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휴직기간을 보낼 장소로 직항도 없는 뉴질랜드 남섬으로 오게 된 것은 삼촌이 계시다는 이유가 컸다. 나와 딸만 보내려니 불안했던 남편도 덕분에 설득할 수 있었다. 마침 집을 구하던 시기에 삼촌댁 바로 건너편 집이 나와서 보지도 않고 계약부터 했다. 은퇴 후 숙모님과 조용한 노년을 보내고 계신 삼촌은 아침마다 우리 집 커튼이 올라갔는지를 살피셨고, 딸아이는 삼촌댁 차가 주차돼 있는지를 수시로 염탐했다. 그렇게 우리는 1년짜리 이웃이 됐다.
삼촌은 아버지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외모와 성격마저 쌍둥이처럼 비슷한 두 분은 이역만리 떨어져 있어도 매일 통화를 하던 사이다. 젊은 시절엔 명절마다 두 분이 진지하게 씨름 대결을 펼쳐 가족들에게 큰 웃음을 주시곤 했다. 지난해 봄, 아버지가 온라인 게임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을 때 그 먼 길을 날아와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아이처럼 울면서 장례식장에 내리시던 삼촌 모습이 선하다. 뉴질랜드행을 계획만 하던 몇 년 전, 아버지는 동생과 가까이 살며 마지막 추억을 쌓으리라고 기대를 하셨다.
아버지의 부재로 큰 상실감을 느끼는 또 다른 사람은 딸아이다. 워킹맘인 나를 대신해 아버지는 황혼육아를 담당하셨다. 자녀들에게는 툭하면 화를 내시던 무서운 아버지가 손녀딸에겐 그저 웃고만 계셔서 가족들은 “할아버지 하려고 태어나셨나 보다”라며 신기해했다. 할아버지를 대동해 어디든 위풍당당 누비는 꼬마 아가씨는 서울 아파트촌 한복판에서도 ‘공주님과 호위무사’로 유명했다. 10년 인생의 첫 친구이자 베스트프렌드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래서 모두들 아이부터 살폈다.
의외로 딸아이는 눈물도 많이 흘리지 않고 의연했다. 그러다 뉴질랜드에 와서 그 할아버지를 똑 닮은 ‘뉴질랜드 할아버지’를 만나고 너무나 좋아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즈음 어느 날, 잠자리에서 아이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뉴질랜드 할아버지도 사실 날이 얼마 안 남으신 거지?” 그러더니 서럽게 울기 시작한다. 당황스러웠다. 그 다음날 밤엔 뉴질랜드 할아버지에서 시작해 ‘아빠와 엄마도 나이가 너무 많다’며 자긴 혼자 남게 될 거라고 대성통곡을 했다.
울다 지쳐 잠든 아이를 이해해 보려고 한참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이별을 통해 죽음과 상실을 깊이 느끼고 있을 아이. 어쩌면 입 밖으로 내기에는 너무 큰 슬픔이라 표현을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할아버지와 꼭 닮은 뉴질랜드 할아버지를 보면서 비로소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며칠 후, 엄마와 입씨름을 하고 자리에 누운 아이가 울먹인다. “하나님, 이 아줌마가 저 좀 사랑하게 해주세요. 저에게는 이제 이 아줌마밖에 없다고요.” 이쯤 되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