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인'이 사라지는 세상
- 도와주다 봉변당할까 두려운 시대
- 선함은 재판을 받고, 착함은 그저 멈춘다
- 감시 카메라는 늘어도 멈추는 사람은 준다
- 가장 작고 어눌한 일이 먼저다
광주의 한 인도에서, 일면식 없는 고등학생이 흉기에 쓰러졌다. 그 죽음을 추모하는 발걸음이 이어지는 동안 뉴스는 담담하게 숫자를 불렀다. 이상동기 범죄, 연간 사십 건 안팎. 사람들은 그 숫자 앞에서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숫자는 반복될수록 무뎌진다. 무뎌진 숫자는 끝내 얼굴을 잃는다.
사건 뒤에는 대바카라이 뒤따랐다. 경찰은 형사기동대와 기동순찰대를 확대했고, 공공장소흉기소지죄와 공중협박죄가 새로 시행됐다. 서울시는 공원과 등산로, 주거지역 곳곳에 지능형 CCTV를 늘렸다. 배회와 쓰러짐, 폭행을 감지하는 눈이 도시의 곳곳에 박혔다. 기계는 쉬지 않고 지켜본다. 사람이 서야 할 자리를 렌즈가 대신한다. 렌즈는 성실하다. 그러나 다정하지는 않다.
렌즈는 다가가지 않는다. 기록할 뿐, 무릎을 꿇지는 않는다. 전문가들은 처벌과 감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지역슬롯와 정신건강 시스템이 함께 작동하는 조기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말 바깥에도 끝내 남는 일이 있다. 쓰러진 사람 곁에 앉는 일이다. 그 일은 아직 사람의 몫이다.
우리는 그 몫을 기계에 넘긴 뒤 안심한다. 그러나 안심은 안전이 아니다. 안심은 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에 가깝다. 안전은 누군가의 곁을 지키는 데서 시작된다. 감시는 거리를 줄이지 못한다. 거리를 줄이는 것은 사람뿐이다.
오늘의 거리에서 그 질문은 대답을 얻지 못한 채 흩어진다. 쓰러진 사람은 여전히 사람을 기다린다. 카메라가 아니라 걸음을 기다린다. 왜 우리는 더 많은 눈을 세우면서도, 더 적은 곁을 남기게 되었을까.
이른바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개 고립이 먼저 있었다. 실직과 이혼, 오래된 따돌림, 곰팡이가 번진 단칸방. 위험의 징후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다만 아무도 그 곁으로 가지 않았다. 슬롯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야 카메라를 세운다. 사건 이전에 사람을 세우는 일에는 서툴다.
기계는 결과를 기록한다. 그러나 원인의 곁에는 있어 본 적이 없다. 범죄는 흉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 방치된 고립에서 자라난다. 곁이 사라진 자리에서 또 하나의 곁 없는 사건이 태어난다. 기술은 도시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슬롯를 붙드는 것은 끝내 사람이다. 렌즈는 기억을 남기지만, 공동체는 곁을 남긴다. 그 둘의 차이가 오늘 우리가 끝내 붙들어야 할 안전의 이름이다.
선의가 심판의 저울 위에 올라간다
2016년, 택시 안에서 기사가 심정지로 쓰러졌다. 승객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고 내렸다. 훗날 그를 처벌할 법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놀랐다. 놀라움은 두 갈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물음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긍이었다. 두 번째가 더 두렵다. 그것은 그 승객이 나일 수도 있다는 인정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착한 사마리아인법은 반쪽에 머물러 있다. 구조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조항은 없고, 구조하다가 발생한 손해를 일정 부분 면바카라하는 규정만 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의2가 그것이다. 도입을 지지하는 쪽은 긴급한 상황에서 타인을 방치하는 일도 공동체가 규율해야 할 바카라임이라고 말한다. 반대하는 쪽은 구조의 의무를 법으로 강제하는 순간 개인의 자유와 자기결정권이 침해된다고 맞선다. 논쟁은 오래 이어졌지만 아직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법이 어디까지 나아가든 마지막 선택은 여전히 개인에게 남는다. 그 선택은 대개 계산과 함께 찾아온다. 도와주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쓰러진 사람이 정말 환자인지, 위장한 범죄자인지 내가 어떻게 아는가. 이 계산은 비겁함이라기보다 두려움의 언어다. 사람은 먼저 미래의 법정에 자신을 세워 놓고 변론을 시작한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사람은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준비는 걸음의 반대말이 된다.
사마리아인에게는 그 준비가 없었다. 그는 유대인의 눈에는 불결한 혼혈이었고, 성전이 아니라 그리짐 산에서 예배하는 배교자였다. 사제와 레위인은 길을 지나쳤다. 율법은 그들에게 정결을 요구했고, 정결은 피 흘리는 몸 곁으로 다가가는 일을 망설이게 했다. 그들의 지나침에도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근거가 있는 지나침이야말로 가장 견고하다. 근거는 언제나 외면을 정당화하는 데 능하다.
그 곁에서 사마리아인은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할 자격조차 없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먼저 멈추었다. 그는 잃을 것을 따지지 않았다. 다만 보았고, 마음이 움직였고, 몸이 그 뒤를 따랐다. 선함은 거창한 결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몸이 마음보다 먼저 방향을 바꾸는 순간, 선은 이미 시작된다.
선함이 저울이라면, 착함은 저울에 오르기 전의 걸음이다. 저울은 묻는다. 이 도움은 정당한가. 이 개입은 안전한가. 훗날 나는 무사할 것인가. 그러나 걸음은 묻지 않는다. 걸음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우리는 너무 오래 저울을 들여다보며 살아왔다. 그 사이 쓰러진 사람은 더 오래 홀로 누워 있었다. 법은 바카라임의 경계를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을 일으키는 것은 끝내 법이 아니라, 저울보다 먼저 움직인 한 걸음이다.
선함보다 낮은 자리에 착함이 있다
복음은 말한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이 한 문장에는 판단의 절차가 없다. 마땅한가, 옳은가, 나에게 이로운가를 묻지 않는다. 몸이 먼저 반응했고, 걸음은 그 반응을 따랐다. 감각은 판단보다 먼저 도착한다.
착하다는 말은 그래서 초라하다. 대의도 아니고 원칙도 아니다. 어눌하고 사소하다. 누구나 할 수 있기에 오히려 하찮게 여겨진다. 그러나 바로 그 하찮음이 문턱을 낮춘다. 선행이라는 말은 무겁다. 무거운 말 앞에서 사람은 자격을 따지고 결과를 헤아린다. 계산이 길어질수록 몸은 늦어진다. 반대로 착한 일이라는 말은 가볍다. 가벼운 말은 손을 먼저 움직이게 한다.
거창한 선행에는 준비가 따른다. 자격과 절차가 필요하고, 때로는 증인까지 요구된다. 그러나 착함은 지금, 여기에서 곧장 시작된다. 준비가 필요 없다는 사실, 그것이 착함의 가장 큰 힘이다. 선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먼저 일어난다.
선함은 한자의 무게로 온다. 문서에 적히고 조항으로 나뉘며 찬반의 대상이 된다. 착함은 순우리말의 다정함으로 온다. 몸에 붙어 있고 입에 붙어 있으며 설명보다 행동에 가깝다.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보다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에 더 오래 머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함이 공적 판단의 언어라면, 착함은 사적 감각의 언어다.
오늘 우리는 손을 내밀기 전에 계산부터 한다. CCTV가 먼저 보기를 기다리고, 법이 먼저 판단하기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감각은 무뎌진다. 감각이 비워진 자리에는 두려움이 들어선다. 두려움은 계산을 낳고, 계산은 걸음을 붙든다. 그 멈춤의 끝에는 늘 혼자 남겨진 사람이 있다.
사마리아인의 자비는 미덕의 전시가 아니었다. 그는 지나칠 수 없어서 지나치지 않았다. 예수는 그를 착하다고 부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행한 일을 말씀하셨다. 이름은 언제나 뒤늦게 온다. 착함은 이름 붙기 전에 이미 몸 안에서 끝나 있다.
선함은 공동체가 합의한 저울이다. 저울에는 눈금이 있고, 그 눈금을 지키는 법이 있으며, 법을 판단하는 법정이 있다. 그러나 착함에는 눈금이 없다. 몸이 먼저 기울어질 뿐이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반응. 그래서 그것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우리는 그를 착한 사마리아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수식어는 어느새 그를 우리 밖의 사람으로 만든다. 원래는 그렇지 않을 사람이었는데, 이번만은 예외였다는 뜻이 그 안에 숨어 있다. 복음은 그 반대를 말한다. 몸은 타자와 나를 가르기 전에 먼저 움직인다. 착함은 타자화보다 빠르다. 경계는 말이 세우고, 몸은 그것을 건넌다. 결국 사람을 사람에게 이르게 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라 먼저 내디딘 한 걸음이다.
멈춘 사람이 이웃이다
CCTV는 늘어나는데, 멈추는 사람은 줄어든다. 이 어긋남이 오늘 우리의 얼굴이다. 기계는 사건을 기록한다. 그러나 사건을 멈추지는 못한다. 멈추는 일은 언제나 곁에 있던 몸의 몫이었다. 제도가 촘촘해질수록 그 몸의 자리는 오히려 좁아진다. 우리는 더 안전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안전은 서로에게서 한 걸음씩 물러난 안전인지도 모른다.
법은 최소한의 경계를 세운다. 그러나 마음의 방향까지 정하지는 못한다. 착한 사마리아인법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멈춘 사람을 보호할 수는 있어도, 사람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걸음을 바꾸는 결정은 언제나 법보다 먼저 일어난다. 그 순간까지 대신해 줄 제도는 없다. 법은 뒤따를 뿐, 앞장서지 못한다.
결국 남는 것은 한 가지다. 쓰러진 사람 곁에 앉는 일이다. 가엾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짧은 순간이다. 그것은 교육으로 주입되지 않는다. 다만 삶 속에서 익혀질 뿐이다. 익힘은 거창한 결심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 지나치려던 걸음을 한 번 멈추는 일. 그것이면 충분하다. 착함은 그렇게 몸에 새겨진다.
착함은 크지 않다. 그래서 오래 버틴다. 선함은 저울 위에서 흔들리지만, 착함은 저울 밖을 묵묵히 걷는다. 누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예수의 물음은 지금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대답은 길지 않다. 멈춘 사람이 이웃이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이 말씀은 명령이라기보다 초대에 가깝다. 위대한 일을 이루라는 요구가 아니다. 먼저 멈추라는 권유다. 멈춤은 작다. 작기에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오늘도 거리에는 쓰러진 사람이 있고, 그 곁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거대한 결단이 아니라 한 걸음이다. 판단은 나중이어도 늦지 않다. 몸은 먼저 가야 한다. 그 한 걸음이 사람을 이웃으로 바꾸고, 공동체를 다시 사람의 얼굴로 되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