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던 집
싯다르타는 사랑받는 아들이었다.
브라만의 집에서 경전을 외웠고, 제사를 도왔고, 마을의 어른들은 그의 이마를 보며 앞날을 점쳤다.
지혜가 있을 것이고, 제사를 이을 것이고, 아버지의 자리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라고. 그 예언은 축복이었다.
그런데 어떤 축복은 오래 품을수록 점점 사람을 무겁게 만든다.
찬사가 많을수록, 기대가 많을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나는 소리를 오히려 더 늦게 듣게 된다.
사랑받는 자리는 대개 밖에서 보면 따뜻하다. 하지만 그 따뜻함이 자기 체온과 꼭 맞아떨어질 때조차, 사람은 문득 숨이 가빠지는 순간을 맞는다.
너무 잘 맞아서, 오히려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삶.
헤세는 바로 그 이상한 숨 가쁨에서 싯다르타를 출발시킨다.
헤세는 그 집을 불행한 집으로 그리지 않는다. 학문은 깊었고, 아버지는 존경할 만했으며, 수행의 길도 이미 눈앞에 열려 있었다.
틀린 것이 없는 집, 작지 않은 집, 흠이 드러나지 않는 집. 떠날 이유가 없어 보이는 집.
그래서 떠남이 더 이상하다.
사람은 보통 상처 입었기 때문에 떠난다고 믿는다. 견딜 수 없어서 등을 돌리고, 부당함을 이기지 못해 문을 닫고 나온다고 믿는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떠남은 그 반대편에 있다.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미 충분해서. 흔들려서가 아니라, 너무 단단해서. 바깥에서 보기에는 이상적인 삶인데, 그 삶이 정작 자기 안에서는 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싯다르타는 경전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작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모든 옳음이 자기 삶으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감각이 밤마다 돌아온다. 아는 것과 산 것 사이의 간극.
데미안이 알을 깨라고 했다면, 이곳의 질문은 그다음이다.
깨고 난 뒤에도, 남의 경전을 외우며 살 것인가. 남이 정리해 놓은 문장을 자기 생의 결론처럼 품고, 끝내 한 번도 자기 말로 살아 보지 못한 채 지나갈 것인가.
그는 밤마다 이 질문을 견딘다. 질문이 해답보다 먼저 사람을 바꾸는 법이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싯다르타에게는 그 시간이 밤이었다.
말할 수는 없지만 사라지지도 않는 마름.
누군가는 그것을 야심이라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불효라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젊음의 오만이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헤세는 그것을 그렇게 이름 붙이지 않는다.
다만 어떤 삶은 바깥에서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안에서 보면 자기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조용하게 보여 줄 뿐이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길을 청한다.
아버지는 오래 침묵한다. 허락은 논리가 아니라, 아들이 이미 그 집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에 가깝다.
헤세가 이 장면을 길게 붙드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싯다르타는 밤새 서 있고, 아버지는 밤새 지켜본다. 누가 옳은지를 다투지 않는다.
이미 떠난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둘 다 동이 트기 전에 알아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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