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맥
《신의 로그》
PART 4 — 〈헝가리〉
제19화 〈동맥〉
이스탄불 HLP 본부 제3분석실에는 아침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 있었다.
현승이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은 아직 대답을 얻지 못한 채 화면 위에 남아 있었다.
키이우에서 수습한 남성 유골.
흉곽 안에서 확인된 철제 화살촉.
그리고 오른손 가까이에 놓여 있던, 수부타이의 이름이 새겨진 단검.
분석을 거듭해도 밝혀지는 것은 물질에 남은 사실뿐이었다. 화살촉은 그 남자가 살아 있을 때 몸 안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았고, 단검은 같은 매장 공간에서 수습되었으며, 역사 속 수부타이는 키이우가 함락된 뒤에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누가 화살을 쏘았는지, 누가 단검을 놓았는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어느 장비로도 복원할 수 없었다.
노라가 마지막 분석 창을 닫았다.
“지금 증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새로운 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더 나아갈 수 없어.”
엘리즈가 보존 기록을 확인한 뒤 케이스의 덮개를 내리자 투명한 판 위로 비스듬히 들어온 햇빛이 한 번 미끄러졌고, 팔백 년 전 누군가의 허리에 매달려 대륙을 건넜던 단검은 짧은 잠금음과 함께 온도와 습도가 통제되는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현승은 잠긴 케이스를 잠시 바라봤다.
증거는 남아 있었다.
이야기는 사라져 있었다.
───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통령 집무실의 긴 타원형 회의탁자에는 핵심 각료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창밖의 다뉴브강은 아침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지만, 강변의 석조 제방 아래로는 예년 같으면 물속에 잠겨 있었을 누런 흔적이 길게 드러나 있었다. 수위가 내려간 자리마다 검게 젖었던 돌과 하얗게 마른 돌이 띠를 이루었고, 강은 여전히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면서도 해마다 조금씩 야위어가는 몸처럼 보였다.
대통령 앞의 대형 화면에는 강보다 빠르게 나빠지는 것들이 떠 있었다.
전력예비율과 산업가동률, 가스 저장량과 곡물 비축량, 소비자물가와 실업률. 어느 숫자도 혼자 움직이지 않았다. 전력이 부족해지면 공장이 멈췄고, 공장이 멈추면 실업률이 올랐으며, 양수기와 냉장시설이 정지하면 농업 생산과 식량 비축량이 함께 떨어졌다. 생산과 비축을 나타내는 선이 내려갈수록 물가와 실업률은 위로 치솟았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벌어지는 선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버틸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들고 있었다.
에너지장관이 보고를 마치자 대통령은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루마니아는?”
외교장관이 대답했다.
“오늘 오전에도 공급 재개를 거부했습니다. 자국에 필요한 가스와 전력을 확보하고 나면 헝가리로 보낼 여유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폭염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중단한 공급을 되돌리기 어렵다고 합니다.”
“가격을 더 올리겠다는 제안도 전달했습니까?”
“그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합니다.”
대통령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루마니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탓한다고 두 나라에 나눠줄 가스와 전기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고, 세계 곳곳에서 국가들이 계약이나 동맹보다 자국의 전력과 식량을 먼저 챙기기 시작한 지도 오래였다.
다뉴브 너머로 아침의 부다페스트가 펼쳐져 있었다.
밤새 거리를 메웠던 사람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광장 주변에는 부서진 차단봉과 찢어진 현수막이 나뒹굴었고, 검게 그을린 도로 위에서는 청소차가 깨진 유리를 긁어모으고 있었다. 아직 견인되지 않은 차량 한 대는 뼈대만 시커멓게 남은 채 교차로 한쪽에 서 있었으며, 진압용 드론 두 대가 천천히 상공을 돌면서 골목과 지붕을 훑고 있었다.
사람들은 떠났지만 대통령의 귀에는 어젯밤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먹을 것을 달라는 외침과 전기를 공급하라는 요구, 정부를 비난하는 고함이 처음에는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뒤엉켰다가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부터 하나의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물러나라!”
수십만 명이 같은 말을 외치자 집무실의 두꺼운 유리창도 그 진동까지 막아주지는 못했다.
대통령은 천천히 창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그 질문의 답은 오래전부터 국경의 관로와 발전소, 도시와 공장, 밭과 시장에 쌓이고 있었다.
───
헝가리는 오래전부터 국경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에너지에 기대어 살아온 나라였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원유와 천연가스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대부분을 수입해야 했고, 전력 역시 이웃 나라의 발전소와 연결된 송전망을 통해 상당량을 끌어왔다. 바다가 없는 헝가리에게 국경을 넘는 송유관과 가스관, 송전선은 공장과 도시를 먹여 살리는 혈관이나 다름없었다.
2050년의 지도에도 그 혈관들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을 흐르는 양은 갈수록 줄었고, 끝내 멎는 곳이 늘어났다.
동쪽에서 들어오던 오래된 송유관은 전쟁과 국경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멎었다가 다시 열리기를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정상 공급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졌다. 남쪽에서 올라오던 가스도 공급국과 경유국이 자국의 발전소와 산업을 먼저 챙기면서 해마다 줄었고, 다른 관로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격으로 압송시설이 파괴되었다. 공격받은 쪽은 테러라고 주장했고 의심받은 나라는 개입을 부인했지만, 검게 그을린 철골과 찢어진 배관 앞에서 바카라임 공방은 가스 한 입방미터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드리아해에서 올라오는 길은 살아 있었다.
항만의 저장탱크도, 내륙으로 원유를 밀어 올리는 펌프도 멀쩡했지만 항구에 들어오는 유조선부터 줄었다. 산유국들이 자국의 전력과 산업을 먼저 지키겠다며 수출량을 제한했고, 세계 곳곳의 해상 분쟁이 운송비와 보험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관은 있었지만 그 안에 충분히 흘려보낼 것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헝가리를 떠받친 것은 2040년대에 거듭 확충된 루마니아 방면의 전력망과 가스망이었다. 산업시설과 도시의 전력망이 그 연결에 기대었고, 여러 공급로가 하나씩 막힐 때마다 루마니아를 거쳐 들어오는 가스와 전기는 헝가리 전체의 의존을 더 많이 떠안았다.
그러나 폭염과 가뭄은 국경 반대편에도 닥쳤다.
루마니아의 도시들도 냉방 전력이 부족했고, 발전소와 공장들은 줄어드는 물과 연료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헝가리로 보내는 물량을 줄여도 자국의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루마니아 정부는 남은 수출 물량까지 국내로 돌렸다.
발전소와 가스 저장시설에는 여전히 자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국경 밖으로 보내려면 루마니아의 어느 도시나 공장이 자기 몫을 줄여야 했다. 부쿠레슈티와 지방 도시에서 같은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계약보다 강했다.
국경 가까운 압송시설에서는 헝가리 쪽으로 뻗은 굵은 관들이 한낮의 열기를 받아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계가 고장 난 것도, 시설이 파괴된 것도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지면을 통해 낮은 진동을 퍼뜨리던 압송기는 침묵했고, 헝가리로 향하는 관로의 유량계는 영에 머물렀다.
밸브가 잠겼을 뿐이었다.
헝가리는 계약을 지켜달라고 요구했고 루마니아는 거절했다. 가격을 더 지불하겠다는 제안에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돈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세상에는 돈을 내밀어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생기고 있었다.
───
며칠 전, 부다페스트에서 남쪽으로 삼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자동차 전장부품 산업단지.
오후 세 시가 조금 지나자 거대한 생산동을 채우던 소리가 하나씩 사라졌다.
전기차의 구동모듈을 조립하던 로봇팔이 작업대 위에서 멈췄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움직이던 전력제어장치와 배터리 부품들이 일정한 간격을 둔 채 제자리에 섰다. 생산라인 사이를 오가던 무인 운반차량도 마지막 명령을 수행한 뒤 통로 가장자리에 나란히 정지하면서, 조금 전까지 모터의 진동과 금속 마찰음으로 가득했던 공간에는 환기장치가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와 작업자들의 낮은 웅성거림만 남았다.
공장장이 조립라인 위의 플랫폼으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안전모 끈을 따라 목으로 번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앞에 모인 노동자들을 바라봤다.
“해고는 아닙니다. 정부의 전력 배정이 정상화되는 즉시 생산을 재개합니다. 복귀 일정이 정해지면 전원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맨 뒤에 서 있던 중년 노동자가 물었다.
“그게 언제입니까?”
공장장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누구에게도 약속할 수 없는 날짜였다.
대답을 기다리던 노동자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휴대기기를 꺼냈다. 기름과 지문으로 얼룩진 화면에는 아내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밀가루 사 와. 있으면 두 개.』
그 아래에는 조금 늦게 도착한 메시지가 하나 더 있었다.
『오늘도 단수야. 물도 하나만 구해봐. 아이 마실 게 없어.』
노동자는 두 문장을 한동안 바라보다 휴대기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다음 날 같은 시간에 이곳으로 출근하리라 믿었고, 작업대 위에는 마치 내일 이어서 조립할 수 있다는 듯 완성되지 않은 부품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사물함으로 걸어가 겉옷을 꺼내 팔에 걸쳤다.
공장 밖에서는 한여름의 햇빛이 아스팔트 위에서 하얗게 튀고 있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수백 명의 발밑에 짧고 짙은 그림자가 붙어 움직였으며, 뜨겁게 달아오른 건물 벽에서는 갇혀 있던 열기가 숨처럼 밀려 나왔다.
누구도 언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
문제는 국경 밖에서 들어오는 공급만 줄어든 것이 아니었다.
2050년의 헝가리는 이십여 년 전보다 훨씬 많은 전기를 필요로 했다. 내연기관을 밀어낸 전기차와 물류차량, 사람 대신 밤낮없이 움직이는 자동화 공장과 안드로이드, 농장의 양수기에서 도시의 정수시설까지 슬롯를 움직이는 거의 모든 것이 전력망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빠르게 늘어난 전력 수요 가운데 하나는 AI 데이터센터였다.
도시 외곽의 거대한 연산시설에서는 금융과 의료, 물류와 교통, 행정과 산업을 유지하는 수많은 장치가 밤낮없이 돌아갔다. 전력망 자체도 AI의 수요 예측과 배분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전기가 부족하다고 핵심 연산체계부터 멈추면 어디에 얼마나 전기를 보내야 하는지를 계산하고 통제하는 기능까지 함께 흔들렸다.
폭염은 그 모든 문제를 가장 나쁜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기온이 사십 도를 넘어서면 도시 전체가 냉방기를 켰고, 뜨거워진 데이터센터도 서버를 식히기 위해 더 많은 전기와 냉각수를 요구했다. 전기차와 자동화 공장, 정수시설과 관개설비가 같은 전력을 놓고 경쟁하는 동안 다뉴브강의 수위는 내려가고 물의 온도는 높아졌다.
팍시 원전 단지의 일부 설비에는 출력 제한 경고가 내려왔다. 원자로와 발전설비를 식힌 물을 이미 뜨거워진 다뉴브로 계속 흘려보낼 수 없었고, 강물의 유량마저 줄어들자 평소의 출력을 유지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태양광이 가장 많은 전기를 쏟아내는 한낮을 넘기고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전력망의 여유는 더 빠르게 사라졌다.
그렇다고 모든 데이터센터가 이전처럼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상업용 연산과 긴급하지 않은 서비스는 이미 여러 차례 중단되었고, 병원과 금융, 정수와 배전망을 유지하는 국가 지정 핵심 연산동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이유가 아니었다.
그날 밤 부다페스트 남부의 여러 구역이 순환정전에 들어가자 강 건너까지 이어지던 아파트의 불빛이 블록을 따라 차례로 사라졌다. 에어컨이 멈춘 방 안으로 낮 동안 건물과 아스팔트가 머금었던 열기가 밀려들었고, 층과 층 사이에서 멎은 엘리베이터에서는 비상통화가 이어졌다. 창문을 열어도 들어오는 것은 뜨거운 공기뿐이었으며, 어린아이를 안은 부모들이 복도와 계단으로 나와 희미한 비상등 아래에 모였다.
강변의 병원은 환했다.
정수장도 멈추지 않았다.
도시 외곽 데이터센터의 핵심 연산동과 냉각설비에도 불이 남아 있었다.
전기가 부족해지자 누구에게 먼저 빛을 줄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빛을 받은 곳이 생길 때마다 어딘가는 어두워졌다.
───
헝가리 대평원에서는 같은 위기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농경지는 한여름 햇빛 아래 누렇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저수지의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진흙이 층층이 굳었고, 오래전 물속에 잠겼던 나무뿌리와 돌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관개수로 바닥에는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깊은 균열이 얽혀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잡초 몇 포기만 질기게 고개를 내밀었다.
농부 한 사람이 양수기의 전원을 올렸다.
제어판의 작은 불빛만 켜졌을 뿐 모터는 돌아가지 않았다. 화면에는 다음 전력 배정 시간까지 남은 숫자가 떠 있었다.
농부는 욕설을 삼키며 밭으로 내려가 흙을 한 줌 움켜쥐었다. 손가락을 펴자 흙은 덩어리로 남지 못하고 고운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고, 손바닥 주름 사이에는 수분 한 점 없는 누런 먼지만 남았다.
옆 밭에서도 자동 농기계가 멈춰 있었고, 가까스로 물을 확보한 농장은 전력이 들어오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에는 전기가 없었고 어디에는 물이 없었으며, 둘 다 있는 곳에서도 연료와 비료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경작을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갔다.
그해 헝가리의 곡물 생산량 전망치는 봄에 한 번 내려갔고 초여름에 다시 내려갔다. 8월이 되자 정부는 더 이상 새로운 전망치를 발표하지 않았다.
국가 비축 사일로의 저장 수위를 나타내는 계기판에서는 녹색 구간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곡물을 실어 나르던 컨베이어 아래에는 낟알보다 먼지가 더 많이 떨어졌고, 빈 공간이 커진 저장고 안에서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전보다 훨씬 멀리 울렸다.
───
공장에서 나온 노동자는 퇴근길에 아내가 부탁한 밀가루와 물을 구하려고 마트에 들렀다.
입구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냉방은 제한적으로만 가동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도 공기가 서늘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몸에서 올라온 땀 냄새와 녹기 시작한 냉동식품의 비린 냄새가 통로 사이에 눌러앉아 있었다.
그는 익숙한 진열대로 갔다가 가격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밀가루 가격은 지난주보다 또 올라 있었다.
한 봉지를 집어 들고 잠시 고민하다 두 번째 봉지에도 손을 뻗었지만, 진열대에 붙은 구매 제한 안내를 보고 손을 거두었다.
1인 1개.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앞쪽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직원이 카트에 병에 든 물을 가득 싣고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걸었지만 물이 보인다는 말이 통로 뒤쪽까지 번지자 걸음이 빨라졌고, 누군가 카트 손잡이를 붙잡는 순간 줄이라는 것은 사라졌다.
“한 묶음씩입니다! 뒤에도 사람이 있어요!”
직원이 목청을 높였지만 뒤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 손을 잡고 있던 여자가 사람들의 어깨에 밀려 통로 밖으로 밀려났고, 한 남자가 물 두 묶음을 가슴에 끌어안자 옆에 있던 노인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나는 놔요. 뒤에도 사람이 있잖아.”
“우리 집에 아이가 셋이에요.”
“우리도 사람이야!”
서로 붙잡은 팔이 엉키면서 비닐 포장이 찢어졌고, 물병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사방으로 굴렀다. 조금 전까지 차례를 지키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동시에 허리를 숙이면서 욕설이 터졌고, 사람들의 어깨에 밀린 진열대 하나가 기울자 그 위에 쌓인 통조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노동자는 밀가루 봉지를 가슴에 안고 사람들 틈으로 손을 뻗었다.
투명한 물병 하나가 발치 가까이 굴러왔다.
몸을 숙이려는 순간 다른 손이 먼저 나타나 그것을 낚아챘고, 고개를 든 노동자의 눈앞에서 병은 낯선 사람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물을 끌어안은 남자의 얼굴에 자신과 다르지 않은 두려움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내의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아이 마실 게 없어.
그러나 그의 손에 남은 것은 밀가루 한 봉지뿐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내일도 출근할 줄 알았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사람들은 물 한 병을 놓고 서로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
며칠 뒤, 그 노동자는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부다페스트로 밀려들었다. 지하철역에서는 승강장을 빠져나온 행렬이 계단을 가득 메웠고, 다뉴브를 건너는 다리 위에도 피켓을 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노동조합과 농민단체, 병원·교육 노동자와 자영업자 단체가 따로 준비했던 집회들은 도시 중심부로 들어오면서 하나의 거대한 군중으로 합쳐졌고, 오전에 수만이던 사람은 정오를 지나며 수십만으로 불어났다.
정부와 주최 측의 추산은 크게 엇갈렸다.
어느 쪽의 숫자가 맞든 부다페스트 중심부가 사람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데브레첸과 세게드, 미슈콜츠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도 시위가 시작되었다.
공장 노동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며칠 전까지 같은 생산라인에 서 있던 작업복 차림의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였고, 병원 직원과 교사, 자영업자와 대학생,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가 거리를 채웠다. 누군가는 식량 가격을 낮추라고 외쳤고, 누군가는 전력 배급을 공정하게 하라고 요구했으며, 자동화 기업들이 벌어들인 부를 슬롯에 돌려놓으라는 피켓도 머리 위로 올라왔다.
오후까지 시위에는 질서가 있었다.
사람들은 길을 열어 구급차를 보내주었고, 더위에 쓰러진 노인에게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물을 건넸다. 경찰도 방패를 들고 있었지만 군중을 밀어붙이지 않았으며, 수십만 명의 목소리가 국회의사당의 첨탑을 넘어 다뉴브강까지 울려 퍼지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이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요구하러 왔다고 믿었다.
해가 기울면서 공기가 달라졌다.
정부의 추가 대바카라이 발표되었다.
기대했던 에너지 공급 재개 소식은 없었고 해외 식량 확보 협상도 실패했다. 다음 주부터 산업용 전력을 추가로 제한하고 순환정전 구역을 확대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야유가 파도처럼 번졌다.
앞줄에서 경찰과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계속 앞으로 밀려왔다. 방패가 움직이자 군중도 밀렸고, 그 틈에서 젊은 여자 하나가 넘어졌다.
“사람 넘어졌어요!”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일으키려고 몸을 숙였지만 뒤쪽에서 밀려오는 힘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 위로 다른 사람 하나가 휘청거리며 쓰러졌고, 경찰선 앞에 눌린 사람들의 비명이 함성과 뒤섞였다.
공장 노동자도 군중 사이에 끼여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뒤에는 사람이 있었고 옆에도 사람이 있었다. 팔과 어깨가 사방에서 몸을 밀어붙이는 가운데, 그의 발끝이 깨진 보도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돌멩이 하나에 걸렸다.
그는 몸을 숙여 돌을 집었다.
하루 종일 햇볕을 받은 돌은 거칠고 뜨거웠다. 손가락을 오므리자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그 작은 통증을 따라 멈춰버린 공장과 공장장의 대답 없는 얼굴, 밀가루 한 봉지와 자신보다 먼저 물병을 낚아채던 손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아이 마실 게 없어.
경찰선이 다시 한 걸음 움직였다.
앞줄의 사람들이 뒤로 밀려났고, 누군가 경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방패 너머의 경찰도 땀으로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투명한 보호면 안에서 크게 뜬 눈에는 군중과 다르지 않은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노동자는 돌을 든 채 잠시 멈췄다.
그는 아직 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펴지지 않았다.
광장 어딘가에서 여자의 비명이 다시 터졌고, 노동자는 이를 악문 채 팔을 뒤로 젖혔다.
돌멩이가 그의 손을 떠났다.
뜨거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돌은 경찰 한 사람의 투명한 보호면을 정면으로 때렸다. 보호면은 깨지지 않았지만 둔탁한 충격음이 방패 사이에서 울렸고, 고개가 뒤로 꺾인 경찰을 붙잡으려 옆의 대원이 움직이는 순간 전열 전체가 흔들렸다.
누군가 소리쳤다.
“경찰이 친다!”
경찰선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앞으로 밀었고, 군중은 그것을 진압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앞줄에서 방패를 붙잡는 손이 나타났으며 뒤에서는 무엇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계속 밀려왔다. 방금 날아간 돌을 본 누군가가 두 번째 돌을 집어 던졌고, 이번에는 병과 금속 깡통이 그 뒤를 따랐다.
유리가 경찰 방패에 부딪혀 산산이 깨졌다.
최루성 연무가 터졌다.
한 시간 전까지 쓰러진 노인에게 물을 건네던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며 달렸고, 조금 전까지 군중을 자극하지 않으려 버티던 경찰들이 방패와 진압봉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비명과 욕설, 깨지는 유리와 발밑에서 밟히는 물건들의 소리가 광장을 집어삼켰다.
공장 노동자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뒤로 물러났다.
돌을 던진 손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시작했는지, 그 돌이 어디까지 날아가게 될지 그는 알지 못했다.
───
밤이 깊어지면서 시위는 더 이상 의사당 앞에만 머물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충돌이 시작되자 광장을 빠져나갔지만 남은 군중 일부가 도심으로 흩어지면서 유리창이 깨지고 상점의 셔터가 뜯겼다. 불붙은 차량에서 솟아오른 검은 연기가 건물 사이를 메웠고, 붉은 불길은 맞은편 유리창마다 일그러진 모습으로 번졌다.
처음에는 전자제품을 들고 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식료품점의 셔터가 뜯기자 사람들은 그쪽으로 몰렸고, 통조림과 밀가루, 병에 든 물과 의약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작은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노인은 셔터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안 돼! 여기 들어오면 안 돼!”
맨 앞의 남자가 잠깐 멈췄다.
둘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이 가게에서 빵과 담배를 사던 동네 사람이었다.
노인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는 눈을 피했다.
“미안해요.”
그가 노인을 밀어낸 순간 뒤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그러나 같은 거리 모퉁이에서는 시위대 몇 명이 쓰러진 경찰을 끌어내 구급대에 넘기고 있었고, 약국의 깨진 창문 앞에서는 한 여자가 인슐린 상자를 가슴에 품은 채 울고 있었다.
배고픈 사람과 두려운 사람, 화가 난 사람과 혼란을 기회로 삼는 사람, 그러면서도 쓰러진 타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같은 거리에 뒤엉켜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부다페스트의 밤이 붉게 타고 있었다.
───
대통령은 집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다뉴브 너머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왔고 강물 위에서는 화재의 붉은 빛이 길게 흔들렸다. 경찰 드론의 불빛이 연기 사이를 가르며 움직이는 동안 뒤쪽 화면에서는 내무부의 보고가 쉬지 않고 올라왔다.
부다페스트 여러 구역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다른 도시에서도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시작됐고, 일부 경찰서는 지원을 요청했다. 진압명령을 거부하거나 방패를 내려놓은 경찰이 있다는 보고와,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군 병력 지원까지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차례로 화면 위를 지나갔다.
대통령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구호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한마디를 외쳤고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따라 했으며, 그것이 다시 뒤쪽 군중으로 번져나갔다. 흩어져 있던 목소리가 같은 박자를 얻으면서 거대한 광장 전체가 하나의 목소리를 냈다.
“대통령은 물러나라!”
함성이 다뉴브를 건너왔다.
“대통령은 물러나라!”
대통령은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대통령님.”
에너지장관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다시 아침 햇빛이 들어오는 회의실이었다.
어젯밤의 불길도, 창 아래를 메웠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탁자 주위에 앉은 각료들의 얼굴에는 누구도 제대로 잠들지 못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통령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바라보다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력예비율과 산업가동률.
가스와 곡물의 비축량.
물가와 실업률, 치안 지수.
어젯밤 거리에서 보았던 수십만 명의 삶이 몇 개의 숫자로 바뀌어 그의 앞에 떠 있었다.
제19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