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린 아내가 대단한 것인지, 20년을 돌아서라도 끝내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이 대단한 것인지 고르기도 힘들다.
온 세상의 괴수와 신까지 나서서 귀향을 막아서는 대서사를 뚫고 돌아온 집념에 점수를 더 줘야 할까? 집에 남아 아들을 지키며 몰려드는 청혼자들의 구애를 빙자한 위협과 맞선 아내의 강단에 더 점수를 줘야 할까?
전쟁 10년, 돌아오는 데 10년. 20년 동안 자리를 비운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는 자리를 비운 그 사이 몰려드는 귀족들 틈에서 페넬로페가 왕좌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만약 마눌님이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면 새로운 이타카 왕에게 오디세우스는 '죽어 마땅한' 불청객일 테니, 적대적인 괴수보다 고향이 더 위험한 곳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10년이 걸린 트로이 전쟁의 승전보가 들려오고도 10년을 돌아오지 않는 오디세우스에게도 말로도 다 못할 사정이 있었지만, 폰 꺼놓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어디서 뭘 하는지 알 리 없는 페넬로페는
"이 사람이 어디서 뭘 하느라 이 시간까지 안 들어와!"
하는 속아지를 부릴 틈조차 없었다.
동서양 어디건 왕비 자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어디서 뭘 하느라 안 오는지, 못 오는지 알 수 없는 남편을 기다리다 속이 터지는 아내이자 왕비, 페넬로페 입장에서 보면, 오디세우스나 그 외 108명의 청혼자 중 어느 '아무개'가 왕이 된다 해도 어차피 왕비는 페넬로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고지순한 사랑과 헌신으로 남편을 기다린 왕비라고만 보기엔 내 눈에 때가 너무 묻은 걸까?
20년 동안 비어 있던 것은 왕좌만이 아니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린 것은 시간만이 아니라, 왕을 지켜줄 군대이기도 했다.
이제 페넬로페가 쓸 수 있는 비장의 무기는, 미모. 그리고 전통이나 관습뿐.
그래서 일 손이 차고도 넘치는 궁에서 왕비 페넬로페는 굳이 손수 수의를 지었다가 풀었다 하는 필생의 버티기를 시작한다. 누가 왕이 되어도 그녀는 왕비지만, 오디세우스 외의 '아무개'가 왕이 되면 군대도 없고, 정치적 기반도 아직 없는 아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 장인 정신으로 실부터 뽑아 수의를 지을 수밖에.
아들의 안위를 건 첨예한 정치 수 싸움을 하던 페넬로페는 알 수 없었지만,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을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것을 알면, 온 세상의 풍파를 겪고 환향한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 손에 죽을 판이다.
물론 오디세우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20년을 버틴 엄마 앞에서 늘어놓는 영웅의 '대 서사시'는 주유소에서 라이터 불을 켜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괜히 포세이돈의 미움을 사서 10년을 돌아왔다는 거야? 그 객기로 트로이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던 최정예병들은 모두 잃으셨고?"
페넬로페가 나보다는 온화하기를 바랄 뿐.
하지만 무려 스파르타 왕족 출신인 페넬로페가... 아니 뭐...온화할 수도 있지.
어쩌면 오디세우스의 대서사시를 들으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수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까. 이 여인이 끝내 인내와 지혜의 대명사로만 알려져 있는 것은 마침내 돌아온 오디세우스를 공공연한 자리에서 쥐어박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교양? 교오양? 이게 내 교양이다."
이래서 왕족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 난 왕비는 못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