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도 이미 디지털인데 왜 굳이 토큰으로 만들까?

디지털화(digitisation)와 토큰화(tokenisation) 차이

by박밤

안녕하세요, 카피바라 여러분! 행운의 편지 받고 와 주셨군요.

라이브 「카피바라가 토큰을 깨문 이유」, 바로 시작합니다!

오늘은 현장에 나와 주신 카피바라들뿐 아니라 채팅창에서 기다려 주신 분들도 정말 많네요. 그럼 첫 질문부터 받아 보겠습니다.


"주식은 이미 앱 안에 있잖아요.
종이도 아닌데, 대체 뭘 또 토큰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아주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바로 앞, MTS 앱을 흔들어보이는 카피바라가 예민해 보이는 건 제 기분 탓이겠죠.

하필 고점에 들어가 물린 카피바라... 아니고 나...


주식은 이미 디지털입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출근길, 지하철에서 MTS 앱을 엽니다. 눈여겨 보던 종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네요. 찾아보니 호재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분야가 미래의 먹거리이자 필수재라더니, 아 잠시만요! 불과 몇 분 만에 오름세가 장난 아닙니다. 분할매수는 개미가 갖춰야할 기본 자세이지만, 개미라고 이 상승세를 놓치란 법 있나요? 어쩐지 다급해져 손가락 몇 번 터치로 예수금 전액...을 털어 매수합니다. 체결되기까지 종이 한 장 오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9년 9월 전자증권제도가 시행되면서, 상장회사 주식은 아예 종이 주권 없이 전자 기록으로만 존재하게 됐습니다. "금고 속 주권 다발"은 옛날 아버지들이 그랬다더라와 같은 카더라 개념마냥 남았습니다.


그러니 카피바라의 말이 맞습니다. 주식은 이미 디지털입니다. 디지털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렇게 손가락 몇 번으로 경거망동하지도 않았을 거고, 고점에 물리지도 않았을텐데요. 지금도 충분히 주식은 디지털인데 왜 세계의 큰 금융기관들이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토큰화를 하겠다고 나설까요?


답을 찾으려면 질문을 하나 바꿔야 합니다. "주식이 디지털인가?"가 아니라 "내 주식은 지금 어디에 적혀 있나?" 입니다.


"내 주식은 MTS 앱 안에 있는 거 아니에요?"


앱에 "삼성전자 1주 보유"라고 뜹니다. 그런데 그 1주는 앱 안에 있는 게 아닙니다. 앱은 증권사 장부를 보여주는 창문일 뿐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이렇습니다.


증권사는 "이 고객이 이만큼 가지고 있다"는 장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예탁결제원은 "이 증권사의 고객들이 모두 합쳐 이만큼 가지고 있다"는 장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행회사는 배당이나 주주총회를 위해 주주명부를 받아 봅니다.


내 삼성전자 주식 1주에 대한 기록이 여러 기관의 장부에 나뉘어 적혀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이 장부들은 서로 끊임없이 맞춰 봐야 합니다. 우리가 주식을 팔고 바로 돈을 출금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방금 매도한 주식에 대한 돈은 이틀 뒤에야 진짜 내 돈이 됩니다. 이틀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여러 기관이 서로의 장부를 확인하고 맞추며 "체결"과 "결제"의 절차가 이루어집니다.


체결: "이 가격에 사고팔자"는 약속이 성립하는 순간입니다. 앱에 "체결 완료"가 뜨는 때죠.

결제: 그 약속대로 돈과 주식이 실제로 주인을 바꾸는 순간입니다. 한국 주식은 체결일로부터 영업일 기준 이틀 뒤입니다. 월요일에 사면 수요일에 결제됩니다.


그럼 왜 바로 다른 주식은 살 수 있나요?


그 이유는 새로 산 주식도 이틀 뒤에 결제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에 A를 팔고 B를 샀다면, A를 판 돈이 들어오는 날과 B를 새로 산 값을 내야 하는 날이 둘 다 수요일입니다. 날짜가 맞으니 증권사가 "어차피 수요일에 서로 상계된다"고 보고 주문을 허용해 주는 거죠. 반면 출금은 지금 당장 진짜 현금을 은행으로 내보내는 일입니다. 아직 결제되지 않은 돈은 내보낼 수 없으니 이틀을 기다려야 합니다. 즉, 지금의 주식은 디지털이긴 하지만, 종이 시절의 구조를 그대로 화면으로 옮긴 것에 가깝습니다. 종이 장부가 전산 장부가 됐을 뿐, 장부가 여러 개이고 서로 맞춰야 한다는 구조는 그대로입니다.


여기서 주식을 토큰화하면 어떻게 될까요? 앱은 이미 "판 돈이 있다"고 보여주는데, 실제로 돈이 내 것이 되는 건 이틀 뒤니까 사실 화면 속 기록과 실제 소유 사이에 이틀의 간격이 있는 거잖아요. 토큰화는 바로 이 간격을 줄여줄 수 있습니다.




스캔한 지도와 내비게이션


종이 지도를 스캔해서 PDF로 만들었다고 해 봅시다. 이제 지도는 디지털입니다. 휴대폰으로 볼 수 있고, 친구에게 보낼 수도 있고, 확대도 됩니다. 하지만 이 지도는 여전히 보기만 하는 그림입니다. 길을 잘못 들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게 디지털화입니다.


내비게이션은 다릅니다.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길을 잘못 들면 다시 경로를 찾고, 막힌 길은 아예 안내하지 않습니다. 지도가 스스로 일을 합니다. 이게 토큰화에 가깝습니다.


토큰이 되면 구체적으로 세 가지가 바뀝니다.

기록이 있는 곳 : 기관마다 따로 갖던 장부가,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보는 하나의 공유 장부가 됩니다.

기록에 담기는 것 : "누가 몇 주를 가졌다"는 사실에 더해, "누가 살 수 있다", "배당은 언제 자동으로 준다" 같은 규칙까지 담깁니다.

기록이 움직이는 방식 : 여러 기관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장부를 고치는 대신, 토큰이 장부 위에서 직접 주인을 바꿉니다.


즉, 토큰화(tokenisation)는 자산에 대한 권리와 규칙을,
스스로 실행되는 공유 장부 위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권리: 토큰이 되는 건 물건이 아니라 권리입니다.

공유 장부: 기관마다 따로 갖던 장부를 함께 봅니다.

규칙 실행: 기록이 조건에 따라 스스로 움직입니다.


화면으로 옮기기만 하면 디지털화, 위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토큰화입니다. 카피바라 말대로 주식은 이미 디지털입니다. 하지만 아직 스스로 '일하는' 디지털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토큰화가 마법은 아닙니다. 삼성전자 주식을 토큰으로 만들어도 그건 여전히 삼성전자 주식입니다. 회사의 가치가 오르지도 않고, 갑자기 더 안전해지지도 않습니다. 토큰화는 자산을 바꾸는 기술이 아니라, 자산을 적어 두는 장부를 바꾸는 기술이니까요.



아, 방금 어떤 카피바라가 채팅으로 문의주셨습니다.

"그럼 내 아파트도 토큰이 될 수 있어요? 집을 NFT로 만든다는 거예요?"

이때 토큰이 되는 것은 아파트일까요, 아파트에 대한 권리일까요?


오늘 라이브는 여기까지! 다음 라이브에서 깨물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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