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에게는 스몰 타운에 대한 로망이 있습니다. 메인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시청과 학교, 교회, 작은 상점과 식당이 모여 있고, 조금만 걸어 나가면 들판과 자연이 펼쳐지는 도시입니다.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 싱클레어 루이스의 『메인 스트리트』, 손턴 와일더의 『우리 읍내』처럼 미국 문학은 오래전부터 스몰 타운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물론 작은 도시의 폐쇄성과 답답함도 그렸습니다. 그럼에도 스몰 타운은 미국인에게 여전히 돌아가고 싶은 장소이자 실제로 여행하고 살아보고 싶은 삶의 공간입니다.
한국에도 비슷한 로망이 있을까요. 있다면 아마 고향 마을과 골목길에 대한 향수일 것입니다. 오래된 시장, 학교 앞 문방구, 골목길, 동네 가게와 이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미국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한국의 소도시 로망은 대체로 과거형입니다.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작은 도시는 떠나야 하는 곳이 되었고, 성공은 서울과 대도시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스몰 타운 로망이 ‘어디에서 살 것인가’라는 현재형의 질문이라면, 한국의 고향 로망은 오랫동안 ‘어디에서 살았는가’라는 과거형의 기억에 가까웠습니다.
『지역의 질서』를 쓰기 위해 전국의 중견도시를 다니면서 제 생각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동안 저는 동네를 좋아했고, 좋은 동네만 있다면 도시의 크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도 좋은 동네가 있고 부산에도, 작은 지방도시에도 좋은 동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월과 거창, 강진과 홍성 같은 도시를 걸으면서 도시의 크기 자체가 삶의 질과 장소의 경험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좋은 동네와 좋은 작은 도시는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컴팩트니스였습니다. 작은 도시에서는 군청이나 시청, 시장, 학교, 병원, 문화시설, 상점과 주거지가 비교적 가까운 범위 안에 모여 있습니다. 신도시가 없거나 있어도 원도심과 크게 떨어지지 않은 작은 택지지구인 경우가 많습니다. 중심부를 걷다 보면 도시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오고, 조금만 벗어나면 농촌과 산, 바다를 만납니다. 서울의 연희동이나 성수동은 좋은 동네지만 그곳을 벗어나도 거대한 서울이 계속됩니다. 반면 스몰 타운에서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동네처럼 느껴집니다.
한국에서 스몰 타운의 기준을 굳이 잡는다면 저는 인구 5만 명 안팎에서 출발하고 싶습니다. 정확한 행정적 기준이라기보다 현장에서 느끼는 도시 규모의 기준입니다. 특히 인구 5만 명 안팎의 군에서 군청 소재지 읍내를 걸어보면 스몰 타운 특유의 압축성을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역의 질서』에서 만난 영월, 거창, 강진이 대표적이고 남원에서도 서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습니다. 속초는 인구가 더 많지만 바다와 산 사이에 압축된 도시라는 점에서 스몰 타운의 성격이 강합니다. 연재 밖에서는 하동, 함양, 남해, 고창, 옥창이 떠오릅니다.
어쩌면 한국에는 스몰 타운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스몰 타운을 바라보는 언어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도시를 군청 소재지, 지방 소도시, 인구감소지역이라고 불러왔습니다. 쇠퇴와 소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지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골목길 자본론』을 쓰면서 골목길에서 좋은 동네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지역의 질서』를 쓰면서 저는 작은 도시 자체에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의 스몰 타운도 과거의 고향이 아니라, 여행하고 머물고 살아보고 싶은 현재의 장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영월, 거창, 강진, 남원 편 링크를 공유합니다. 올 가을 여행지로 추천합니다. 커버페이지 켄싱턴리조트에서 내려다본 남원 시대 전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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