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채로 도착하는 월요일에 대하여
- 세탁기의 소용돌이처럼,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 기차는 8시에 떠나고, 빗소리는 대신 운다
- 씻기지 않는 것은 오직 무너진 언어뿐이다
장마다. 창밖은 젖어 있고, 마음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이런 계절에는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장석주의 『철학자의 사물들』을 다시 편다. 『마흔의 서재』 이후 몇 해 만에 손에 든 바카라이다. 사전처럼, 혹은 성경처럼 읽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일 필요가 없는 바카라이다. 한두 꼭지를 펼쳐 문장을 접어 마음에 넣어두는 것으로 족하다. 완독하면 서평으로 한 번 더 기억할 참이다.
이 바카라은 일상의 사물 하나하나를 철학자 한 사람의 사유에 포개어 놓는다. <세탁기> 챕터가 유독 오래 붙잡았다.
산다는 것은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니고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게 본질이다. 모든 빨래는 사람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불가역적 시간의 포획물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옷에 앉은 먼지와 얼룩은 오류의 흔적이다. 흘려보낸 시간과 장소의 잔여물이며, 거짓과 욕망 앞에 무릎 꿇었던 죄의 자국이다. 그래서 세탁이 필요하다. 세탁은 불가역의 오염 속에서 처음을 다시 꿈꾸게 하는 의례다.
세제로 오염이 이탈하고, 섬유유연제로 본연의 유연함을 되찾고, 회전력으로 물기까지 털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글쓰기가 도달하려는 회심의 성찰 아닐까. 글쓰기는 세탁기라는 장치와 가장 가까운 사유의 형식이다.
<비누> 챕터도 마저 읽는다.
왜 모든 것은 사라지는가? 사물은 어느 순간 그 효용을 다하고 소실점 너머로 사라진다. 사라짐은 고갈이고 소멸이다. 비누는 한없이 닳아지는 것, 닳아지다가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대표한다.
—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사물은 사라진다. 사물을 쓰던 존재도 함께 사라진다. 장석주는 사물의 죽음을 멜랑콜리하다고 적는다. 씁쓸하면서 달콤한 이유는, 사라짐이 현재의 영혼을 과거의 영혼으로 슬며시 밀어내기 때문이다. 소멸은 시간의 방향을 거꾸로 비춘다.
끝은 에너지의 영점(零點)이다. 가치의 영점이다. 제도도 개인도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허인데, 장석주는 이 공허가 위대하다고 썼다. 공허는 한때 거기 실재가 있었다는 증거다. 해부학의 사강(死腔, Dead Space)을 문학의 숨결로 풀어낸 어느 온라인카지노 작가의 사유와도 이 문장은 맞닿는다. 쓸모없어 보이는 여백은 채택된 실체의 쓸모를 오히려 또렷하게 만든다.
비누가 사라지듯 그것을 쓰던 사람도 언젠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짐은 종말이 아니라 완성에 가깝다. 삶의 총체적 완성은 사멸이다. 삶은 죽음에 닿아야 비로소 둥글어진다. 그 둥글어짐을 가끔 감각한다. '가끔'이라는 빈도로만 종착점을 떠올리며, 아직 여유가 남았다고 착각하며 산다. 그러다 희망이라는 말을 애써 외면하는 순간, 종말은 불현듯 현실이 된다. 날기를 멈춘 알바트로스처럼.
그러나 사라짐은 달리 생각될 수 있다. 즉, 독특한 사건으로, 그리고 특수한 욕구의 대상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 욕구란 더 이상 거기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결코 부정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라짐은 우리 없는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일 수 있다.
— 『사라짐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사라짐이 욕구라면, 장마는 그 욕구가 몸을 얻는 계절이다. 빗물은 세탁기의 물이면서 동시에 사라짐의 매질이다. 씻긴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은, 이 계절 안에서 같은 말이 된다.
빗속의 만가(輓歌)
아침이면 지난 KBS FM 「세상의 모든 음악」을 다시 듣는다. 시간은 흘렀지만 음악은 제자리에 남는다. 지난주에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Το Τρένο Φεύγει Στις Οκτώ)를 여러 판본으로 들었다. 미키스 테오도라키의 웅장하고 서정적인 선율에 마노스 엘레프테리우의 시가 얹힌 곡이다. 그리스 대중음악의 정수로 꼽힌다. 이 노래에는 그리스 민중이 통과한 고통과 역경이 응축되어 있다. 물리적 이별을 넘어 집단적 상실과 저항의 의지까지 품는다. 그래서 국경을 넘어 공명한다.
겉보기에는 연인이나 가족의 사적인 이별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1967년 군부 쿠데타 이후의 정치적 망명, 만성적 경제적 곤궁이 밀어낸 이주와 디아스포라의 집단적 슬픔이 겹겹이 깔려 있다. 개인의 서정은 역사적 비극의 바닥과 맞닿는다.
가사 속 '기차'는 이동 수단이 아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강제된 단절이며,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의 시간 그 자체를 표상하는 원형이다. '8시'라는 구체적 시각은 이별의 순간을 영원히 고정하는 핀처럼 작동한다. 막연한 슬픔이 아니라 정확한 시간 속에 박제된 단절의 고통을 청자의 기억에 새긴다. 이 서사적 시간 설정은 반복되는 상실의 리듬을 암시하며, 노래를 하나의 집단적 만가(輓歌)로 끌어올린다. 시적 언어는 직접적인 고발을 피한다. 기차역의 정적과 소음,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 같은 절제된 이미지가 대신 운다.
장마의 빗소리는 기차의 경적과 닮았다. 정해진 시각 없이, 그러나 반드시 온다. 8시라는 못이 이별의 순간을 고정한다면, 장마는 슬픔이 고정될 시각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채로 계속 내리는 것, 그것이 이 계절의 애도 방식이다. 빗줄기는 묻는다. 슬픔에도 정해진 시간이 있어야 하는가. 아니, 어쩌면 슬픔은 원래 시각표가 없는 것 아닌가.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미학적 핵심은 비극적 숭고미다. 테오도라키는 그리스 전통 민속음악 라이카의 소박한 정서를 토대로, 이를 풍부한 오케스트라 편성과 복합적 화성으로 확장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슬픔은 민족의 역사적 서사로 끌어올려진다. 절제된 멜로디는 청자에게 과잉된 감정이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의식의 바닥에 가라앉은 고독을 조용히 건드린다.
이 노래 속 슬픔은 나약함이 아니라 저항적 미덕으로 전환된다. 마리아 파란투리의 목소리는 무너지는 통곡이 아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하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정신의 자세를 들려준다. 이별과 상실을 통과하면서도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인간의 필연, 그 필연 앞에서 침묵 대신 노래를 선택하는 의지. 그것이 이 곡의 가장 강력한 미학적 전언이다.
이 곡은 과거를 되감는 노스탤지어에 머물지 않는다. 떠나보냈으나 잊지 않겠다는 기억의 의지를 예술로 세운다. 기차가 8시에 떠나는 일은 피할 수 없지만, 그 열차에 실린 이야기는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 그렇게 이 노래는 인류의 보편적 고전이 된다. 모든 상실의 순간에 공명하며,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길어 올리는 예술의 힘을 증언한다.
성탄이 아니어도 좋다. 장마도 이 노래와 통한다. '8시에 떠나는 기차'가 상징하는 강제된 단절과 디아스포라의 슬픔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반복된다. 경제적 격차와 슬롯적 고립 속에 놓인 노동 이주민과 난민, 도시 외곽에 홀로 남겨진 이들의 쓸쓸함이 이 음악과 깊게 공명한다.
진정한 위로는 화려한 축제나 개인의 안위에 머물지 않는다. 고독한 이별과 상실을 살아내는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환대의 윤리에서 시작된다. 그리스 민중이 슬픔 속에서 길어 올린 저항적 숭고미처럼, 위로의 빛도 슬롯의 변방에 선 모든 떠난 이와 남겨진 이에게 닿아야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기억하고, 연대하며, 언젠가의 재회를 약속하는 실천으로서.
기다림의 절기
대통령 업무보고를 두고 호들갑이 요란하다. 누군가는 공무의 실체를 보게 되어 속이 시원하다 하고, 누군가는 과도한 지적과 갈굼이라 평한다. 유난히 반복되는 평가가 하나 있다. 매년 초에 받던 업무보고를 한 해 전에 앞당겨 받는 것이 이례적이며 대단한 '일머리'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절반도 맞지 않는다. 사전 연말보고의 시작은, 개인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던 MB 정부 시기였다. 윤석열 정부는 4월에야 마감했다고 하니, 이를 이례라 부를 만한지는 의문이다.
이 일정에 놀라는 이들이 있다면 공무원과 정치인, 자영업자와 소시민, 그리고 기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규모 있는 기업이나 민간 조직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을 계획, 이른바 Fall Plan을 세운다. 빠르면 10월, 늦어도 11월이면 다음 해의 사업계획이 확정되고 전사적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예산이 배분되고 인사이동까지 준비된다. 한 해의 계획을 그 해의 시작에 세운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익히 안다.
7월은 한 해의 한중간이자 절반의 시작이 겹쳐지는 과도기다. 장마라는 기후의 일정과 농경의 절기에서 비롯된 기다림과 채비의 시간, 그 오래된 리듬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인류학자 반 겐넵은 통과의례를 분리, 전이, 통합의 세 단계로 나누었다. 그중 전이 단계, 문지방(threshold)의 시간은 이미 떠난 자리도 아니고 아직 도착한 자리도 아니다. 7월이 그렇다. 상반기도 아니고 하반기도 아닌 시간, 비에 젖어 아직 마르지 않은 시간이다. 문지방 위에서는 아무도 완전히 이전의 존재가 아니고, 아직 다음의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이 시기는 불안하고, 동시에 무언가를 채비하게 만든다.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물의 상상력을 정화의 물질적 상상력이라 불렀다. 물은 씻고, 씻긴 것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빗물은 지붕을 씻고 거리를 씻고, 사람의 얼굴까지 씻어낸다. 그런데 씻기지 않는 것이 있다. 오염된 언어다. 값싼 오피니언과 무감각한 호칭은 비에 젖지 않는다. 오히려 젖은 자리마다 곰팡이처럼 번식한다. 물의 상상력이 배반당하는 유일한 자리, 그것이 언어다.
장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는다. 언어도 본디 그러해야 한다. 낮은 곳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상처를 씻어내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언어는 다툰다. 낮은 자리를 향해 흐르는 대신,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향해 함부로 이름을 붙인다. 물이기를 거부한 언어다.
글쓰기와 출판의 세계도 이 과도의 의미를 공유한다. 한 해의 성패가 달린 독서의 계절을 대비하는 기획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문필의 시작을 알리는 공모들이 넘친다. 최근 메일함과 온라인에는 스캠피싱 계정이 늘고 광고와 홍보성 글도 잦아졌다. 세태의 반영이겠거니 하며 관계자들의 적절한 조치를 기대할 뿐이다.
이런 장면들을 지나며 결국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된다. 글을 쓰는 이유는 개인적인 아카이빙의 욕망이면서, 더 근원적으로는 기여에 대한 작은 소망이다. 공부와 인지와 사유를 글로 엮어 세상에 건네는 일. 아주 작은 증여로서의 글쓰기다. 증여의 본질이 그러하듯, 보상과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되는 행위다. 그래서 출간이나 인정이라는 이름의 보상에 대한 마음을 거두려 애써본다. 그 다짐을 위해 우치다 다쓰루의 문장을 다시 펼친다.
바카라을 쓰는 일이란 그 본질이 '증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에 대한 선물'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모든 선물이 그렇듯 그것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그것에 얼마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이 문장을 읽으며 다시 한 해의 끝과 시작 사이에 선다. 글을 쓴다는 일의 자리 역시, 언제나 그 문지방 위에 놓여 있다.
젖은 채로 도착하는 월요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파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월요일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늘 피하고 싶던 요일에 묘한 이해와,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가 스며든다.
월요일마다 새벽을 열던 시절이 있었다. 일상은 언제나 생계와 맞닿아 있었지만, 새벽이 늘 고단하지만은 않았다. 말로 옮기기 힘든 우쭐함이 찾아오곤 했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가슴속에서 조용히 몽글거렸다.
그 무렵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거창한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좌절과 우울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기어이 떠올라 새벽 공기를 마시며 우쭐해지는 일.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감사할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쭐대던 새벽 출근길을 이제는 새벽 병원길이 대신한다. 만만치 않은 상황들이 겹겹이 이어지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날들도 계속된다. 예전 같았으면 요령을 부리거나 슬쩍 피해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뚜벅뚜벅 정직하게 걸어가려 한다. 날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소중한 숨결들 앞에서, 대답하듯 살아내고 싶은 새벽을 그려본다. 날마다 기도해주는 아내에게 고맙다.
새벽길은 스산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토닥임이 있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라는, 말 없는 인사 같은 것. 그 토닥임에 기대어 길 위에 나서는 모든 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기도한다. 누구처럼 선뜻 기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어서, 지금 드릴 수 있는 것은 이 기도뿐이다.
세탁기는 돌고, 빗물은 흐르고, 기차는 8시에 떠난다. 사라짐은 언제나 방향을 가진 흐름이었다. 이 흐름의 끝에서 다시 시작이 온다. 젖은 채로 도착하는 월요일, 마르지 않아도 괜찮다. 아직 마르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씻는 중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새벽이 다시 월요일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한다. 살아 있다는 감각을 조용히 확인시키는 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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