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는 제로웨이스트라는 말이 없었다

by올리브맘

수박 한 통을 먹고 나면 늘 숙제가 남는다.

빨간 속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금세 먹어치우는데 두꺼운 껍질은 수북이 남는다. 먹은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많아 보일 때도 있다.


우리 집에는 음식물 처리기가 있다. 웬만한 것은 넣으면 되지만 수박 껍질은 두껍고 부피가 커서 한꺼번에 들어가지 않는다. 작게 잘라 몇 번에 나누어 넣어야 한다. 그 일을 할 때마다 마음이 조금 걸린다.엄마가 수박 껍질로 반찬을 만드는 것을 보고 자란 나는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빨간 속을 다 먹고 나면 엄마는 초록색 겉껍질을 얇게 벗겨 냈다. 남은 흰 부분을 썰어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꼭 짜고 양념에 무쳤다.아삭하고 새콤했다. 어린 나는 그것이 수박을 먹고 남은 것으로 만든 음식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여름이면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 가운데 하나였다. 엄마라면 버리지 않았을 것을 나는 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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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냉장고가 없었다.

장을 보면 그날 먹을 것을 샀고 음식을 하면 그날 먹었다. 많이 만들어 며칠씩 두고 먹을 수도 없었다. 여름에는 더 그랬다. 서울의 여름은 덥고 습해서 음식이 금방 상했다. 엄마는 여름이면 반찬을 많이 만들어 두지 않았다. 강된장을 만들고 상추를 씻어 소쿠리에 수북하게 담아 놓는 날이 많았다. 밥 한 숟가락에 된장을 조금 올려 상추에 싸 먹었다. 별것 없는 밥상이었지만 맛있었다. 그리고 한 끼가 끝나면 음식도 거의 끝났다.


냉장고가 우리 집에 들어온 뒤 생활은 편해졌다.

먹다 남은 음식을 다음 날까지 둘 수 있었고 여름에도 우유를 보관할 수 있었다. 그러다 냉장고는 점점 커졌다. 냉동실이 넓어졌고 김치냉장고가 생겼다. 요즘은 냉장고와 김치냉장고에 냉동고까지 따로 두고 사는 집도 있다.


저장할 곳이 많아지자 사는 것도 많아졌다. 두 개를 사면 하나가 더 싸다고 해서 두 개를 사고, 배송비가 아깝다며 하나를 더 담는다. 당장 먹지 않아도 걱정이 없다. 냉장고에 넣으면 되니까. 그러다 잊는다. 냉장고 맨 아래에서 물러진 오이가 나오고, 서랍 구석에서 시든 깻잎이 나온다. 냉동실 깊숙한 곳에서는 언제 넣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봉지가 나온다. 먹으려고 돈을 주고 산 것들을 나는 버린다. 돈이 아까운 것보다 먹을 수 있었던 것을 먹지 않고 버렸다는 사실이 더 아깝다.


엄마가 살던 시대에는 먹을 것이 귀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자랐고 아껴 쓰는 것을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세상이 풍요로워지면서 나도 변했다. 먹고 싶은 것은 언제든 살 수 있었고 남으면 냉장고에 넣으면 되었다. 오래되면 버리고 새것을 사면 되었다. 나는 그 편리함을 누구보다 잘 누렸다. 그러는 동안 엄마가 하던 일은 조금씩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수박 껍질을 무쳐 먹었다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요즘 여름은 내가 어릴 때 알던 여름과 다르다. 뜨거운 날이 길어진다. 한낮에는 밖에 나서는 것조차 망설여지고 밤이 되어도 열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이런 여름을 지날 때면 우리가 너무 많이 만들고 너무 많이 사고 너무 쉽게 버리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면 손주 이야기를 자주 한다. 동생에게도 손주가 생겼고 머지않아 우리 아들도 아이를 낳는다. 내가 살아갈 날보다 그 아이들이 살아갈 날이 훨씬 길다. 내가 떠난 뒤에도 세상은 남는다. 내 아이들이 살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또 살아간다. 그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조금이라도 성한 채로 건네주는 일. 먼저 살아본 사람에게 그런 몫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엄마가 살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덜 사고, 있는 것을 먼저 먹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버리지 않으려 한다.


얼마 전 수박을 한 통 샀다.

이번에는 흰 부분을 버리지 않았다. 초록색 겉껍질을 얇게 벗겨 내고 흰 부분을 채 썰었다. 소금을 뿌려 잠시 절였다가 물기를 꼭 짰다. 고춧가루와 파, 식초와 액젓을 조금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한 접시의 반찬이 되었다. 한입 먹어 보니 엄마가 해 주던 맛과 꼭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삭한 식감은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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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껍질 한 접시를 먹는다고 지구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냉장고 속 음식을 하나 덜 버린다고 세상의 음식물 쓰레기가 눈에 띄게 줄지도 않는다. 그래도 나는 이제 이 일을 한다. 엄마는 지구를 생각해서 수박 껍질을 무친 것이 아니었다. 환경을 위해서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무엇을 아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먹을 수 있으니 먹었고 아까우니 버리지 않았다.


나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면서 한동안 그것을 잊었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배운다.

엄마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았다.

제로웨이스트라는 말도 모르면서.

아니, 엄마에게는 그런 말이 필요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그것은 그저 살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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