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금요일] 마감, 닫는 자의 예식

오랜만에 마감을 하면서

by박 스테파노
- 마감이라는 리추얼
- 문턱을 건너는 사람들
- 폐곡선을 그리는 손
- 무한을 막아서는 의지


최근에 소소한 일들을 다시 시작하면서 '마감'을 건넜다. 익숙한 말인데도 낯설게 다가온 며칠이었다. 월간과 계간을 직접 만들지는 않았으나, 그 일부를 쓰고 유통과 잡무를 거들며 하루를 채웠다. 이런 일과를 지나다 보니 20년 넘게 전쟁 같은 마감을 건너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다. 마감이 압박이 아니라 하나의 예식이라는 것을.


인간은 왜 스스로 기한을 만드는가. 열려 있는 시간은 편안할 것 같지만, 실은 형태가 없어 불안하다. 강물은 둑이 있어야 강이 된다. 둑이 없는 물은 범람이거나 증발일 뿐이다. 마감은 그 형태 없는 시간에 스스로 둑을 쌓는 일이다. 둑을 쌓아야 물길이 생기고, 물길이 생겨야 강이 바다에 닿는다. 그것이 마감의 정수다.


이 물음에 답하려면 마감을 겪는 순서대로 따라가 보아야 한다. 시작하는 순간과, 한복판을 통과하는 순간과, 마침내 돌아오는 순간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분리, 문을 닫아거는 시간


글로벌 컴퍼니는 분기마다 실적을 평가했다. 시장과 주주에게 좋은 신호를 주려는 철저한 상인의 의지였다. 쿼터를 마감하는 한 주는 정신이 없었다. 제안이 미진한 것은 서둘렀고, 컨설팅과 구축 프로젝트의 기성을 올리려 산출물과 보고서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인류학자 아르놀드 반 겐넵은 통과의례를 분리, 전이, 통합의 세 단계로 나누었다. 사람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건너갈 때, 먼저 이전 자리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절차를 거친다는 것이다. 마감도 다르지 않다. 메신저를 끄고 바카라상 앞에 앉는 순간, 우리는 일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다. 그 격리는 상실이 아니다. 다음 단계로 건너가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문이다.


문을 닫아야 다른 문이 열린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마감을 해본 사람은 안다. 하루를 통째로 비워야 비로소 하루가 채워진다는 것을.


장자는 혼돈이라는 이름의 임금 이야기를 남겼다. 이웃 나라 임금들이 혼돈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사람이면 누구나 지녔다는 일곱 구멍을 뚫어 주었다. 하루에 하나씩 뚫었더니 이레 만에 혼돈은 죽었다. 열어서 죽는 것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감은 다르다. 마감은 남이 뚫는 구멍이 아니라 내가 닫는 문이다. 스스로 긋는 경계이므로,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태어남 쪽으로 걸어간다.




문턱 위에서 떠도는 시간


비즈니스 전반을 맡아 영업 성과를 내야 하던 시절, 거래가 마무리되어 계산서가 발행되고 매출이 인식되도록 해외에서 건너오는 장비와 물품의 통관을 지켜 서곤 했다. 고객에게 빠른 발주와 계약을 부탁하며 읍소했다. 설치 일정이 빠듯하여 새벽에 지게차를 불러 서버와 스토리지를 데이터센터에 올려놓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 모든 것을 '클로징'이라 불렀다. 딜 클로징, 딜리버리 클로징, 레베뉴 클로징. 문을 닫고 곡선을 닫아 폐곡선을 만들어 하나의 덩어리로 만드는 일이었다.


이 시기가 반 겐넵이 말한 전이, 곧 문턱의 시간이다. 문턱 위에 선 사람은 이전의 신분도 아니고 이후의 신분도 아니다. 원고는 아직 원고가 아니고, 계약은 아직 계약이 아니다. 형태 없는 시간을 홀로 통과해야 하므로 마감이 힘든 것이지, 일이 많아서 힘든 것이 아니다.


▲ 문턱, 겹쳐진 시간 · 프롬프트: Claude(Anthropic) · 이미지 생성: Gemini · ⓒ PSTPHNS


문턱 위에서는 시간도 절뚝인다. 새벽에 지게차 엔진 소리를 들으며 서 있던 그 순간, 나는 회사원도 아니었고 퇴근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통과 중인 사람이었다. 문턱이란 원래 그런 자리다. 두 세계에 동시에 걸쳐 있으나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자리. 그 불확실함을 견디는 힘이야말로 마감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진짜 노동이다.


마감이 끝나면 수일간 녹초 상태였다. 휴가를 내거나 동료들과 가벼운 아웃팅과 운동을 했다. 일종의 바카라거리로 서로의 노고를 치하하던 시절이었다. 몸은 무너져도 표정은 밝았다. 문턱을 건넌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문턱을 건넌 사람은 예전의 자리로 그냥 돌아가지 않는다. 반 겐넵이 통합이라 부른 이 복귀는, 격리와 임계를 통과한 자만이 얻는 자격이다. 떠나기 전의 나와 돌아온 나는 같은 이름을 쓰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다. 오늘, 그 클로징 데이가 공교롭게도 금요일이다.




열린 곡선을 닫는 손


마감의 어원에는 두 갈래가 전한다. 하나는 건축 용어에서 왔다는 설이다. 벽이나 지붕의 막바지 여밈을 뜻하는 '막'과 일을 매듭짓는다는 뜻이 더해져, 공사를 끝내고 가다듬는 행위(예: 마감재, 마감 공사)를 가리키다가 점차 기한을 끝맺는 뜻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순우리말 동사 '마감하다/막다'에서 왔다는 설이다. 구멍을 막고 경계를 짓는 행위에서, 어떤 일의 한계를 획정 짓는 말로 정착했다고 본다. 두 설 모두 마무리해 완성하는 작업에서 오늘의 뜻으로 건너온 셈이다.


영어의 closing도 다르지 않다. 라틴어 claudere(닫다, 가두다)에서 나온 말로, 원래 울타리를 치거나 문을 닫아 공간을 봉쇄하는 행위였다가 시간과 절차의 종료(closing date, closing time)로 확장되었다.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와 마크 존슨(Mark Johnson)은 개념 은유 이론에서 "시간은 공간이다(Time is Space)"라는 인간의 보편적 인지 틀을 짚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이해하려고 눈에 보이는 공간의 개념을 빌려 온다는 것이다. 마감과 closing은 공간에 벽을 세워 안과 밖을 나누듯, 시간의 흐름에 벽을 세워 완료와 미완료를 가른다. 동일한 은유적 도약이다.


▲ 둑을 따라 흐르는 강물 · 프롬프트: Claude(Anthropic) · 이미지 생성: Gemini · ⓒ PSTPHNS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이 인간에게 몽상의 공간이 되는 것은 벽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벽 없는 몽상은 몽상이 아니라 방황이다. 마감도 그렇다. 경계가 없는 공간은 무한한 황무지일 뿐 건축물이 되지 못한다. 끝이 없는 시간 속 작업도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흩어진다. 게슈탈트 심리학이 말하는 완결성(Closure)은 이 사정을 정확히 짚는다. 인간의 뇌는 불완전한 형태를 완결된 형태로 보완하려는 본성을 지녔다. 선이 끊어진 도형도 온전한 원이나 사각형으로 읽어낸다. 마감이 안도감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완성이란 결국 미완의 조각들을 뇌가, 그리고 인간이 하나의 형태로 봉합하는 순간이다. 열린 곡선을 닫아야 안과 밖이 확정되고,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하나의 과업이 태어난다.


언론과 출판이 쓰는 deadline, 죽음의 선을 넘으면 인쇄기가 멈춘다는 그 살벌한 말도 실은 같은 사정을 가리킨다. 선을 넘으면 죽는다는 말은 뒤집으면, 선 안에서는 살아 있다는 말이다. 무한히 흐르는 시간에 인공의 마침표를 찍어야, 그 순간까지의 결과물이 비로소 확정된다. 마침표가 없는 문장은 문장이 아니라 흘러가는 소리일 뿐이다.




무한을 막아선 자의 안식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의 성과주체가 스스로를 착취한다고 썼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경계 없이 팽창하면, 인간은 쉴 때조차 성과로 연결하려 든다. 이 슬롯에는 진짜 마감이 없다. 목표를 초과 달성해도 다음 목표는 더 높은 자리에서 기다린다. 닫히지 않는 시간, 그것이 소진의 정체다.


무한 경쟁이라는 말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실은 경계를 잃은 자의 다른 이름이다. 끝나지 않는 일은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소모되는 일이다. 여기서 마감은 뜻밖의 얼굴로 돌아온다. 마감은 이 가짜 무한과 다르다. 마감은 스스로 선택한 경계이며, 그 경계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쉴 자격을 얻는다. 성과슬롯의 무한이 가짜 무한이라면, 마감이 그어 주는 유한은 진짜 자유다. 문을 닫아야 쉴 수 있고, 곡선을 닫아야 다음 곡선을 그릴 힘이 생긴다.


▲ 새벽, 홀로 선 자리 · 프롬프트: Claude(Anthropic) · 이미지 생성: Gemini · ⓒ PSTPHNS


혹여나 작은 실수가 그간 쌓아온 매체와 발행인, 약속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폐를 끼칠까 노심초사하던 날들이었다. 그 마음이야말로 마감을 예식으로 만드는 진심이다. 두려움이 아니라 바카라임이었고, 압박이 아니라 정성이었다.


분리를 견디고 문턱을 건너 통합에 이른 모든 이에게, 오늘 닫은 문 하나는 소진이 아니라 완성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무한한 시간 앞에서 스스로 마침표를 찍는 일, 그것이 인간이 자신의 하루에 형태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강물이 바다에 닿기 위해서는 둑을 따라 흘러야 하듯, 하루가 하루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닫는 손이 필요하다. 그 손이 있어야 다음 문이 열린다. 그 손을 가진 모든 이에게, 이 예식이 부디 안식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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