상들이 서 있었다.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성은 험준한 지형을 등에 업고 버텼으며, 몽골군이 공격을 시작한 뒤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계곡을 훑을 때마다 절벽의 동굴이 낮게 울었다.


칭기즈 칸은 말 위에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병사 몇 명이 무언가를 천에 받쳐 들고 다가왔다.


처음에는 부상병처럼 보였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천을 들고 오는 병사들의 걸음이 이상할 만큼 조심스러웠고, 뒤따르는 장수들의 얼굴에도 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긴장과는 다른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칭기즈 칸은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들을 바라봤다.


천 위에 누운 사람은 젊었다.


무투겐.


차가타이의 아들이며 칭기즈 칸이 특별히 아끼던 손자였다.


갑옷 한쪽이 피로 검게 젖어 있었다. 성벽에서 날아온 화살이 갑옷의 벌어진 틈을 뚫고 몸 깊숙이 들어갔고, 잘라낸 화살대 주변에는 병사들이 상처를 누르던 천이 피에 젖은 채 붙어 있었다.


칭기즈 칸이 말에서 내렸다.


병사들이 그의 앞에 손자를 내려놓았다. 천의 한쪽이 돌에 걸리자 한 사람이 급히 몸을 숙여 그것을 빼냈고, 다른 병사는 무투겐의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받쳤다.


칭기즈 칸은 그들이 물러난 뒤에도 한동안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여전히 공성기의 굉음이 울렸고 성벽 위에서는 화살과 돌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천 주위에서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손자 곁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투겐의 얼굴에는 흙이 묻어 있었다. 땀에 젖었다가 마른 흙이 뺨을 따라 굳어 있었고,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아무 숨도 나오지 않았다.


칭기즈 칸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뺨에 묻은 흙을 천천히 닦아냈다. 한 번에 지워지지 않자 엄지로 같은 자리를 다시 문질렀고, 굳은 흙이 가루가 되어 손끝에 묻었다.


손자의 피부는 차가웠다.


그는 흙을 다 닦은 뒤에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뺨을 감싼 채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엄지를 조금 움직였지만, 무투겐의 얼굴은 손길을 따라 미세하게 밀릴 뿐이었다.


곁에 선 장수가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칭기즈 칸은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이 아이가 어디에서 맞았느냐?”


장수가 고개를 숙인 채 바미안의 성벽을 가리켰다.


칭기즈 칸의 시선이 손자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손가락 끝에는 조금 전 닦아낸 흙이 남아 있었다.


그는 성벽을 바라봤다.


오랫동안.


“저 안에 얼마나 남아 있느냐?”


장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성 안에는 수비병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가족과 상인, 농부와 목동, 전쟁이 시작된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칭기즈 칸도 다시 묻지 않았다.


그는 무투겐의 얼굴을 한 번 더 내려다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이 뺨에서 떨어지고, 무릎에 묻은 흙도 털지 않은 채 성벽을 향해 돌아섰다.


“살아 있는 것을 남기지 마라.”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공성기가 성벽을 때리는 굉음이 계곡을 울렸고, 무너진 틈으로 병사들이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절벽의 동굴과 무너진 집, 마구간과 바위틈으로 숨어들었지만 병사들은 횃불을 들고 어둠 속까지 들어갔다.


창에 찔린 말의 울음이 절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소와 양이 우리 안에서 쓰러졌고, 동굴 안에 숨어 있던 아이의 울음도 오래 숨겨지지 못했다. 사람이 비명을 지르면 절벽 건너편에서 같은 소리가 한 번 더 들렸고, 다시 작은 메아리로 되돌아와 계곡 깊은 곳으로 흩어졌다.


한동안 바미안 전체가 수많은 목소리를 되풀이했다.


살려달라는 외침과 아이를 찾는 부모의 목소리 사이로 상처 입은 짐승의 울음이 섞였고, 칼과 창이 뼈에 부딪치는 소리가 가까운 동굴 안에서 짧게 울렸다.


그러나 하나씩 원래의 소리가 사라지자 메아리도 더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산 너머로 지고 계곡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절벽의 거대한 불상들은 처음과 같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횃불이 동굴 사이로 움직일 때까지 돌로 된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칭기즈 칸은 바미안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하게 했다.


그가 손자를 잃은 도시는 폐허로 남겨졌다.


한 사람을 잃은 슬픔이 한 도시의 죽음이 되었다.



───



그렇다고 몽골군이 지나간 모든 도시가 같은 운명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지배자는 성벽 위에 병사를 올리는 대신 금과 은, 말과 식량을 준비해 성 밖으로 나갔다. 어떤 도시는 몽골군이 요구하기도 전에 장인과 젊은 남자들을 내놓았고, 그렇게 살아남은 거리에서는 다음 날에도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그러나 며칠 길 너머의 다른 도시에서는 집도, 사람도, 가축도 남지 않았다.


그 차이를 사람들은 보았다.


메르브.


니샤푸르.


헤라트.


바미안.


도시의 이름 하나가 들릴 때마다 그 뒤에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어떤 이름에는 백만이 넘는 죽음의 숫자가 붙었고, 어떤 이름에는 개와 고양이조차 살아남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따라다녔다. 한 번 항복해 살아남은 뒤 다시 저항했다가 모든 것을 잃은 도시도 있었고, 칸의 손자 한 사람이 죽은 뒤 다시는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한 도시도 있었다.


소문은 군대보다 빨랐다.


사람들은 이제 몽골군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만 묻지 않았다.


성문을 열면 무엇을 빼앗길지, 문을 닫으면 누구부터 죽을지 물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



이 모든 일이 시작되기 전, 칭기즈 칸이 호라즘으로 보낸 것은 군대가 아니었다.


비단과 모피, 은과 여러 지역의 상품을 실은 사백오십 명 규모의 상단이었다. 그들은 성을 빼앗으러 간 병사가 아니라 물건을 팔고 다른 물건을 사서 돌아오려던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대부분이 오트라르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마리암의 아버지는 살아남았다.


그가 에센에게 가져온 것은 딸이 아니었다.


끊어진 팔찌에서 찾아낸 붉은 홍옥수 세 알이었다.


그 뒤 바카라임자를 넘기라는 사절이 갔고, 한 사람은 죽었으며 두 사람은 수염을 깎인 채 돌아왔다. 이날축은 끝내 넘겨지지 않았다.


말들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오트라르를 향한 복수였다.


그러나 전쟁은 오트라르에서 멈추지 않았다. 복수해야 할 사람과 아무 관계가 없는 도시를 지나고, 마리암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집과 골목까지 찾아갔다.


메르브에서 하산을 부르던 여자는 마리암을 몰랐다.


니샤푸르에서 주인의 시신을 지키다 죽은 개도 이날축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다.


헤라트의 화덕 뒤에 숨었던 아이도 칭기즈 칸의 사절을 죽이지 않았다.


바미안의 동굴에서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는 무투겐에게 화살을 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을 구별하지 않았다.



───



그 무렵, 수천 리 떨어진 서쪽 땅에서 에센은 말의 굴레를 손질하고 있었다.


오랜 행군으로 가죽끈은 땀과 먼지를 머금어 뻣뻣해져 있었고, 에센은 갈라지기 시작한 부분에 기름을 문지른 뒤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당겨보았다.


소매가 밀려 올라가자 홍옥수 팔찌가 저녁 햇빛을 받았다.


에센은 그 사이에 더해진 마리암의 구슬 세 알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중 하나는 가장자리가 깨져 희끗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작은 흠집에 손톱 끝이 걸렸다.


마리암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긴 기록이 필요하지 않았다. 홍옥수 세 알이면 충분했다. 말린 살구를 훔쳐 먹은 말과 자신을 말도둑이라고 부르던 목소리, 돌아오면 함께 살자던 약속이 손끝의 작은 돌 안에 모두 남아 있었다.


에센은 한동안 구슬을 만지다가 소매를 내려 덮었다.


말이 고개를 흔들자 늘어진 굴레의 쇠고리가 작게 부딪쳤고, 그는 다시 가죽끈을 잡아 갈라진 부분에 기름을 문질렀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메르브의 평원이 보이지 않았다.


찢어진 아버지의 옷자락도, 하산의 피가 묻은 소매도 보이지 않았다. 헤라트의 아이를 가렸던 빈 밀가루 자루와 바미안의 동굴 바닥에 떨어진 작은 신발이 어떤 사람의 것이었는지 에센은 알지 못했다.


그 물건들에도 한 사람의 세상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들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기록 속에서 죽은 사람들은 백삼십만 명이 되었고, 백칠십만 명이 되었으며, 마침내 수백만이라는 숫자로 묶였다.


에센은 마리암을 죽인 자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다.


칭기즈 칸의 분노도, 남편을 잃은 딸의 슬픔도, 손자의 얼굴에서 흙을 닦아내던 할아버지의 손길도 모두 진짜였다.


하산을 부르던 여자의 목소리도 그랬다.


사람들은 그것을 응징이라고 불렀다.


정복이라고 기록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죽은 사람에게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대가.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아니었다.



제1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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