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허도숙 씨는 마음이 헛헛했다

by오싹
인명과 지명, 상호는 모두 가상의 이름입니다. 매 회차 첫 번째 이야기는 제가 여러 온라인 게임에서 겪은 실화이며, 두 번째 이야기는 빌런의 사연을 지어낸 픽션입니다.


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언제 마지막으로 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아이엠그라운드.

아마 첫 기억은 초등학교 때 걸스카웃에서 어딘가를 가는 버스 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활발하게 잘 노는 언니들이 버스 뒷자리에 앉았고 그들이 무릎을 치는 동작을 하며 흥얼거리는 멜로디로 처음 접했던 것 같다. 덴티큐를 외칠 때 왜 상큼한 표정으로 경례를 하는지, 다리 밑에 미친년이라는 닉네임으로 자신을 소개한 언니는 왜 그리 모두의 열광을 받는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지만, 그건 여러 방식으로 변주되어 지금도 여러 예능에서 여전히 등장하는 게임 중 하나더라.


하지만 요즘처럼 지쳐있을 때에는 게임으로도, 실제로도 새로운 사람에 대해 소개받고 싶지 않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자기소개가 툭툭치고 들어올 때가 하루에도 두세 번은 있다. 바로 고객 전화를 받을 때이다.


"감사합니다 클린짱입니다."

"어우 아가씨 전화받아줘서 고마워요. 연결이 잘 안 돼서 몇 번 걸었다우."

"그러셨군요. 통화 연결에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어우 아니에요. 죄송은. 호호호호."

"사용 중이신 모델명과 불편 증상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니 이 제품이 우리 첫째 애가 사준 거거든요?"


옆에서 누군가 정정해 주는 듯한 말이 들렸다.


"아 둘째 수진이가 사줬나? 아, 그랬어? 호호호 아니 우리 둘째가 사줬다네요. 걔가 미국 가는 길에 엄마 힘들지 말라고 무선 청소기로 사준 건데 -"

"아.. 그러셨어요? 그럼 증상이.."

"아니, 애가 사준 거니까 나는 애지중지하느라 몇 번 안썼그든요..? 애기가 사주니까 얼마나 귀해요.. 그 마음이 귀하잖아요. 그쵸?"

"아, 네.. 그러셨겠네요.. 몇 번 안 쓰셨는데 지금은 어떤 증상으로 불편하신 거예요?"

"아 이게 있잖아요. 청소기가 힘이 없어요 힘이.. 애가 요새 제일 좋은 거라고 사줘서 난 너무 고맙게 받았는데.."

"힘이 없는 거면, 쓰다가 꺼지는 증상이던가요?"


내 말이 끊기는 느낌, 남의 말을 끊는 느낌 둘 다 유쾌하진 않다. 하지만 이 분의 사연을 다 들어드리면 20분은 족히 넘기는 통화를 할 것 같았다. 겨우겨우 주제로 돌려놓으면 또 딸 얘기, 겨우 증상 얘기로 돌려놓으면 또 아들 얘기를 하고, 차라리 한참 얘기를 들어드렸어야 했는지, 더 이상 할 말이 생각 안 날 때까지 들어드렸어야지 AS접수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말로 들었을 때 만으로는 원인 파악이 어려워서 영상을 받아야만 하는 증상으로 접수한 고객이 있었다. 심지어 무턱대고 무상 반품을 원하는 것이었다. 절차에 대해 설명하고 접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수에 대해 안내하고 있는 데 고객이 말했다.


"저기요. 홍길동(가명) 알아요?"


기본 상식이 있는 성인이면 다 알만한 이름이었다.


"네, 수박마을 시장 말씀이신가요?"

"그래요. 내가 그 홍길동 고모 되는 사람이에요!"


마음속으로 꽤나 커다란 물음표와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고모라고 하면서 성도 달랐고, 성은 그렇다 치고, 진짜 본인이 시장의 고모면 오히려 요즘처럼 전화가 다 녹취되는 세상에 언행을 조심해야 하지 않나? 전혀 진위여부 확인도 안되고 궁금하지도 않은 가족관계에 대해 알게 된 하잘것없는 통화였다.


사람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이상, 서로 부대끼고 알아가는 건 중요하지만 최소한 고객과의 통화는 용건만 간단한 게 베스트라고 생각한다.




허도숙 씨는 마음이 헛헛했다

도숙 씨는 친구들을 만나면 칭찬처럼 듣는 인사말이 있었다.

"어유 숙아, 너는 참 좋겠다. 애들 다 키웠잖어. 한 명은 외국 가서 자리 잡고, 한 명은 교수에 결혼해서 손주들도 예쁘고..."

"다 키우기는.. 그래도 내 눈엔 애들이라 걱정되고 마음 쓰이고 그렇지 뭐.."

"둘 다 안정적이니까 돈 걱정도 별로 없지 않니? 효자들이야 증말.."

"호호.. 그렇지 뭐.. 애들 착하고.."


그러면서도 도숙 씨는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예쁘고 착한 아이들. 맞다. 효자. 그것도 맞다. 그런데 품 안의 자식이던 그때와 비교하면 소식 듣기가 너무 어려웠다. 특히 외국에 있는 큰 애는 연락이 통 어려웠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희소식이 희소식이지 어떻게 무소식이 희소식일 수 있단 말인가.


친구들은 덮어놓고 자신을 부러운 사람으로 정해놓았다 보니 오히려 친구들에겐 속내를 다 꺼내기가 힘들었다. 도숙 씨의 수다 상대는 놀이터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는 아가씨, 고객센터에서 전화받아주는 젊은이들, 손님 뜸한 식당의 사장님 등 친분이 없던 사람들이 대상이 되었다. 푸념 한 번 하면서 서운한 마음을 해소하는 것이다.


집을 치우려고 청소기를 손에 쥐는 순간 딸깍딸깍 버튼 소리만 나고 잘 되지 않았다. 미루다 미루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어쩐지 넋두리를 좀 들어줄 것 같은 목소리였다. 이 청소기가 어떻게 우리 집에 오게 되었는지부터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 처음엔 들어주는 것 같더니 조금씩 도숙 씨 말을 끊는 것이 아닌가. 여러 사람을 붙잡고 얘기해 본 도숙 씨는 눈치가 빤했다.


'에그.. 이 아가씨는 들어줄 생각이 없나 봐..'

결국 쫓기듯이 접수를 하고 전화를 끊고서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헛헛한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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