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시노 게이고를 추모하며
- 소년이 읽던 밤의 목록
- 트릭 너머의 인간론
- 위계 없는 문학을 향해
- 공장에서 태어난 이야기
부고는 짧았다. 2026년 7월, 히가시노 게이고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 문장은 한 줄이었으나, 그 한 줄이 열어젖힌 것은 소년의 밤 전체였다.
이불 속은 좁았고 방 안은 캄캄했다. 손전등의 붉은 불빛이 종이 위에 착지하면, 소년은 그 좁은 빛의 반경 안에서 하나의 세계를 조립했다. 계몽사와 동서문화사의 문고판이 낡은 톱니바퀴처럼 바카라장에 꽂혀 있었다. 싼 종이에 인쇄된 낯선 서양 이름들이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셜록 홈즈의 안개 낀 베이커 스트리트, 아르센 뤼팽의 실크햇, 에르퀼 포아로의 회색 뇌세포와 제인 마플의 예리한 직관. 에드거 앨런 포가 세워둔 오귀스트 뒤팽의 아득한 원형, 프랭크와 조 하디 형제가 내달리던 미국의 거리도 그 밤들을 채웠다. 그리고 이 땅의 흙먼지 속에서 걸어 나온 이름들이 있었다. 김성종의 오병호 형사, 이상우의 추병태 경감, 노원의 백동호. 남도의 산자락과 겨울 포구의 바람 속에서 형사는 고독하게 비틀거렸다. 전쟁과 가난의 상처가 맺힌 그 현장은 홈즈의 런던보다 훨씬 절박하고 눅눅했다.
소년은 그 밤들을 지나며 한 가지를 배웠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사물의 이면에는 말해지지 않은 비극과, 정교하게 조립된 거짓이 있다는 것.
청년이 되어 만난 이름은 히가시노 게이고였다. 공학적으로 조립된 그의 문장은 감상에 젖지 않았다. 『방과후』의 서늘한 교실을 지나 『비밀』의 잔인한 슬픔을 읽었고, 마침내 『용의자 X의 헌신』에 이르렀다. 그 밤, 청년은 다시 잠들지 못했다. 트릭은 차가웠고, 그 밑을 흐르는 연민은 뜨거웠다. 『백야행』의 어둠 속을 걷는 두 남녀와, 『공허한 십자가』가 던진 사형제도의 질문은 묵직한 응어리로 남았다.
작가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조립해둔 백 편 넘는 서사의 기계들은 지금도 식지 않은 채 웅웅거리며 가동 중이다.
장년이 된 지금, 손끝은 바카라장 대신 모니터를 켠다. 그러나 추구하는 서사의 윤곽은 변하지 않았다. 비 내리는 도시의 검은 아스팔트, 무거운 코트 깃을 세운 형사의 뒷모습, 범죄 현장에 남겨진 축축한 침묵. 그 서늘한 영상미는 여전히 소년의 손전등에서 흘러나온 빛이다.
이제 그는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질문은 죽지 않았다. 순수문학이 오래도록 독점해온 인간 탐구라는 특권을, 장르문학은 어떻게 반납하지 않고도 수행해왔는가. 왜 어떤 문장은 성역에 들어가고, 어떤 문장은 문턱에서 되돌려지는가. 이 질문 앞에서 소년의 손전등은 다시 켜진다.
성벽 뒤편, 오래된 위계
문단에는 오래된 벽이 있었다. 순수문학이라 불리는 영역은 인간 내면의 깊이와 언어적 탐구를 독점하는 성역으로 대우받았고, 추리와 SF 같은 장르문학은 트릭의 유희이자 흥미 위주의 통속극으로 치부되었다. 이 위계는 미학의 필연이 아니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문화란 본디 평범한 것이라고 썼다. 그가 평생을 바쳐 추적한 것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어떤 단어가, 어떤 형식이 고급으로 세워지고 무엇이 통속으로 내려앉는가. 그 배치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였다. 그는 이를 감정구조라 불렀다. 한 시대가 무엇을 느끼도록 훈련받는가는 이미 계급과 제도가 결정해둔 몫이라는 뜻이다. 순수와 통속을 가르는 경계는 텍스트 안에 새겨진 본성이 아니라, 텍스트 바깥에서 누가 그 경계를 그었는가의 흔적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벽 안쪽의 언어이고, 무엇이 바깥의 소음인가. 답은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제도의 위치에 있었다. 감정을 세련되게 다루는 문장은 안으로 초대되었고, 감정을 노골적으로 자극하는 문장은 밖으로 밀려났다. 트릭 하나로 독자의 맥박을 흔드는 추리소설은 후자에 속했다. 그러나 맥박을 흔드는 일과 심연을 드러내는 일은 애초에 다른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이 성벽은 더 두꺼웠다. 장르문학은 오래도록 2급 3류 문학, 가벼운 읽을거리로 취급받았다. 상업성과 통속성, 특정 독자층 중심이라는 이유로 편견과 천시를 동시에 견뎌야 했다. 정통 문단의 평단은 처음부터 검토와 진단의 대상에서 장르를 제외했고, 장르에 심취한 독자들은 도리어 더 고도화된 해외 작품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국내 장르문학의 입지는 그렇게 양쪽에서 버림받은 채 애처롭고 위태롭게 서 있었다. 최근 극장가에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과 <체인소 맨: 레제편>이 흥행과 평단의 호평을 함께 거머쥐었을 때, 이를 매니아적 애니메이션으로 치부하며 면밀히 살피지 않았던 평론들이 뭇매를 맞았다. 이들이 쌓아 올린 세계관의 밀도와 서사의 독창성을 가벼움으로 오독한 대가였다.
그러나 독자는 정직하다. 관객이 장르에 따라 볼 영화를 고르듯, 독자는 장르에 따라 읽을 바카라을 고른다. 그 기대가 어긋날 때 독자는 후회하고, 짜증내고, 때로 분노를 표출한다. 장르에 대한 앎이 깊을수록 기대치는 높아지고, 그 기대를 감당하는 일은 오히려 더 무거운 바카라무가 된다. 장르는 가벼운 형식이 아니다. 가장 많은 눈이 지켜보는 형식이다. 까다로운 눈, 배반을 용서하지 않는 눈. 그 눈들 앞에서 백 편 넘는 서사를 조립해 낸 사람이 히가시노 게이고였다.
차가운 뇌세포, 뜨거운 심장
1958년, 오사카의 가난한 노동자 동네에서 그는 태어났다. 서점은 멀었고 바카라은 낯설었다. 공학을 전공했고 일본덴소에서 자동차 부품을 설계했다. 낮에는 도면을 그렸고 밤에는 원고지를 채웠다. 수식과 도면은 명료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었고, 입력이 있으면 출력이 뒤따랐다. 그에게 문장은 서사를 밀어붙이는 기계적 구조물이었다.
1985년 학원 미스터리 『방과후』로 제31회 에도가와란포상을 받고 온라인 게임을 그만두었다. 전업 작가의 길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서늘했다. 데뷔의 열기가 식은 뒤 긴 무명의 세월이 이어졌다. 써도 읽히지 않았고, 출간되어도 조용히 잊혔다. 당대의 평가는 그의 작품을 감동 없는 논리적 유희로 치부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밀실의 구조와 범행의 트릭에만 집착했고, 피와 눈물이 빠져나간 논리는 건조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범죄의 핵심은 정말 어떻게(How)에 있는가. 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왜(Why), 라는 질문이었다. 인간의 비극은 논리의 오류가 아니라 마음에 맺힌 한과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알았다. 1999년 『비밀』로 제52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며 그는 비로소 긴 침묵을 깨뜨렸다. 사고로 아내의 영혼이 딸의 몸에 들어간다는, 얼핏 황당한 설정 속에서 그가 응시한 것은 판타지가 아니라 그 틈새에서 비틀거리는 부녀의 애절한 심리였다.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진 자리에, 비로소 붉은 피가 돌기 시작했다.
2006년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의 작가 인생을 가르는 이정표였다.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설계한다. 그것은 헌신인가, 또 다른 악의인가. 그는 소설 첫머리에서 범인을 이미 밝혀두었다. 트릭을 파헤치는 재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어디까지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 시리즈는 그렇게 과학적 냉철함과 인간적 연민 사이를 가로지르며 완성되었다.
그의 이력은 세 층위로 쌓였다. 『방과후』와 『십자저택의 피에로』로 대표되는 도입기에는 밀실과 학원이라는 좁은 무대 위에서 순수한 트릭이 회전했다. 『비밀』과 『악의』, 『백야행』으로 이어지는 전환기에는 인간 심리와 악의의 기원이 서사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용의자 X의 헌신』을 지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이르는 정점기에는 논리와 감성이 마침내 하나의 문장 안에서 결합되었다. 이 세 층위는 단절이 아니라 축적이었다. 초기의 냉철한 설계 없이는 후기의 뜨거운 연민도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가 쿄이치로 형사 시리즈로 이어지는 또 다른 길목에서, 그는 범인을 잡는 일보다 사건 뒤에 남겨진 유족과 가해자 가족의 삶을 지켜보았다. 『악의』와 『붉은 손가락』, 『신참자』를 지나며 그가 응시한 것은 언제나 사건 이후의 삶이었다. 범죄는 단 한순간에 끝나지만 그 파장은 관련자들의 여생을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공허한 십자가』에 이르러 그는 다시 물었다. 사형제도는 정말 죄를 씻어주는가. 법이 단죄하지 못한 죄의 무게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는 다만 현장을 기록하듯 문장을 써 내려갔을 뿐이다.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꾼
사람들은 그에게 다작의 비결을 물었다. 백 권이 넘는 바카라. 비밀은 없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썼다. 스스로를 서사의 직공이라 불렀고, 자신의 작업을 서사의 공장이라 명명했다. 이 표현은 흔히 자조로 읽힌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깊은 결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에서 근대 이후 소멸해가는 능력을 하나 짚었다. 경험을 나누고 전승하는 능력, 곧 이야기하는 능력이다. 전쟁과 기계, 대량생산의 세기를 지나며 인간은 서로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잃어버렸다고 그는 진단했다. 벤야민은 이를 경험의 빈곤이라 불렀다. 그런데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하는 능력이 개인의 육성으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면, 그것은 대체 어디에 몸을 숨기는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서사 공장은 그 은신처 중 하나였다. 그는 트릭이라는 반복되는 형식, 형사와 사건이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매번 다른 인간의 결핍을 조립해냈다. 포뮬러는 이야기의 무덤이 아니었다.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숨 쉴 수 있었던 골조였다. 벤야민이 애도한 것이 개인의 육성으로 전해지던 이야기라면, 히가시노가 세운 것은 기계로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매체는 바뀌었으나 기능은 바뀌지 않았다. 공장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떠올려야 할 것은 소외가 아니라 생산이다. 무엇을 생산하는가. 더 이상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 서사적 경험을, 반복 가능한 형식 속에 담아 다시 흐르게 하는 일이다. 산업화된 형식이 도리어 개별적 경험의 서사화를 가능케 한 셈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통해 보여준 사유된 악의 허망함도, 아가사 크리스티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합리적 추리의 구조 뒤에 감춰둔 도덕적 모호함도, 결국은 같은 자리를 겨눈다. 범죄는 서사의 표면일 뿐, 진정한 무대는 인간 내면의 심연이라는 사실. 정유정의 인물들이 겪는 내적 붕괴 역시 그 계보 위에 있다.
보들레르는 악의 꽃이 인간이 감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일부라고 썼다. 그 꽃을 피우는 일이 곧 예술의 의무라면, 스릴러는 그 냄새를 가장 강렬하게 풍기는 현대적 형식이다.
소년이 문고판을 읽던 이불 속과, 장년이 OTT 화면을 마주하는 어두운 거실은 그래서 다르지 않다. 매체는 손전등에서 모니터로 바뀌었지만,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여전히 이야기를 향한 갈증이다. 서사는 자리를 옮겨 다녔을 뿐, 한 번도 소멸하지 않았다. 소멸한 것처럼 보였던 것은 서사가 아니라, 서사를 나누어 갖던 공동체였다. 히가시노는 그 빈자리를 인쇄된 문장과 방송된 화면으로 채워 넣었다. 이야기꾼이 마을의 화롯가에서 사라진 자리에, 서사의 공장이 대신 불을 지폈다.
과학소설, 본격 미스터리, 슬롯파 미스터리, 휴먼 드라마, 그리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같은 따뜻한 우화까지. 그는 영역을 가리지 않았다. 소설은 거창한 예술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독자가 첫 장을 넘기고 마지막 장을 닫을 때까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 그것이 작가의 직무라고.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수식어가 많아지면 사건의 윤곽이 흩어지고, 윤곽이 흩어지면 독자는 떠난다. 그는 서사의 뼈대만 남긴 채 속도를 올렸다. 그 속도가 곧 그의 윤리였다.
죽은 자의 유산, 계속되는 문장
『용의자 X의 헌신』에서 그가 끝내 밝히려 한 것은 알리바이의 정교함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디까지 스스로를 파괴하고 구원할 수 있는가, 라는 극단의 윤리학이었다. 『백야행』의 두 남녀는 어둠 속에서 서로의 빛이 되어주는 잔혹한 구원을 보여주었고, 『공허한 십자가』는 법이 담아내지 못하는 속죄의 무게를 물었다. 범죄자 가족이라는 주홍글씨를 다룬 『편지』는 어설픈 교훈을 배제한 채 현대 슬롯가 은폐해온 윤리적 딜레마를 정면으로 끌어올렸다. 트릭의 시효는 바카라을 덮는 순간 끝나지만, 그가 던진 인간에 대한 질문은 독자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서늘한 궤적을 남겼다.
그의 타계로 한 시대의 서사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다. 그러나 멈춘 것은 공장이지, 그 공장이 지켜온 이야기의 능력이 아니다. 공장은 멈추어도 설계도는 남는다. 나오키상 수상과 수천만 부의 판매고는 단순한 상업적 성공이 아니었다. 문학이 고급스러운 관념의 놀이에 갇히지 않고,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슬픔과 공명할 때 비로소 가장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사실의 증거였다. 순수와 장르 사이에 놓였던 오래된 성벽은 그의 문장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성벽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밝혀졌다.
소년은 손전등의 건전지가 다 닳은 뒤에도 계속 읽었다. 문고판의 종이가 노랗게 바래어 바스러진 뒤에도, 홈즈의 사색과 뤼팽의 실크햇, 그리고 이 땅 형사들의 쓸쓸한 등은 문장의 뼈대로 남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 뼈대 위에 하나의 이름이 더 얹힌다. 사건은 끝났고 현장의 피는 말랐으나, 사물의 표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소년의 시선만은 여전히 굳어 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장르문학이라는 이름의 형이상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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