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스콜이 되다

기다림의 종언, 폭우의 시간

by박 스테파노
- 늦게 온 계절, 사라진 완만함
- 뒤로 밀린 계절, 연장된 기다림
- 열돔 아래, 지갑이 열리는 손

https://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30308


작년 여름, 나는 오지 않는 비를 기다렸다. 기상청은 장마가 시작됐다고 발표했지만 하늘은 맑았다. 눅눅한 습기도, 느리게 스미는 바람도, 축축하게 무너지는 빛의 밀도도 없었다. 나는 그 어긋남을 '마른장마'라고 적었다. 이름은 있으나 실체가 없는 계절, 존재하지만 기능하지 않는 시간이라고 썼다. 장마라는 말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나는 언어와 감각이 더는 포개지지 않는 시대의 균열을 보았다.


올해는 달랐다. 비가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늦게 왔다. 제주는 6월 30일, 중부지방은 7월 1일에야 장마철에 들어섰다. 예년보다 보름 늦은 시작이었다. 제주는 1973년 관측 이래 세 번째로 늦은 장마였고, 남부와 중부지방은 여섯 번째로 늦은 장마였다. 지난해 대부분 지역이 6월 중순 장마를 맞았던 것과 견주면, 올해 하늘은 유난히 더디게 움직였다.

ChatGPT Image 2026년 7월 9일 오후 03_15_23.png▲ 장마란 이상하게도 비가 오지 않아도, 너무 넘치게 내려도 걱정이다. ⓒ ChatGPT generated by PStphns


장마가 오기 전, 유월의 서울은 이미 뜨거웠다. 낮 기온이 삼십 도를 웃도는 날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우산보다 양산을 먼저 챙겼다. 비 없는 더위 속에서 계절은 제 자리를 잃었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예열만 길었고, 정작 계절의 몸통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늦게 도착한 계절은 도착한 뒤에도 예전의 얼굴이 아니었다. 완만함을 잃고 폭력을 얻었다. 기다림 끝에 찾아온 것은 스며드는 비가 아니라 터져 내리는 비였다. 결핍의 여름 뒤에는 과잉의 여름이 이어졌다. 계절은 해마다 극단을 오갔다. 그 사이에서 완만함은 가장 먼저 사라졌다.



예측의 끝에서 기다림을 배우다


기다림에는 두 결이 있다. 오리라 믿고 견디는 기다림과, 오지 않으리라 예감하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하는 기다림. 작년의 마른장마가 후자였다면, 올해의 늦은 장마는 전자에 가까웠다. 비는 결국 왔다. 예정보다 보름 늦었을 뿐이다. 그 보름 동안 사람들은 우산을 접어둔 채 하늘을 올려다봤고, 뉴스는 날마다 정체전선의 위치를 고쳐 썼다.


기상청은 2009년 이후 장마의 공식 시작과 종료를 예보하지 않는다. 강수 기록을 사후 분석해 발표할 뿐이다. 예측을 업으로 삼는 기관이 예측을 거둬들인 셈이다. 이것은 태만이 아니라 정직에 가깝다. 정체전선의 북상 속도, 태풍의 진로,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력은 하루 만에도 달라진다. 한 달 뒤의 날씨를 단언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장마는 해마다 오지만,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늘 지나간 뒤에야 알게 된다.


이 불확실성은 기상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시대 예측 체계의 초상이다. 선거는 여론조사로 점쳐지지만 결과는 번번이 어긋난다. 시장은 지표로 전망되지만 폭락은 예고 없이 닥친다. 알 수 없는 것을 정확히 말해야 하는 자리에 사람들은 늘 서고, 늘 실패한다. 장마는 그 실패의 목록에서 가장 오래된 항목일 뿐이다.

NISI20240724_0020426473_web.jpg▲ 기상청은 태풍이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진 않겠지만 '태풍의 세력과 이동 경로에 따라서 장마와 폭염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 뉴시스


이제 실패는 재난문자와 속보, 실시간 강수레이더를 타고 우리 손안으로 밀려든다. 예측은 더욱 정교해졌지만 확신은 더 옅어졌다. 정보가 늘어날수록 불안은 줄지 않았다. 다만 불안을 갱신하는 속도만 더욱 빨라졌다.



장마가 잃어버린 시간의 결


늦게 온 장마는 오는 방식마저 달라졌다. 예전의 장마는 며칠이고 몇 주고 하늘을 눅눅하게 적셨다. 구름은 낮게 깔렸고, 비는 가늘고 길게 내렸다. 올해의 비는 다르다. 좁은 지역에 짧고 거세게 쏟아진다. 기상청은 이를 국지성 호우라 부른다. 사람들은 여전히 게릴라성 호우라는 말을 즐겨 쓴다. 본래 일본에서 건너온 조어다. 일본 기상청은 전쟁을 연상시키는 과격한 표현이라는 이유로 이 용어를 공식 명칭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언론과 대중의 입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비마저 이제는 기습이라는 말로만 설명되는 시대다.


낮에는 맑다가 밤사이 폭우가 터지는 일도 잦다. 언론은 이 양상을 동남아 우기의 스콜에 빗댄다. 시간당 백 밀리미터에 가까운 비가 좁은 지역에 집중되고, 몇 시간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이 걷힌다. 시간당 오십 밀리미터가 넘는 극한호우가 예보되면 긴급재난문자가 먼저 울린다. 사람들은 반지하와 지하주차장을 살피고, 도로는 싱크홀로 갈라진다. 맨홀은 역류하고 배수구는 넘친다. 올여름 제주에서는 이런 극한호우가 여덟 차례 관측되었다.


나는 작년 여름을 잊지 않는다. 마른장마가 끝난 뒤, 칠월 중순 며칠 사이 산청과 가평에서 스무 명 가까운 사람이 급류와 산사태로 목숨을 잃었다. 결핍 뒤에는 과잉이 왔고, 그 과잉은 사람을 삼켰다. 올해의 스콜은 아직 그런 참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싱크홀과 침수는 이미 곳곳에서 되풀이된다. 이제 장마는 스며드는 계절이 아니라, 순식간에 도시를 덮치고 사라지는 사건이 되었다.


여기서 나는 작년과는 다른 상실을 본다. 작년에 잃은 것은 비 자체였다. 올해 잃은 것은 비가 오는 방식이다. 완만함과 지속성, 예측 가능한 리듬이 함께 사라졌다. 장마라는 말이 품어온 시간의 결이 통째로 바뀌고 있다. 장(長)이라는 한자는 더 이상 계절을 설명하지 못한다. 길게 이어지던 비는 짧고 사나운 비로 바뀌었다. 한반도의 기후는 아열대를 지나 열대의 문턱으로 옮겨가는 듯하다. 계절은 이름을 그대로 둔 채 성질만 바꾸어 돌아온다. 껍데기는 남았지만, 그 안은 이미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있다.

ChatGPT Image 2026년 7월 9일 오후 03_41_55.png▲ 장마는 침잠의 시간이다. 침잠은 퇴행이 아니라 잠시 멈춤에 있다. ⓒ Gemini generated by PStphns


한국 문학이 그려온 장마는 침잠의 계절이었다. 스며드는 빗소리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들여다보았고, 오래 묵은 갈등은 눅눅한 공기 속에서 천천히 곪거나 아물었다. 그러나 지금의 비는 침잠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는 줄도 모르게 들이치고, 그친 줄도 모르게 사라진다. 문학이 오래 붙들어온 장마의 정서적 문법은 이 새로운 하늘 아래에서 낡은 서술이 되어간다. 우리는 아직 이 스콜의 문법을 담아낼 언어를 갖지 못했다.



더위가 물가가 되는 계절


날씨는 더 이상 감정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폭염과 폭우는 곧장 밥상으로 번진다. 계란 열 구의 소매가는 오르고, 채소는 무르며, 양식장은 고수온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이를 히트플레이션이라 부른다. 더위를 뜻하는 히트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을 붙인 말이다. 정부는 여름철 농축산물 수급안정대바카라반을 꾸렸다. 기온이 오르면 대기가 품는 수증기량도 늘고, 국지성 호우의 위력은 더욱 커진다. 폭염과 폭우는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서로를 부추긴다. 날씨는 오래전에 감성의 언어를 떠나 정바카라의 언어가 되었다.


같은 여름, 유럽은 열돔 아래 갇혔다. 북아프리카에서 밀려온 뜨거운 공기 덩어리가 상공의 강한 고기압에 막혀 빠져나가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볼로냐, 피렌체, 밀라노, 토리노를 비롯한 여덟 개 도시에 적색경보를 내렸다. 독일 일부 지역의 기온은 섭씨 삼십팔 도까지 올랐다. 베를린에서는 폭우가 야외 음악 축제의 무대를 덮쳤다. 한쪽에서는 열기가 도시를 가두고, 다른 한쪽에서는 폭우가 도시를 삼켰다.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삶을 덮치는 풍경은 더 이상 적도 부근만의 일이 아니다.


기후는 국경을 모른다. 서울의 게릴라성 호우와 밀라노의 적색경보는 같은 하늘 아래서 벌어진 하나의 사건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도시에서 같은 재난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뿐이다. 폭염과 폭우는 서로 다른 재난이 아니다. 하나의 몸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갈래 증상이다. 열을 가둔 대기는 한쪽에서는 도시를 태우고, 다른 쪽에서는 물을 퍼붓는다. 지구는 몸살을 앓고, 우리는 그 체온을 물가와 재난문자로 날마다 확인한다.



기다림을 잃은 계절의 시간


한병철은 현대를 가속의 슬롯라고 진단했다. 시간은 더 이상 이야기의 형식으로 흐르지 않는다. 점처럼 흩어진 순간들이 이어지지 못한 채 나열될 뿐이다. 그는 이를 시간이 향기를 잃은 상태라고 말했다. 향기는 지속에서 태어난다. 발효와 숙성, 기다림의 더딘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맺힌다. 그러나 가속의 시대는 모든 것을 즉시 소비하고 즉시 폐기한다. 기다림은 비효율이 되고, 지속은 낭비가 된다.


장마는 본래 기다림의 형식을 지닌 계절이었다. 비가 스며들기를 기다리고, 장마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그 사이 마당의 잡초가 자라는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이제 그 시간은 사라졌다. 장마는 오는지 오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다가, 어느 순간 재난문자로 도착해 순식간에 지나간다. 지속은 사라지고 사건만 남았다. 향기를 잃은 계절이다.


한병철이 말한 매끄러움의 폭력도 이 풍경 위에 겹쳐진다. 매끄러운 것은 저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스콜처럼 쏟아지는 비는 아무 저항 없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우산을 펼 시간도, 몸을 피할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매끄럽게, 그러나 폭력적으로 지나간다. 걸리는 것도 머무는 것도 없다. 이 비는 시대의 다른 풍경들과도 닮았다. 뉴스는 순식간에 밀려나고, 재난은 곧 잊히며, 관심은 다음 화면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그렇게 머무는 법과 저항하는 법을 함께 잃어간다.


한병철은 또 이 시대를 피로슬롯라 불렀다. 타인이 강요하지 않아도 사람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소진된다. 성과의 이름으로 자신을 착취하는 주체다. 하늘도 그 구조를 닮아간다. 외부의 압력보다 스스로 축적한 열을 견디지 못해 한순간 터뜨린다. 천천히 달아오르다가 끝내 무너져 내리는 하늘은 자신을 소모하는 인간의 얼굴과 겹친다. 자연도 인간도 완만한 리듬을 잃고, 극한과 탈진 사이를 오간다.

한병철 삽화.png


나는 여기서 다시 묻는다. 기다림이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계절을 감각하는가. 장마전선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애플리케이션은 있지만, 장마를 기다리는 마음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예보는 정교해졌지만 예감은 사라졌다. 데이터는 늘었지만 기다림은 줄었다. 우리는 비가 내리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화면만 바라볼 뿐, 비가 오기까지의 시간을 견디는 법을 잊었다. 나는 가끔 대림이라는 오래된 말을 떠올린다. 오지 않은 것을, 오지 않은 채 기다리는 시간. 그 더딘 훈련이 사라진 자리에, 스콜 같은 장마가 대신 들어선 것은 아닐까.



다시, 하늘을 본다


작년 나는 비 오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젖음을 그리워했다. 올해는 갑자기 터지는 하늘 아래서 완만함을 그리워한다. 결핍과 과잉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끝내 같은 사실을 증언한다. 우리가 알던 장마는 이름만 남긴 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장마라는 말은 남을 것이다. 기상청은 내년에도 그 시작과 끝을 사후에 발표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품어온 감각은 해마다 낯설어진다. 늦게 오거나, 갑자기 오거나, 끝내 오지 않거나. 우리는 그 세 얼굴 사이에서 계절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향기를 잃은 시대일수록 기다림은 저항의 형식이 된다. 비가 다시 스며드는 속도로 오기를, 사람이 그 비를 느긋하게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란다.

ChatGPT Image 2026년 7월 9일 오후 03_17_15.png▲ 장마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다. ⓒ ChatGPT generated by PStphns


오늘도 나는 창문을 연다. 습기와 바람의 밀도를 가늠하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도착을 위한 시간이 아니다. 사라져가는 감각을 끝내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어쩌면 기다림이야말로, 이 매끄러운 시대에 우리에게 끝내 남은 마지막 거친 감각인지도 모른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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