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난다고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영화 [경주기행]

by오래된 도서관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도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여름밤. 가족들과 떠난 캠핑장에서 불을 켜 놓고 캠핑을 즐기는 중 손바닥만 한 나방이 빛을 보고 날아들면, 끓이고 있는 라면 주변까지 접근하기 전에 일격에 쳐내는 냉철한 엄마도 있겠지만, [경주기행]의 엄마는 나방을 쫓으려 크게 수건을 채찍처럼 휘두르다 라면 냄비를 엎을 것 같은 캐릭터다.
살아온 경험치가 있으니 어설프게 쫓아내기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한 방에 보내주는 것이 나방에게도, 라면 끓기를 기다리는 딸들에게도 좋은 결말이라는 것을 모를 리는 없다.
하지만 어쩌라고? 알아도 못 하는 것을.

영화 속 엄마는 그 '알지만 못 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기로 한다. 끓이던 라면냄비 엎게 한 나방은 그저 내 탓이다 하고 넘어갈 사람이라고 해도, 내 막내딸을 죽게 한 그 '죽일 놈'이 멀쩡히 길을 활보하고 다니는데,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없다.
과연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는 생각해 볼 것조차 안 된다.

"이미 쓰레기처럼 봉투에 둘둘 싸서 차에 싣고 떠나지 않았나."

예고편을 보면서는 살기등등한 여자가 넷씩이나 뭉쳐서 고작 '죽일 놈' 하나 제대로 못 잡고 놓치는 것이 답답했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도 없던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벌레 한 마리 못 죽인다는 엄마가 막내딸을 해한 놈을 벌레만도 못한 놈으로 생각하기로 했지만, 마음먹었다고 손발이 전문가처럼 움직여주는 것은 아니니. 게다가 눈 딱 감고 죽이려는 그날, 내 마음이라도 몸 보다 잘 다스려지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넘어야 할 내적 갈등도 '황남대총'만 했겠지.
이러니 안 하던 짓을 하는 사람은 몸도 마음도 엉성하기 마련이다.
네 모녀가 '죽일 놈'과 함께 떠난 [경주기행]은 얼기설기 엉망으로 맞물려서도 용케 돌아가는 톱니바퀴 모양인 것은 그래서 이해가 간다.

하지만 자식 잃은 엄마의 들끓는 상황까지 이해하고 나면 다음 질문이 발목을 덜컥 잡는다. '만약'을 상상하기도 싫은 설정이지만 내가 저 엄마라면 저 '죽일 놈'과 함께 떠날, 죽여주는 여행길에 딸들을 데리고 갔을까?
이 영화에서 세 딸이 모두 이 경주행 승합차에 탄 이유는 내 상상력의 범위 내에서는 두 가지 가설이 생긴다.
우선, [친절한 금자 씨]와는 다르게 머리를 식히고 와신상담할 13년의 복역기간도 없이 철창 밖을 활보하고 다니는 '죽일 놈'을 마주해 무턱대고 일을 저지른 상황. 엉성하고 살기등등한 엄마는 평소와 달랐을 테고, 딸들이 차례대로 이상해진 엄마의 동선으로 말려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가능성으로는, 애초에 저 '죽일 놈'을 때려잡아 차에 싣고 온 것이 딸들 중 한 명이었고 되려 엄마가 뒷수습을 하러 따라나섰을 수도 있다.
물론 처음부터 네 모녀가 머리를 맞대고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정도의 생각할 만한 시간이 있다면 엄마 혼자 [경주기행]을 떠났을 것 같다.

'상상할수록 혈압이 오른다.'

영화 속 모녀들은 금자 씨보다 뜨겁고 엉성하다. 섣불리 '나라면 안 그럴 텐데'라는 말은 못 하겠다. 전쟁영화 한 편 보고 전쟁의 참혹함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복수라고는 새치기하는 사람들 뒤통수를 노려보며 '지옥문 앞에서도 새치기해라.' 하는 인터넷에서 본 밈이나 속으로 말해본 게 전부인 내 주제에 저들의 [경주기행]을 다 이해할 리 없다.
법이 해결해주지 않는 큰 영역 밖부터, 법을 들이밀기 하찮은 감정의 문제까지 복수가 만연한 것 같다는 생각도 문득 든다.
평소 상과 벌은 법에서 정하는 대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앞에 새치기하는 사람에게는 '지옥문...' 하는 혼잣말을 대뜸 하게 되듯 사람은 '내 일'이 되는 순간 주먹부터 꽉 쥔다. 법은 어제까지도 잘 지켜 왔는데, 오늘만 콱 때리고 내일부터 또 잘 지키지 뭐.
심지어 '내 손으로 직접 하는 복수'에 대한 야생의 감정과 복수의 재질은 상당히 잘 어울리기도 하다.
평범한 초식동물 같던 여자 넷이 차에 '죽일 놈'에게 주사를 놓고 비닐과 끈으로 잘 묶어서 고속도로를 탔다. 어찌어찌 제압하고 차에 싣는 고되고 심장이 두근두근 터질 긴장의 순간들이 지난 후 조용해진 차 안에서 이동 중인 장면.

이제부터 뭘 할 것인가?

영화 [조용한 가족]이라면 건조하게 어딘가에서 힘들다고 욕을 하며 땅을 파고 있는 장면이 이어질 것 같고, [악마를 보았다]라면 외진 건물 안에서 눈 뜨고 보기 힘든 장면이 이어질 것 같은데 엉성한 이 여자들의 다음 장면이 무엇일지가 궁금하다.
긴 이동 중에 어느 휴게소에서 쉴지를 얘기하려나?
복수하러 가는 길에도 화장실은 가야 할 테니.

불덩이 같은 복수심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후, 그 불덩이가 꺼지면 그녀들의 일상은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길이나, 긴 여행길에 만난 휴게소에 늘어선 간식들을 훑어보는 순간들이 그들의 [경주기행]과 철썩 붙어버려, 일상이 생경해지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르겠다.

그 '죽일 놈'은 막내 하나가 아니라 남은 가족을 모두 죽인 것이라는 것을 알고나 죽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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