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얻는 기술
강을 건너기 전, 싯다르타는 도시를 만난다.
헤세는 그 입구에 한 사람을 세워 둔다.
카말라.
향기가 있고, 말이 적다. 그 적음이 사람을 끌어당긴다. 싯다르타는 아직 맨발이고 옷은 초라하다. 그러나 카말라는 그의 옷보다 눈을 먼저 본다.
살아 있는 눈.
배울 수 있는 사람의 눈.
싯다르타는 숲에서 스승을 떠났다. 마지막 끄덕임을 자기 안으로 돌렸고, 이제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보려 한다.
그러나 자기 눈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과, 세계를 다루는 법을 안다는 것은 다르다.
카말라는 그 차이를 알고 있다.
그녀는 경전을 주지 않는다. 고행을 시키지도 않는다. 대신 세계의 예법을 가르친다. 원하는 것을 말하는 법, 기다리는 법, 자신을 함부로 내어 주지 않는 법, 상대의 욕망을 읽는 법.
사랑도 감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까워지는 데에는 순서가 있고, 침묵에는 길이가 있으며, 미소에도 때가 있다. 싯다르타는 배운다. 빨리 배운다. 생각하고, 기다리고, 굶을 줄 알았던 그는 이제 말하고, 웃고, 얻는 법까지 익혀 간다.
세계가 손안에 들어오는 느낌이 든다.
《파우스트》의 헬레나가 가까워질수록 멀어지는 이상이라면, 카말라는 배울 수 있는 세계다. 욕망은 형태를 얻고, 사랑은 예법을 가지며, 아름다움은 반복할 수 있는 기술이 된다.
그 능함은 달콤하다.
달콤해서, 공허는 아직 다음 장의 일이다.
《데미안》이 알을 깨라고 했고, 앞선 장들이 집을 떠나고 성자의 길을 입지 말라고 했다면, 이곳의 질문은 조금 더 세속적이고 매혹적이다.
4장은 세계가 열리는 밤이다.
동시에 사람의 얼굴이 숫자 뒤로 가려지기 시작하는 밤이다.
창업가의 방에도 카말라가 있다.
고객을 설득하는 말. 투자자를 안심시키는 표정. 거절을 다음 만남으로 바꾸는 타이밍. 발표의 속도. 침묵의 길이. 질문을 받았을 때 흔들리지 않는 시선.
그 기술들은 대부분 틀리지 않다.
그래서 위험하다.
틀린 기술은 실패로 드러난다. 어색한 말은 상대의 표정에서 멈추고, 잘못짚은 제안은 계약서 앞에서 거절된다.
그러나 능한 기술은 숫자가 되어 남는다.
전환율이 오르고, 고객이 늘고, 투자자의 후속 미팅이 잡힌다. 숫자가 남으면, 그 숫자 안에 들어간 사람은 잠시 보이지 않아도 된다고 믿기 쉽다.
나도 그 방에 오래 앉아 있었다.
창업하던 밤마다 사람을 얻는 법을 연습했다. 발표의 속도와 웃음의 각도, 질문을 받은 뒤 대답하기 전까지의 침묵까지 고쳐 보았다. 실패한 이야기는 짧게 만들었고, 가능성은 더 크게 들리도록 다듬었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이 사업을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실패를 지나고 나서야 뒤늦게 알았다.
기술이 부족해서 넘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기술이 너무 빨라서, 듣기 전에 사람을 얻으려 한 쪽에 가까웠다.
누가 계약했는지는 기억했다. 얼마를 냈는지도 기억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왜 남았는지는 늦게 생각났다. 떠난 사람에게는 시장의 탓을 붙였고, 남은 사람에게는 우리의 설득이 통했다고 적었다.
심사 자리에서도 그 방을 본다.
어떤 대표는 고객을 말하면서 사람의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전환율, 잔존율, 객단가, 재구매율. 말은 맞고 자료도 정돈되어 있다.
그런데 고객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숫자 안에는 있지만, 이야기 안에는 없다.
3장이 마지막 끄덕임이 누구의 것인지를 물었다면, 4장은 그 결정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을 묻는다.
자기 이름으로 결정한 뒤에도 사람을 수단으로만 대할 수 있다.
질문이 하나 남는다.
사람을 얻는 기술과, 그 사람이 왜 남았는지를 남기는 일 가운데 지금 나는 어느 쪽에 서 있는가.
기술은 본래 차가운 말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어의 테크네 techne는 단순한 요령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제대로 만들어 내는 솜씨와 앎을 함께 가리켰다.
목수가 나무를 다루고, 의사가 몸을 돌보며, 연설가가 말을 구성하는 일에는 저마다의 기술이 있었다.
기술은 반복할 수 있게 만든다.
우연히 한 번 성공한 일을 다시 해낼 수 있게 하고, 감각으로만 알던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게 한다. 창업가에게 기술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좋은 뜻만으로 고객을 만날 수는 없다.
제품이 단단해도 설명하지 못하면 선택받기 어렵다. 상대의 필요를 읽지 못하면 제안은 자기 이야기로 끝난다. 기다려야 할 때를 모르고 밀어붙이면 신뢰가 닫힌다.
기술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러나 문을 여는 기술과, 문 안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같은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도 지식과 노력이 필요한 하나의 기술이라고 보았다. 사랑을 단지 강렬한 감정이나 좋은 상대를 만나는 문제로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사랑을 기술로 배운다는 말에는 두 방향이 있다.
한 방향의 기술은 상대를 더 잘 보기 위해 자신을 단련한다. 듣고, 기다리고, 이해하기 위해 능숙해진다.
다른 방향의 기술은 상대를 더 쉽게 움직이기 위해 자신을 단련한다. 욕망을 읽고, 반응을 계산하고, 선택을 유도하기 위해 능숙해진다.
겉으로는 비슷하다.
둘 다 상대를 관찰한다. 둘 다 말을 고른다. 둘 다 때를 기다린다.
차이는 얻은 뒤에 드러난다.
첫 번째 기술에는 사람이 남는다.
두 번째 기술에는 성과만 남는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나-너’와 ‘나-그것’이라는 두 방식으로 구분했다. ‘너’는 만나는 존재이고, ‘그것’은 관찰하고 이용하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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