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이 큰 사랑일 수 있다.
어웨이크 플로우 5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불편함'이라는 키워드에 천착한다. 애초에 나는 무엇을 불편하게 여기는가? 귀찮은 것과 멍청한 것. 내가 물리적, 심리적 불편을 감수해야하는 모든 행위다. 어렸을 땐 전화가 너무 불편해서 엄마가 배달음식을 대신 시켜주었다. 동생에게 공부하는 법을 알려주다가 못쫓아오길래 머리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조별 과제를 맡으면 그냥 혼자 다했다. 굳이 다른 사람에 대한 기대도 없고 귀찮았다. 난 세상 만사가 귀찮다. 너무 귀찮은 게 많은 나머지 귀찮은 걸 다 없애버리는 걸 삶의 방향으로 설정했다.
귀찮은 일을 아주 간소화해버리거나 자동화하거나 아무튼 안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세탁소를 오가기 귀찮아서 세탁서비스를 구독한다. 살림 역시 너무 귀찮아서 남편에게 모두 위임한다. 발로 뛰는 것보다는 문서를 쓰는 게 좋아서 그런 온라인 게임에서 일한다. 머리를 굴려서 기획을 짜고 외주를 맡긴다. 엄마나 아빠에게 살가운 말을 건내는 것보다는 용돈으로 해결하는 게 편하다. 상사랑 대화하는 것도 귀찮아서 최대한 다 정리해서 결정 받아버린다. 일상에서 최대 목표는 아무것도 안하기. 극한의 효율성을 위해 부유하는 정신과 굳어버린 몸이 남았다. 누군가의 희생이나 누군가에게 위임한 것들로 이뤄진 일상과.
일상의 행위에 우열이 있다는 관념이 있다. 설거지, 별로, 독서, 좋은 것. 빨래, 귀찮아, 청소, 귀찮아, 글쓰기, 훌륭하지. 매사에 이걸 내가 꼭 해야해? 라는 판단이 들어간다. 부유하는 정신은 빨리 판단하고 빨리 관둔다. 정신으로 할 수 없는 설거지, 빨래, 청소는 제끼자.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쓰자. 도자기나 만들자.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 근데 그 삶에 가까워질 수록 뭔가 비어있다.
몸은 편안할지 몰라도 그 것이 내 정신의 평안함에 기여하는가? 고고한 것들로 삶을 채우는 것은 불편함을 없애려는 노력과 똑같다. 끝이 없다. 나의 고고함으로만 채우기에 삶은 너무나 넓으며, 불편함을 쫓아다니며 없애기엔 너무 광활하다.
어려움을 없애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방식은 익숙하다. 집을 떠나 살기 위해 공부했고, 가족의 영향을 최대한 덜 받기 위해 경제적으로 물리적으로 독립했다. 경제적 불안정이 나를 몹시 흔들리게 한다는 것을 알아서 안정적인 온라인 게임에서 버티고 재테크를 했다. 원하는 삶의 모습을 위해 원하는 집을 샀다.
극복해야할 삶의 모습이 없어지고 나니까 이 방식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여전히 우리가족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이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리지 않는다. 회사는 여전히 열받는 부분도 많지만 내 삶을 유지하고 기능하게 하는 소중한 부분이다. 승진을 내려놓고 조금 한직으로 옮기면서 어느 정도 업무의 부담도 덜어냈다. 떠돌던 삶에서 아름다운 산이 보이는 내 집을 사서 정착했다. 마음껏 바카라을 읽고 멍때리고 도자기를 빚는, 장애요인이 없는 삶에 가까워졌는데.
귀찮은 일이 없어졌는데 다 귀찮다. 이 귀찮다는 마음은 내가 수행해야 하는 과업들이 무가치하다는 느낌과 연결된다. 굳이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눠야할까, 굳이 땀흘리며 밖에서 산바카라해야할까. 그런 게 가치가 있나. 현실에 닿지 않는 내 정신은 부유한다.
이 편리한 삶이 안정감이 없다. 평안하지 않다. 불편하고 귀찮은 걸 다 없앴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그걸 없애기 위해 내 정신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면, 그 다음에는 그걸 유지하고 가꾸는 일은 해본 적이 없다. 유지하고 싶은 삶이 없었으니까. 계속 퀘스트를 깨고 레벨을 높이기만 하다가, 이 삶을 가꾸는 일은 당혹스럽다. 그 모든 싸움 끝에 얻은 생활이 대단히 소중하다는 느낌보다는 홀로그램처럼 느껴진다. 죽을 듯한 고통이나 분노가 없는 삶은 어디서 기쁨이나 성취를 느껴야할지 길을 잃는다.
귀찮다는 감정과 실재하는 귀찮음은 얼마나 닿아있을까? 어제 하선님이 요가를 가기 싫은데, 그냥 가봤더니 요가를 다녀와도 가기 싫은 마음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발표가 기억에 남는다. 하기 싫고 귀찮고 불편한 마음은 실제 현상보다, 그냥 그 마음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 생명력으로 삶을 꾸려왔다. 나를 이끌 다른 에너지를 아직 찾지 못했다. 귀찮다는 마음이 다 퉁쳐버려서 별로 큰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매일 감탄하는 이 산 속의 풍경에 귀찮아서 뛰어들지 않는 것처럼.
그런데 도자기를 할 때는 굳이 귀찮고 불편한 일의 연속이다. 다이소가면 천원, 이천원이면 살 수 있는 그릇을 만들겠다고 10키로짜리 흙을 사다나른다. 그 흙을 진공으로 만들기 위해 토련한다. 물레에 올려서 흙과 씨름하며 중심을 잡고 기물을 만든다. 바닥이 넓고 두께가 얇은 기물을 만들기 위해 수십번 잘라보며 연습한다. 손끝의 힘으로 흙의 두께를 조절하며 끌어올리기 위해 내 몸이 도구가 된다. 그렇게 만든 기물을 그늘진 곳에서 가죽같이 꾸덕하게 천천히 말린다. 다시 물레에 앉아 중심을 맞추고 굽을 깎는다. 그러다가 날아가서 찌그러지거나 바닥에 구멍을 뚫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런 기물은 망치로 쪼개서 다시 흙으로 돌려보낸다. 두께를 가늠하기 위해 칼로 통통 두드리며 소리를 들어본다. 한번 깎고 한 번 통통, 한번 깎고 한 번 통통. 800도 가마에 초벌한다. 초벌된 기물을 물 묻힌 스펀지로 싹싹 닦는다. 유약을 잘 섞어서 칠한다. 바닥이 가마에 눌러붙지 않도록 바닥을 잘 닦아준다. 그리고 1,300도 가마에 재벌한다. 유리성분으로 된 유약이 고루 기물에 칠해져 반짝이고 단단해진다. 그 과정에서 깨지거나 바닥에 눌러붙어 못쓰게 되는 기물도 많다. 마지막으로 기물의 전이나 바닥을 사포질로 닦아주면 끝.
도자기는 굳이 해야될 일의 연속이다. 하나도 생략할 수 없고 대단히 편리한 길도 없다. 순수한 시간과 집중, 고통을 요구한다. 그런데 밥도 먹지 않고 다섯시간, 여섯시간 씩 물레를 돌려도 기쁘다. 그 어떤 가치 판단도 없이. 귀찮지 않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기껍고 숭고하고, 때론 감사하게 느껴진다. 자꾸 순응하게 된다. 흙의 질기, 물레의 속도, 가마의 온도 같은 것에 겸허하게 납작 엎드린다. 그 과정에서 어떤 불편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완성도를 높여서 더 이 과정에 충실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 잘하고 싶은 이유가 이 모든 단계를 충실하게, 어떤 의미하게는 신성하게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다. 기물이 쓰이는 모습을 보앗을 때, 이 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단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깨끗함을 느끼고 싶다.
어제 선생님 댁에서 내 기물이 찻사발로 쓰이는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기물에 서서히 찻물이 들어가는 모습, 알맞은 곳에 내가 빚은 것이 놓인 기분이... 그런 기분은 처음 느껴봐서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다.
꽃봉오리처럼 굽이 좁으면서 선이 풍성해지는 기물을 만들고 싶었다. 찻사발을 만들던 겨울의 마음이 기억난다. 막상 완성되어 쓰이는 모습을 보니 전 부분을 좀 더 부드럽게 만들 껄, 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아직 전잡이를 사용해 전을 다듬든 법을 배우기 전에 만든 기물이다.
굳이 굳이 구태여 불편하게 기물을 빚으면서 나는 왜 습도 60%, 온도 24도의 방에 누워있는 일보다 더 충만함을 느끼는가? 분명 도자기를 빚는 과정은 엄청나게 불편하다. 흙범벅이 되고 먼지를 뒤집어 쓰며 목과 허리가 아프다. 게다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효율화 자동화를 할 구석도 없다. 그럼에도 불편함, 귀찮음 같은 것들을 압도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 기꺼이 이 모든 불편함을 충만하게 느끼게 하는 어떤 마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과정을 통해 빚고 싶은 마음. 그 아름다운 과정에는 흙투성이, 땀범벅, 근육통과 파스냄새를 수반하는 불편함이 포함된다. 귀찮은 게 아름다울 수 있다. 편리한게 아름다운 게 아닐 수 있다. 나는 이 불편속에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느낀다.
오늘 저녁은 뒷산 산바카라가기.
불편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꺼이, 충분히 불편하자. 영원한 것은 없다. 불편함이 큰 사랑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