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문동 봉주르 아파트 1부: 아파트 재건축 전
“투표 결과는 총 여덟 명 참석, 회장을 제외한 일곱 명 투표 결과로 찬성 두 표, 반대 네 표, 무효 한 표로 ‘부결’되었습니다!”
땅땅땅!
“너거 완전 미친 거 아이가? 소장이 횡령을 했다 카는데도 이걸 부결시키나? 미칫나!”
“당신들도 다 한패지? 이거 개판이 따로 없네!”
방청객에 앉아 있던 진절희와 유별라는 눈을 뒤집으며 소리를 질렀다.
“쫌 조용히 해라! 지금 동대표들 회의 시간인 거 모리나? 방청객이면 조용히 방청을 하라꼬!”
지건만이 맞받아 소리를 지르자, 명백화가 되받아치려는 걸 정한이 눈짓으로 참으라는 표시를 보냈다. 낮에 열린 회의라 지훈이 학교에 가고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부결이었지만 정한은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부결될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얻은 게 있었다. 박지새는 마치 정한의 앞에선 같은 편인 거처럼 하더니 투표 결과, 박쥐 같은 인간이란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표가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은 한 장의 무효표라 할지라도 호언장담했던 찬성을 하지 않은 건 변함이 없었다.
“회장님, 이제 회의 끝난 거죠? 빨리 종료해주세요. 저 약속 있습니다.”
4동 대표 오들갑이 회의 종료를 독촉했다.
“잠시만요. 한 가지 안건이 더 있습니다.”
정한의 말에 동대표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길게 걸리진 않을 겁니다. 바로 안일해 대표이자, 이사에 대한 해임 투표 건입니다.”
동대표를 비롯해 방청객에 있는 어벤저스까지 모두 들썩이기 시작했다.
“다들 아시다시피 안일해 대표는 동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지하주차장의 공용부지를 불법적으로 사용하여 입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에 따라, 1동 대표이자 이사 안일해 님에 대한 동대표 및 이사직 해임 투표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요, 회장님. 그건 회의 안건에 없었잖습니까? 그런데 동대표 해임처럼 중요한 안건을 사전 안건에도 없이 진행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오들갑이 눈을 부라리며 강하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임시회의 안건 목록에 보시면 ‘기타 안건’이라고 보이시죠? 이게 바로 기타 안건 중 하나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게 어떻게 ‘기타 안건’입니까?”
오들갑이 말꼬리를 잡고 계속 따지고 들자, 정한은 안경을 벗고 한숨을 토했다.
“후. 저기요, 오들갑 대표님. 여기 회장은 접니다. 제가 진행자라는 말이에요. 기타 안건이 뭔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회의 진행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하지 마세요. 월권입니다.”
“Ye s , He is a chairman. 언더스탠.”
레이첼의 언더스탠과 정한의 혹한기 겨울 칼바람 같은 눈빛이 함께 들이닥치자, 오들갑은 부라린 눈을 돌리며 불만이 가득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이어서 말씀드리자면, 감히 입주민대표회의 자리에서 지건만 대표님과의 다툼까지 있었고, 회의에 연속으로 참석하지 않는 점 등을 미루어 동대표와 이사를 지속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 동대표님들의 생각을 투표로 여쭙고자 합니다. 만약 가결되면 정당한 절차를 거쳐 해임하고 이사는 여기 계신 동대표님들 중에서 새로 선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는 동대표 자격이 없는 기라! 창고로 을매나 속을 마이 썩였노? 느그 저번에 다 봤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섀끼가 한참 행님인 내한테 눈깔 디비가 지랄 떠는 거! 회장 말 잘했다. 고마 확 잘라뿌자!”
그랬다. 이 긴급 임시회의의 주목적은 배 소장의 해임 건이 아니라 바로 안일해의 해임 건이었다. 정한은 이 히든카드를 모두 에게 꽁꽁 숨기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내밀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사전 모의를 할 수 없도록, 그 누구도 이 판을 쥐고 흔들지 못하도록 말이다. 다행히 정한이 그린 밑그림에 지건만이 확실히 색깔을 칠해주었다. 정한은 요 며칠 사이 지건만에게 ‘이사직’을 들먹이며 일부러 그를 자극해왔다. 박지새 이사는 내 보낼 명분도 없거니와 그래도 회장 정한의 추천이라 어쩔 수 없지만, 안일해는 지하창고로 내보낼 명분도 있겠다, 저번 싸움으로 미운털도 박혔겠다, 내보내면 입주민들에게 칭찬도 받을 수 있는 지건만에게 있어서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회장, 고마 빨리 투표하자! 여기 남은 종이에 하면 되제?”
지건만이 투표를 서두르자, 나머지 대표들은 뜬금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지건만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1동 대표님 해임 안에 대한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총 일곱 명 투표, 찬성 일곱 표로 만장일치 통과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안일해 동대표의 해임안은 가결되었습니다!”
땅땅땅!
방청객에 앉아 있던 어벤저스는 ‘이게 무슨 일이지?’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지만, 어쨌든 그들에게도 눈엣가시 같은 안일해를 해임한다는 건 좋은 결과임은 분명했다. 정한은 히든카드가 통했음에 혼자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니, 회장님. 안일해는 갑자기 왜 해임을 시켰어요? 이건 또 무슨 반전이야……. 회의 방청이 아니라 무슨 반전 영화 관람인 줄 알았다니까!”
“내 말이! 회장님 갑자기 안일해 해임이라니? 이건 뭐라예?”
명백화와 진절희가 번갈아가며 상기된 표정으로 정한에게 말했다.
“놀라셨죠? 저는 오늘 얻을 거 다 얻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작 중요한 배 소장 해임안은 부결됐는데…….”
“여기서 얘기하기는 좀 그렇고 우리 청학 북카페로 갈까요?”
“저. 저도 가도 될까요?”
회의실을 빠져나오는데 레이첼이 회의실 입구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그럼요, 당연히 가능합니다.”
정말 환영하는 미소로 정한이 답하자, 어벤저스도 미소로 응하며 레이첼을 반겨주었다. 레이첼의 참여로 다섯 명이 된 어벤저스는 정한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회장님, 빨리 얘기 좀 해보세요. 갑자기 안일해 해임은 다 뭐예요?”
“제 전략이었습니다.”
“네?”
정한의 ‘전략’이었단 말에 어벤저스는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두리번거렸다.
“오늘 긴급 임시회의는 겉보기엔 배 소장의 해임이 주목적으로 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저의 주목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설사, 배 소장의 해임이 가결된다 해도 노동법상으로 해임 못 하는 거 아시잖아요? 아무 효력이 없는 투표죠. 하지만 전 이 투표를 통해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서는 찰떡같이 해임 안에 찬성하겠다고 했던 지건만 대표는 역시나 반대를 했고요. 긴가민가했던 박지새 대표 역시 어제 통화에서 저에게는 당연히 해임해야 한다고 큰소리 쳐놓고 반대를 했지요. 이거 보세요. 박지새 대표가 얼마나 박쥐 같은 인간인지를…….”
정한은 핸드폰에 있는 문자를 어벤저스에 보여주었다.
—회장님, 어쩌다 이게 부결됐는지 참 답답하네요. 안타깝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박지새가 정한에게 보내온 문자 내용이었다.
“본인도 반대표를 던져놓고 마치 아닌 것처럼, 자신도 안타까운 것처럼 방금 저에게 문자를 보내셨네요.”
“진짜 야비한 인간이네! 사실 내도 박지새는 잘 몰라가 어느 쪽인지 궁금했거든요. 정말 믿을 인간 하나도 없다. 그 인간들 다 한통속이야!”
진절희가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를 삼켰다.
“어쨌든 이 투표로 박지새 대표도 그쪽이라는 게 확인됐어요. 그리고 안일해 대표 해임 건이 오늘의 제 히든카드였습니다. 죄송해요. 여기 계신 분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건 정말 아무도 모르게 제가 허를 찌르고 싶었습니다.”
“근데 회장님, 동대표는 입주민 선출직이라 이렇게 해임이 안 될 텐데요?”
“네, 압니다. 저의 목표는 안 대표의 해임이 아니라 그들의 결속력을 헤집어놓기 위함이에요.”
질문한 유별라부터 모두가 정한의 대답에 또 어리둥절해했다.
“저들끼리 지금까지 죽이 아주 잘 맞아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지하창고 때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안 대표와 지 대표는 회의 때 크게 싸우기도 했죠. 때문에 안 대표는 회의에 계속 불참 중이고요. 이런 와중에 지 대표는 이사직 연임을 못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 자신을 추천할 줄 알았던 안 대표가 되려 이사를 하겠다고 나와버렸죠. 지 대표는 지금 여기에 엄청난 불만이 있습니다. 아까 보셨죠? 지 대표가 나서서 해임 안 투표 빨리하자고 서두르는 거. 게다가 만장일치로 해임에 찬성이 나왔어요. 이 소식을 안 대표가 듣는다면 어떨까요?”
“안 대표, 그 불같은 성격에 웃짱 까고 나오겠는데요!”
유별라가 손뼉을 마주 치며 기뻐했다.
“바로 그겁니다. 그들끼리 싸우게 될 거예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이제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노리게 될 거라는 거죠. 두고 보세요. 집 안에 불은 났고, 이제 이 불이 누구 탓인지 싸울 테니까요. 불을 끌 생각부터 하지 않고 누가 불을 냈는지 싸우다 결국 다 타 죽을 겁니다.”
어벤저스는 정한이 히든카드의 전부를 펼쳐 보이자, 모두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잠깐만요. 저도 한마디 해도 될까요?”
오늘 처음 합류한 레이첼이 수줍게 손을 들자, 모두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 사실 회장님이 너무 젊어서 이분들을 다 끌고 나갈 수 있으려나 걱정했었거든요. I’m worried about it. 그런데 오늘 더 걱정돼요. 너무 잘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언더스탠?”
레이첼의 농담 섞인 한마디에 모두 빵 터지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정한이 던진 히든카드는 이미 안일해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회장님, 대박이에요!”
다음 날 아침, 정한이 전화를 받자마자 진절희가 들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안일해가……. 양심선언을 하겠답니다!”
“양심선언이요?”
“네, 회장님의 작전이 정말 제대로 먹혔쓰예. 자기 해임하자고 찬성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한 짓 다 까발리겠대요! 지 혼자 안 죽을 거라며 좀 전에 저한테 전화 와가 씩씩거리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입니까. 큭큭!”
수화기를 들고 있는 정한도 씨익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게다가 더 대박인 게 뭔 줄 아세요? 저한테 녹취 파일도 이미 보내왔다 이겁니더! 자기는 일 때문에 모든 통화를 자동으로 녹음해두는데 예전에 지건만이나 배 소장이랑 통화한 내용도 다 있다면서 몇 개를 보내줬는데 정말 가관이라예. 그라고 곧 회장님께 직접 전화한대요. 양심선언 할 테니 자기는 정상참작 해달라나? 웃기제, 증말!”
진절희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전화가 걸려 왔다.
“회장님, 나 안일해요.”
“네, 안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시방 이게 뭔 일이다요? 어제 나 동대표 잘라분다고 나 없는데 투표까지 해불고 게다가 만장일치라고라? 왐마, 회장님. 지요, 억울해서 가만 못 있것소. 나가 지금까지 그 인간들한테 먹인 술이며 밥이며, 에어컨도 원가만 받고 달아줘불고, 아파트에 뭐만 생기면 나헌티 오라, 가라 함서 부려먹을 땐 언제고 인자 나만 세상 쓰레기 같은 인간으로 만들어불고 나가라고요? 이래불면 나만 못 죽제!”
“안 그래도 억울하실 거 같았습니다. 막말로 지하창고도 자기들이 계약까지 해준 거 아니에요? 그래놓고 이제 와서 안 대표님만 욕하는 건 좀 아니죠. 사실 저도 어제 만장일치 나온 거 보고 깜짝 놀랐어요. 다들 안 대표님이랑 오래 알고 지내셨고 꽤 가까운 사이 같았는데, 좀 충격이었습니다.”
“지는요, 지금 울화가 치밀어서 일도 못 하것소. 회장님, 나가 시방부턴 양심선언 할랍니다. 그 인간들이 지금까지 한 짓거리랑 배임각이 그 느자구없는 시키가 어떤 인간인지 지가 다 말헐라요!”
“안 대표님, 정말 지금 마음 안 좋으시겠어요. 사람에 대한 배신감, 그거 진짜 아픈 건데. 일단 진정하시고…….”
“나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인자부터 지는요. 이 폰에 있는 수많은 녹취 파일 다 까불고요. 추잡한 인간들 짓거리도 다 까발리렵니다. 지도 잘한 거 없응께, 동대표에서 물러나고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아따, 사나이 한 입으로 두말한다요? 회장님, 나 못 믿소?”
“아뇨, 아뇨. 전 믿습니다. 다만 안 대표님이 걱정돼서 그래요.”
“제 걱정은 접어두쇼. 지도 지금까지 겁나게 찝찝했는데 이참에 다 털어불랍니다. 지하창고도 싹 정리해불고요!”
“좋습니다. 그럼 저도 안 대표님 돕겠습니다. 우리 아파트 더 잘되도록 함께 도와주세요.”
“근디…… 부탁 쪼까 해도 될란가 모르것네요.”
“그럼요. 뭐든지 말씀하세요.”
“지는 나중에 양심선언자로 입주민들한티 명예 회복 좀 시켜주십사 부탁 좀 드리것소. 안 그래도 지하창고 땀시로 주민들헌티 욕을 하도 먹어부러서 우리 집사람도 얼굴을 못 들고 다니고 아들 볼 면목도 없어붑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아파트를 위해 양심선언까지 해주시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양심선언, 그거 쉬운 거 아닙니다.”
“고로코롬 생각해주시면 참말로 고맙소잉. 그라믄 회장님한테 적극 협조해불라요. 인자 아파트를 위해서 지대로 도와보것소!”
“좋습니다. 조만간 만나서 자세한 얘기 나누시죠.”
정한의 히든카드가 먹히자 일이 쉽게 풀리기 시작했다. 사실 어떤 비리를 캐고 밝힌다는 것은 내부고발이나 양심선언 같은 것이 없이는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제공하겠다는 증거가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정한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맡게 된 아파트 회장이 그를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회장을 맡자마자 이런 일에 휩싸이는 것 같아 그를 안쓰럽게 여기는 어벤저스였지만, 정한은 이런 상황을 오히려 즐기기 시작했다.
--------------------------
JTBC 드라마 <아파트>와 소설 <삼문동 봉주르 아파트>가 대한민국 절반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더 투명하고 살기좋은 아파트로 만드는 데 힘이 될 수 있길. 오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