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인 보존과 동적인 낡음의 조화
배터리를 연명하기 위해 배터리 충전이 되는 카페가 절실했다. 배터리가 나가기 전에 어디든 들어가서 배터리를 충전해야 했다. 우리는 들어가기 전에 핸드폰 충전이 되는 지 물어보는 진상 고객이 되어 있었다. 내가 정작 그런 여행객이 되다니. 우리는 돈까스 맛집과 미슐랭에 선정된 우동집을 한참 지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져 나갔다. 그곳에는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의 버스가 주차된 곳으로 메인 스트릿에 비해 좋게 표현하면 한산하고 나쁘게 말하면 소외된 곳이었다. 충전만 되면 어떤 곳이든 상관이 없었기에 다급하게 들어갔다.
“배터리 다이죠부 데스까?”
“오케오케~”
친절한 아주머니는 주문을 받고 우리들의 핸드폰을 충전해 주셨다. 얼마 충전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급한 불은 껐다는 생각이 드니 가게의 전경도 보이고, 수학여행 온 중학생 아이들의 표정도 눈에 들어왔다. 학교 앞 편의점에서 간단히 한 끼 때우는 것과 별 다를 거 없어 보이는 심드렁하고 따분해 보인다. 그래도 간혹 우동을 먹으며 무엇이 재미있는지 친구들과 히히덕거리는 걸 보면 영략 없는 아이들이다.
나도 저만한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친구들과 하이테크에서 새로 나온 벚꽃 컬러나 일반 지우개보다 훨씬 잘 지워지던 일본산 지우개, 젤리샤프에 대해 이야기했었지. 그때는 정말 비쌌던 탓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나는 그 펜이 탐이 났지만, 훔쳐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런 절도 사건이 일어나면 반은 조금 흉흉해지고, 누가 가져간 것 같다느니, 누가 봤다느니 소문이 돌았다. 잃어버린 친구는 결국 펜을 새로 샀고, 그 소식을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공표했는데 훔치진 못하겠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이테크는 그 당시 극강의 롤링감과 필기감으로 많은 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펜은 한 개의 2,000원~3,000원. 샤프는 5,000원~7,000원. 중학생 시절인 2006년 당시 필기구 평균 가격이 1,000원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적게는 2배, 많게는 7배의 가격이었다. 펜촉은 얼마나 가느다란지 교실 바닥에 한번 떨어뜨리면 복구 불능으로 무조건 새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비싸고 관리가 까다로운 조건에도 그 펜을 써 본 학생들은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당시 학생들의 필통 속 절대적 우위를 점한 하이테크를 원하는 학생들은 많았으나 비싼 가격 탓에 그걸 가질 수 있는 학생은 소수였다. 그 욕구를 어쩌지 못하는 학생들은 팬시점에서 훔치기도 했다. 절도를 하다 걸린 학생들은 팬시점 앞에서 주인에게 적발되어 혼나는 진풍경이 펼쳐졌고, 적발된 학생들은 팬시점 정바카라에 따른 처분을 받았다. 그건 바로 팬시점에서 도난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절도를 하다 걸린 학생들은 펜 진열장 맡에 우뚝 서서 손님들이 펜을 훔치진 않는지 감시를 했다. 손님들은 ‘저 학생도 절도를 하다 걸려서 배상금 대신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걸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고, 반면교사처럼 저렇게 일하지 않으려면 훔치면 안 된다고 경각심을 가지는 계기도 되었다.
처음엔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절도범으로 낙인을 찍는 가혹하지 않나 했으나, 15년이 흐르고 생각하니 그 팬시점 사장님도 나름의 고육지바카라이었겠구나 싶다. 절도로 걸린 학생을 부모님에게 보내봤자, 궁극적인 해결로 도달하기 힘든 환경이 높고, 경찰을 부르기에는 아이들에게 과한 처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일을 묵인할 수 없고 절도를 박멸할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장은 고민 끝에 펜을 훔친 아이들에게 훔친 물건의 가격만큼 팬시점에서 일을 하게 하는 처분을 만들었다. 절도를 하다 걸린 아이들은 자신처럼 절도를 하는 아이들의 눈빛이나 행색만 보아도 색출해 낼 만큼 유능했다(?). 그 일이 얼마나 부족한 일이었는지 스스로 깨닫는 기회를 제공해 거울 치료도 기대할 수 있었다. 절도도 줄고, 아이들도 치료가 되니 학생에게도 팬시점 사장에게도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격이다.
아이들도 절도가 잘못됐다는 걸 알지만, 그 욕구를 조절하고, 해소하는 요령을 배우지 못한 탓이 컸겠지. 무섭게 매를 들어서 혼을 내는 것도 훈육이 아니라 할 수 없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스스로 깨우치고 교정할 수 있는 시간의 길을 터줄 필요성에 내 의견을 더하고 싶다. 그 길을 걸으며 어른이 되면 저절로 나아지는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
마침 아주머니가 주문한 우동을 내어주셨다. 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우동이었지만 아침부터 커피 말곤 제대로 먹은 게 없이 돌아다닌 탓에 어느 때보다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배터리를 더 충전하고 싶었지만 더 늦어지면 다음 목적지가 입장 마감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쉽지만 충전이 되지 않은 핸드폰을 들고 모험을 떠난다.
차차 어른이 되면 나아진다는 말은 정말이다. 고백하건대 나도 그 팬시점에서 물건을 훔친 적이 있다. 펜을 훔치는 건 간이 콩알만 한 나에게는 담력이 필요했던 지라, 아주 얇고 티 안 나는 스티커를 바카라 사이에 껴서 나왔다. 운좋게 걸리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절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횡재를 했다기엔 그 스티커는 너무나 값어치가 적었고, 조마조마했던 것에 비하면 스티커는 너무 보잘 것 없었다. 그럴 바에는 그냥 훔치지 않는 게 이득이겠다는 합리적인 판단이 섰고, 성인이 될 때까지 그 판단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모두 선량하고 모범적으로 살면 좋겠지만, 세상이 그런가. 너무나 달콤하고 잠에 못 들 정도로 설레게 만드는 것이 많다는 건 기쁜 일이나, 그것을 가질 수 없는 속상함. 그 세속적인 것에 몸부림 쳐보고, 감정을 스스로 수그러뜨리는 법도 배우는 시기가 청소년 시절일 테니까. 그 불안을 충분히 이해하고, 단단히 잡아 줄 어른이 필요한 게 아닐까. 팬시점의 단호한 정바카라을 시행했던 사장님처럼.
조금 충전됐지만 아직은 방심하기 이른 핸드폰을 가지고 히가시야마 전통 목조 주택과 상점이 모여 있는 조용한 거리를 가을 바람을 맞으며 산뜻하게 30분 정도 걸어서 블루보틀 난젠지점에 도착했다.
블루보틀 교토 난젠지점은 서양 문화와 예스러운 분위기가 뒤섞인 100년 된 일본 찻집을 개조한 곳으로 다른 도쿄 매장들(나카메구로, 산겐자야, 간다)이 옛 건물의 기능만 바꿔 쓴 것과 달리, 난젠지점은 개조 전 옛 건물이 지녔던 미감을 고스란히 유지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붕 구조와 점토 벽을 그대로 노출시켜 공간의 질감을 그대로 느끼게 했고, 100년 넘은 건물 벽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지붕 구조와 흙벽 등 고택 본연의 매력을 유지하면서도, 카운터와 손님 공간이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도록 자갈 바닥을 깔아 재구성한 것도 눈에 띈다. 단조롭고 아무런 기교가 들어가지 않은 의자와 벤치 같은 모던하고 미니멀한 요소가 100년 역사의 고풍스러운 건물 분위기와 하나로 묶인다.
입구에 들어갈 때 높은 벽을 지나면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이제 어떤 공간이 펼쳐질까’하는 소개팅에서 첫만남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대감에 부풀었다. 길지 않은 그 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걸으니 어느새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나쓰메 소세키가 나올 것 같은 전통적인 목조 주택과 나만 존재하는 듯한 빠져든다.
일본의 블루보틀 전 지점 설계를 맡은 스키마 건축사무소는 상점과 주택이 공존하는 마치야(町家)의 독특한 구조를 반영해 건물을 카페동과 MD동(원두·굿즈 판매)으로 나누었다. 또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목조 건물 사이에 일본식 작은 정원 형태 ‘쓰보니와(坪庭)'를 두어 보이드한 부분을 마련했다. 쓰보니와 한켠 구석에 낮은 테이블이 있다. 이 공간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은 어떤 테이블도 없다. 상업 공간에서 매출을 이끌어내건만, 그 공간을 과감히 비워두는 호방한 디자인에 반해버린다.
뻥 뚫린 파란 하늘은 끊임없이 생각을 증식하는 현대인의 뇌를 쉬게 해준다. 내 몸은 자연이 만든 여백의 공간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스스로 이완된 상태로 만들어준다. 그 이완은 바닥이 자갈이어도 그렇게 위험하지 않구나, 비싼 쇼파나 의자가 없어도 사치스러운 곳이 될 수 있구나, 핸드폰으론 느낄 수 없는 자연이 주는 여유로움이란 이런 거구나. 아무리 좋은 조명도 따라갈 수 없구나와 같은 자족감과 평온함을 선사한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내부와 외부를 최대한 연결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공간 사이에는 기둥만 있을 뿐, 통유리와 낮은 문턱 덕분에 각가의 공간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런 마치야 구조를 통해 두 공간이 평등한 관계가 된다. 공간이 평등할 수 있는가. 공간이 쌍둥이처럼 꼭 같은 형태나 형식을 가져야만 평등하다고 할 순 없다. 쌍둥이들도 저마다 극명하게 다른 부분이 있는 것처럼 어느 한 곳만 가중시키지 않는다. 각자의 역할을 합리적으로 나누며 공존함으로써 평등한 관계를 갖는다.
일본의 유명 관광지가 된 이 카페는 웬만한 사찰보다 인기가 많을 정도로 일본식 전통 건축을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서양 문화가 적절히 섞인 개조로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 전통가옥의 환기창도 그대로 남기고, 좁은 통로와 쓰보니와로 나뉜 자리들은 일본 다실 같은 느낌을 주며 목조건물 형태를 유지하는 '옛 가치'와 그에 기반한 현대적 해석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블루보틀 교토는 단순히 힙하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은 카페를 넘어, 어떻게 하면 브랜드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100년 된 마치야의 결을 보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건축적 답을 내놓은 공간이다.
한편으로는 빠르게 성장하고,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이 그렇게 덧없을 수 없이 느껴졌다. 자비로운 햇살과 내 눈높이에 맞는 크기의 나무, 아직 덜 익은 단풍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평화롭건만, 나는 무엇으로 덧칠하고, 채우려 안간힘을 썼을까. 이 헛헛함은 반드시 나 혼자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재건축’ , ‘재개발’ ‘사업승인’’ ‘조합설립’ 등의 현수막. 우리에게 멋진 집이라고 하면 고작(?) 효율을 자랑하는 고층 아파트가 전부다. 아파트는 최대한의 많은 사람을 최대한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형태지만, 지금의 아파트는 최소한의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형태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기후, 경제, 슬롯적으로 다양한 형식의 주택을 지을 수 있는 한계가 낮았다면 각 도시의 가치관이 지금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우리는 공간을 통해 얻고 싶은 게 무엇일까. 치밀한 계획과 준비만 된다면 모두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은 정말 인간 본연의 혼란과 불안을 사라지게 할까. 그렇게 의문할 뿐이다. 그러면 박노해 시인의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라는 시가 떠오르고 만다.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나온 것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낡아짐을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시인 박노해
블루보틀 교토점에 있으면 사람이 정말 편안할 수 있는 공간은 최고급 자재라거나 최첨단 기술에서 탄생되기보다, 자연의 켜에서 허무할 정도로 낡고 오래된 것이 모여 어우러지려는 노력에서 발아된다는 진리를 여지없이 되새기게 된다.
블루보틀 난젠지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에이칸도 젠린지를 가려 했는데, 이미 문을 닫았다. 불의에 배터리 방전 사고로 어쩔 수 없었던 걸 알지만, 가을에만 볼 수 있는 에이칸도의 단풍 풍경을 볼 수 없다는 것과 배터리가 없어서 마음을 졸였던 악재가 겹쳐 기분 부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다.
이렇게 아쉬울 줄 알았으면 체계적으로 짤 걸 그랬다, 정도로 끝내면 좋으련만. 남들은 야무지게 다 보고 오는 걸 나는 이렇게도 비효율적이고 낭비가 심한가. 이렇게 짜려고 해도 아마 다른 사람들은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배는 고픈지 난젠지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가 저녁 때가 된 것 같아 식당을 찾기로 했다.
“일본 가정식 레스토랑이 있나봐.”
“오 좋다!”
“거기로 가자!”
그때도 우리 두 사람의 휴대폰 배터리가 30~40%였기 때문에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불안이 덮쳤다. 둘이 합치면 80%라며 황당한 정신 승리와 함께 배터리 절약을 위해 도착 전까지 풍경 사진은 절대로 찍지 말고 지도에만 배터리를 활용하기로 다짐하고 걸어갔다.
그때 마침 그 근처에 있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하교하고 있었다. 일본 학생들을 이렇게 가까이서 볼 줄이야. 관광지가 거의 학교 근처에 있지 않으니 생소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일본어지만 축구공을 이리저리 차며 낄낄대는 모습과 자전거를 타고 저 멀리 사라진다. 자전거, 오후, 고등학교, 친구. 이 장면은 너무 뻔한 클리셰같기도 하다. 그게 얼마나 무서운 지, 평양냉면처럼 아주 슴슴하고, 먹을 때마다 매번 깊은 맛이 달라서 자꾸 떙기는 것처럼. 내 몸에 무해하고, 청량함과 순수함을 부여해 주는 이 환상, 클리셰가 오히려 고맙다.
평범한 아이들 뒤에는 느긋한 노을이 따사롭게 비추고 있는 일상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면 여행을 온 게 아니라,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컷!’ 소리나 카메라나 그런 것 없이, 정말 그 영화 속 인물이 된 것처럼 아이들에게 각각의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저 아이는 소설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와타나베처럼 좋아하는 여자아이 때문에 심오한 것 같고,
저 아이는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 속 들처럼 집에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소녀들은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에 나오는 단짝 친구들처럼 시간여행자를 만나러 가는 것 같네.
우리 인생에 영화 같은 순간이 있다는 말을 믿고 기다린 적이 있다. 그동안 나는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해석한 게 아니었을까. 굳이 내가 주인공이 되지 않고, 그 영화 속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수 있다. 계속해서 주인공이 되고, 나를 찍는 카메라를 의식하고, 나를 표현하지 않아도 나는 그 장면을 온전히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영화 같은 순간이 펼쳐질 수 있다.
이렇게 예술은 우리의 척박한 영혼에 윤기를 더해준다. 종교가 없어 십일조나 헌금도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이런 나에게도 은혜를 베풀어준다니. 내게 예술은 가성비 좋은 종교다.
생각해보면, 정말 계획을 잘 짜는 사람들을 보면 내 기준에선 120%를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80%밖에 못했다며 실망하는 모습도 자주 본다. 저렇게 대단한데도 왜 스스로에게 박하게 점수를 줄까 안타까워했던 나도 계획대로 가지 못해 아쉬워하자 그들과 똑같이 스스로에게 박하게 점수를 주고 있다.
여행은 정확하게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아니다. 어떠한 기준도, 심사도 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용권을 끊은 셈이다. 그 순간마저 점수와 기준으로 빨갛게 점수를 매긴다면 내 인생은 선별의 대상이 되도록 주도권을 넘겨주는 게 아닐까. 그것도 정확히 누구인지도 모를 정체 불명의 존재에게. 그 존재는 내가 만들어낸 실체가 없는 존재다. 이제는 그 존재에서 해방되어 문제를 풀러 온 게 아니라, 종이에 나만의 시간을 써야 한다.
이제야 아쉬운 마음을 달랠 문장이 완성됐다.
'이번에 못 본 거 때문이라도 다음에 또 와야겠다.'
안녕하세요. 푸름입니다.
제가 금요일마다 글을 연재중인데, 하루 늦게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신 기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제가 무림페이퍼의 후원을 받아 바카라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9월 말이나 10월 초로 예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 덕분에 이런 귀한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해고되고 취업도 힘든 이 시점에 저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긴 거라 생각하며
절박한 마음과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열심히 바카라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많은 응원 부탁드리며
저도 여러분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