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남원

지리산의 남원


남원을 전북의 지도에서 보면 전주의 남동쪽 끝에 자리한 작은 도시다. 그러나 지도를 조금 넓혀 지리산을 중심에 놓으면 남원의 위치가 달라진다. 지리산 북쪽에는 함양과 산청이 있고 남쪽에는 하동과 구례가 있다. 서쪽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도시는 남원이다. 전라선 KTX가 서고 고속도로가 교차하며 법원과 검찰, 병원과 시장 같은 도시 기능도 모여 있다.


남원의 미래를 전주와의 관계에서만 찾을 필요가 없는 이유다. 남원이 바라봐야 할 곳은 오히려 지리산이다. 지리산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전북과 전남, 경남에 걸쳐 있는 지리산권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본다면 남원은 이 생활권에 도시 서비스를 공급하는 중심도시가 될 조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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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의 중심이었던 남원

남원의 중심성은 오래됐다. 남원향토박물관은 아예 ‘남원! 전라도의 중심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이 역사를 설명한다. 통일신라 때 남원에는 전국 9주 5 소경 가운데 하나인 남원소경이 설치됐다. 지리산과 섬진강 서쪽의 정치·슬롯·문화·군사 거점으로 완산주와 무진주 사이를 연결하는 도시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중심성이 더욱 분명해졌다. 1413년 남원도호부가 설치돼 순창·용담·구례·임실·운봉·장수·무주·진안·곡성·광양 등 주변의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15세기 군사제도가 정비되면서 남원은 전라도 동남부를 관리하는 주요 군사 중심지가 됐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으로 남원부가 설치됐을 때에도 관할권은 오늘날의 전북 동남부를 훨씬 넘어섰다. 구례·곡성·순천·광양 등 지금의 전남 동부까지 남원과 하나의 행정권으로 묶였다. 오늘의 도 경계에서 보면 남원은 전북의 변방이지만 지리산과 섬진강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면 남원은 오랫동안 전라도의 주요 중심도시였다.


근대 이후에는 전라선 철도가 들어오고 사법·교육·의료·상업 기능이 집적되면서 중심성이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지금도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은 남원시 뿐 아니라 순창군과 장수군을 관할한다. 남원의 영향권이 현재의 시 경계에서 끝나지 않는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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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성이 약해진 도시

산업화 이후 남원의 위상은 약해졌다. 대규모 제조업이 들어오지 않았고 전주와 광주 같은 대도시의 영향력은 커졌다. 교통망의 발달은 남원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주민들이 더 큰 도시의 의료·교육·상업 서비스를 이용하기 쉽게 만들었다. 인구 감소까지 겹치면서 남원이 주변 지역에 제공하던 고차 도시 기능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서남대학교 폐교다. 2018년 서남대가 문을 닫으면서 남원은 대학을 잃었다. 대학은 학생 몇 천 명이 머무는 시설에 그치지 않는다. 청년과 교수, 연구자와 의료인이 모이고 소비와 문화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도시 앵커다. 특히 의과대학까지 있던 대학의 폐교는 남원의 교육과 의료 중심성에 큰 공백을 남겼다.


그래서 남원이 추진해 온 국립의학전문대학원 유치는 단순한 대학 유치 문제가 아니다. 교육과 의료라는 고차 도시 기능을 복원하는 문제다. 새로운 의학교육기관이 들어선다면 남원시만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순창·장수 등 전북 동남부와 더 넓은 지리산권에 교육·의료 서비스를 공급하는 거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도시 내부에서도 중심의 이동이 나타났다. 시청 주변에서 도통동으로 이어지는 지역에는 택지개발을 통해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됐고 용성로는 남원의 대표적인 상업가로로 성장했다.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한 것은 아니지만 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주거와 상업 기능이 원도심과 신시가지로 나뉘었다. 앞으로 새로운 교육·의료 앵커를 어디에 배치하고 기존 도심과 어떻게 연결할지도 남원의 중심성을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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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심으로 남은 원도심

남원의 중심성이 모두 약해진 것은 아니다. 원도심을 걸으면 오히려 이 정도 규모의 도시에서 보기 드문 문화적 밀도를 만난다. 광한루원을 중심으로 남원예촌과 전통시장, 오래된 골목과 예가람길이 이어진다. 춘향이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고전 서사가 있고 판소리와 국악의 전통도 남아 있다.


특이한 것은 원도심 바로 건너편에 대규모 문화관광 기능이 집적되어 있다는 점이다. 요천을 건너면 1984년 관광지로 지정된 남원관광지가 나온다. 춘향문화예술회관, 국립민속국악원, 춘향테마파크, 남원향토박물관 등의 시설이 모여 있고 대형 숙박시설인 켄싱턴리조트 지리산남원도 자리한다. 관광단지가 도시 외곽에 고립된 다른 도시와 달리 남원은 관광지와 원도심이 요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다.


따라서 광한루원–원도심–요천–남원관광지–함파우를 하나의 문화지구로 볼 필요가 있다. 관광지에서 숙박한 사람이 국악원과 박물관만 둘러보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광한루와 원도심으로 들어가 시장과 골목, 가게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문화시설을 연결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도심 문화지구를 만들 수 있다.


원도심 자체의 변화도 흥미롭다. 남원다움관은 남원의 근현대 사진과 문서, 시민들의 구술과 생활사를 기록한다. 새로운 슬로건에서 정체성을 찾기보다 주민들이 실제로 살아온 기록에서 ‘남원다움’을 찾는 접근이다. 고샘테마길 역시 오래된 우물과 주변 골목의 생활사를 장소 콘텐츠로 활용한다. 남원시는 행정안전부의 생활권 단위 로컬브랜딩 활성화 지원사업을 통해서도 원도심의 장소와 생활문화, 로컬 콘텐츠를 연결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2018년 예가람길을 방문했을 때 나는 카페와 음식점, 작은 가게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F&B 다음에는 예술가와 크리에이터, 스타트업이 모이는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광한루원–남원다움관–남원예촌–고샘테마길–예가람길을 걸으며 전통문화에서 근현대 생활사, 오늘의 골목문화까지 경험할 수 있다. 도시재생이 개별 건물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문화적 보행권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다음 질문이 남는다. 남원은 이 문화로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문화시설이 많은 것과 문화산업이 강한 것은 다르다. 판소리와 국악, 춘향과 옻칠·목공예가 오늘의 음악과 패션, 디자인, 식음료, 관광상품과 디지털 콘텐츠로 번역되어야 한다. 남원의 원도심이 문화 중심성을 유지하려면 문화유산을 소비하는 관광지를 넘어 새로운 브랜드와 기업을 생산하는 창조지구로 발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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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생활권

남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곳은 지리산 깊숙한 산내면이다. 도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찾는 귀농·귀촌인들이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그 과정에서 실상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과 생태,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농업과 교육, 생활협동조합, 환경, 문화와 적정기술 등 다양한 활동이 만들어졌다.


산내의 특징은 귀농인이 개별적으로 정착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주민들이 서로 관계를 만들고 가게와 공방, 교육공간과 공동체 조직을 만들었다. 작은 농촌마을에 도시 못지않은 다양성을 가진 시민슬롯 생태계가 형성됐다.


그 생태계에서 성장한 조직 가운데 하나가 슬롯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다. 산내에서 시작한 지리산이음은 활동 범위를 남원을 넘어 구례·산청·하동·함양으로 확장했다. 매년 열리는 지리산포럼에는 지리산권의 주민과 활동가들이 모인다. 행정이 생활권을 선언하기 전에 사람들이 먼저 지리산을 하나의 활동권과 관계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행정 차원의 협력도 오래됐다. 1998년 남원·장수·곡성·구례·산청·하동·함양 7개 시·군이 지리산권 자치단체장협의회를 만들었고 2008년에는 지리산권관광개발조합이 출범했다. 전북·전남·경남이라는 도 경계를 넘어 지리산을 하나의 권역으로 다루기 위한 지방자치단체 간 협력체다.


지리산권관광개발조합은 공동 관광상품과 관광아카데미, 농촌문화관광마을, 관광순환로, 지리산둘레길 관련 사업 등을 추진해 왔다. 중요한 것은 개별 사업보다 그 공간적 발상이다. 행정구역은 세 개 도로 나뉘어 있지만 지리산을 둘러싼 지역은 자연과 관광, 문화와 주민 활동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에는 그래서 두 개의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위에서는 지리산권관광개발조합이라는 행정 네트워크가 움직이고 아래에서는 산내와 지리산이음이라는 민간 네트워크가 움직인다. 지리산 생활권은 새로 발명해야 할 공간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어떻게 도시 시스템으로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다.


지리산의 남원이 되려면

이 맥락에서 지리산 산악철도 논의를 볼 필요가 있다. 남원시는 2013년부터 이른바 지리산 산악철도 사업을 추진해 왔다. 이후 지리산 친환경 전기열차, 공식 시범사업에서는 산악용 친환경 운송시스템이라는 명칭도 사용됐지만 여기서는 산악철도라고 부르기로 한다. 육모정에서 고기삼거리와 고기댐을 거쳐 정령치로 이어지는 약 13㎞ 노선이 기본 구상이며, 2022년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의 시범사업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고기삼거리 일대 약 1㎞의 시범노선 건설이 추진됐다.


하지만 사업은 환경 문제와 충돌했다. 전북환경운동연합과 지리산산악열차반대남원대바카라위원회 등은 산악철도가 국립공원 개발을 확대하고 야생동물 서식지와 생태계 연결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반대해 왔다. 2025년 2월 전북지방환경청도 1㎞ 시범사업의 소규모 환경영향평가에 대해 재검토 의견을 냈다. 보호지역과 인접한 개발로 인한 자연환경 훼손과 생태계 단절, 법정보호종 서식환경에 미칠 영향 등이 문제가 됐다. 따라서 산악철도가 예정대로 건설된다고 전제해 남원의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산악철도 논의가 던진 질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원과 지리산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산악철도든 전기버스든 다른 친환경 교통수단이든 목표는 더 많은 관광객을 정령치 가까이 올려 보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남원을 지리산권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만드는 교통체계가 되어야 한다.


남원역에 도착한 사람이 원도심으로 들어와 광한루와 골목을 걷고, 요천을 건너 남원관광지의 국악원과 박물관을 경험한 뒤 육모정과 산내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남원역–원도심–남원관광지–육모정–산내–지리산을 하나의 축으로 만드는 것이다. 산악철도를 추진한다면 이 전체 네트워크 안에서 역할을 설정해야 하고, 추진하지 못한다면 다른 대중교통수단으로 같은 연결을 만들어야 한다.


더 큰 차원에서는 지리산권관광개발조합의 협력도 관광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구례와 함양, 산청과 하동, 장수와 곡성이 가진 자원을 하나로 합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 지역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의료와 교육, 교통과 상업처럼 모든 지역에 같은 수준으로 공급하기 어려운 고차 기능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지역생활권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남원의 역할이 보인다. 남원은 지리산권에서 KTX와 사법·의료·상업·문화 기능을 함께 갖춘 도시다. 원도심에는 전통적인 도시 기능과 문화자산이 축적돼 있고 산내에는 새로운 주민과 시민슬롯 네트워크가 있다. 그 바깥에는 7개 시·군의 행정협력체가 존재한다. 남원은 이 세 층위를 연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역할도 아니다. 남원향토박물관이 ‘남원! 전라도의 중심이 되다’라고 표현하듯 남원은 한때 오늘의 도 경계를 넘어 넓은 지역에 중심 기능을 제공했던 도시다. 통일신라의 남원소경에서 조선의 남원도호부와 근대의 남원부에 이르기까지 남원의 영향권은 지리산과 섬진강 주변으로 펼쳐져 있었다.


남원이 해야 할 일은 그 옛 관할권을 되찾는 것이 아니다. 21세기의 방식으로 중심성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대학과 의료 기능을 복원하고 원도심을 문화생산의 거점으로 만들며, 철도와 대중교통을 통해 산내와 지리산권을 연결해야 한다. 주변 지역을 지배하는 중심이 아니라 주변 지역이 필요로 하는 도시 기능을 제공하는 중심이다.


남원의 경쟁 상대는 전주가 아니다. 남원의 배후지도 남원시 경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늘의 행정지도에서 남원은 전북의 끝에 있지만 지리산을 중심에 놓은 지도에서는 남원이 중심에 가까워진다. 지리산이 남원의 변두리가 아니라 배후지가 되는 순간, 남원은 다시 중심도시가 된다. 지리산의 남원이 된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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