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콩, 다른 마을>

토종 씨앗, 문명을 묻다 10

by호시우행

시골 5일장의 시끄러운 장터 한쪽에 아낙들이 자루째 펼쳐놓은 콩 알갱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지인의 눈에는 한눈에 보아 모두 비슷비슷한 곡식으로 보인다. 저마다 '장콩'이나 '밥콩'이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불리고, 커다란 됫박에 수북하게 담겨 있으며, 한 끼의 구수한 밥이나 한 번의 정성스러운 장을 위해 사람들의 손으로 팔려 나간다.


그러나 평생 흙을 일구며 콩농사를 지어온 베테랑 농부는 시장 바닥에서 무심코 콩 몇 알을 손바닥 위에 집어 들자마자 그 미세한 결을 귀신같이 읽어낸다.


콩알이 정원형으로 동글동글한지 아니면 옆으로 슬그머니 길쭉한지, 겉껍질이 바위처럼 단단한지, 노르스름한 색조가 투명하고 고른지, 윤기가 오롯이 도는지를 깊이 살핀다. 손가락 끝으로 몇 번 또르르 굴려본 뒤에는 이 콩이 바람 잘 날 없는 어느 비탈밭에서 자란 것인지, 메주를 쑤기에 적합한지 아니면 밥에 놓아 먹어야 제맛이 나는지까지 순식간에 짐작해 내곤 한다.


손바닥 위 콩알 하나가 가진 외형적 차이는 사실 아주 미세하여 보통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수십 년 농사의 현장에서 이 작고 미세한 차이는 다가오는 해의 씨앗을 남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짓는 중차대한 이유가 된다.


밥에 넣었을 때 쌀과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콩이 있는가 하면, 푹 삶아 메주를 만들었을 때 깊은 발효의 풍미를 내뿜는 콩이 있다. 솥에 넣고 삶았을 때 무르고 부드럽게 성질을 풀어내는 콩이 있는가 하면, 오래도록 푹 졸여도 특유의 형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단단한 콩이 있다. 수확량은 눈이 부실 만큼 많지만 줄기가 가늘고 약해 가을철 장대비나 비바람이 불면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콩도 존재한다. 반대로 알갱이는 조금 덜 열릴지언정 무서운 콩굴파리나 병해충에 강하여 해마다 일정하고 안정적인 수확을 가져다주는 콩을 훨씬 더 귀하게 여기는 농민도 존재한다.


만약 완벽하게 동일한 어미 포기에서 수확한 콩 한 줌을 떼어내어,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골 마을에 똑같이 나누어 심는다고 가정해 보자.


출발선에 선 씨앗의 유전적 바탕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씨앗이 내던져진 두 마을의 밭과 환경은 결코 같을 수 없다. 한 마을의 밭은 모래가 적당히 섞여 물이 스르르 잘 빠지는 양토인 반면, 다른 마을의 밭은 진흙 성분이 많아 비가 한 차례 쏟아지고 나면 수분이 오래도록 축축하게 남는다. 한쪽 마을은 탁 트인 평야 들판 한가운데 있어 사계절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다른 쪽 마을은 오목한 산자락 아래 포근히 들어앉아 바람의 칼날을 비껴간다. 흙이 머금은 깊이도 다르고, 하루 동안 햇볕이 비탈면을 간지럽히는 일조 시간도 확연히 다르다. 한여름 낮의 낮기온과 서늘한 밤의 온습도 차이 또한 마을마다 미세하게 갈라진다.


동일했던 씨앗은 그렇게 서로 다른 생태적 조건 속에서 저마다의 생명을 시작한다. 농민은 밭둑에 서서 씨앗이 자라나는 매 순간의 모습을 정교하게 지켜본다. 줄기가 땅의 기운을 지나치게 받아 허공으로 웃자라지는 않는지, 잎사귀 뒷면에 검은 점무늬병이 번지지는 않는지, 보랏빛 꽃이 제절에 정직하게 피어나는지, 그리고 꼬투리가 가질 끝마다 얼마나 단단하게 달리는지를 유심히 살핀다. 여름철 장대비가 잔인하게 쏟아진 해에는 비바람에 맥없이 쓰러진 콩 포기가 농부의 가슴에 아프게 들어오고, 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극심한 가뭄이 들이친 해에는 기어이 바싹 마른 흙더미 속에서 끝까지 푸르름을 잃지 않고 버텨낸 콩 포기가 눈에 강렬하게 들어온다.


가을철 수확 낫을 들어 올릴 때가 되면, 두 마을 사이에는 또 다른 생태적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꼬투리 속 알갱이가 얼마나 찬찬하게 영글었는지, 낫질을 하거나 탈곡할 때 노동이 편한지, 콩알의 씨눈이 제대로 들어차 있는지 입체적으로 살피게 된다.


이처럼 최초에 완벽히 동일한 씨앗으로 출발했을지라도, 두 마을의 농민이 가을 마당에서 똑같은 씨앗을 골라 다음 해의 종자로 남겨둘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산간 지역에 위치하여 서리가 일찍 내리는 마을에서는 생육 기간이 짧아 서둘러 익는 조생종 콩이 절실하게 필요할 수 있다. 반면 평야 지대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성숙이 조금 늦더라도 수확량이 수년 동안 흔들림 없이 안정적인 콩이 훨씬 더 가치 있을 수 있다. 가을비가 유난히 잦은 골짜기 마을에서는 다 익은 뒤에도 꼬투리가 쉽게 튀어 나가 알갱이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 성질이 절대적이고, 물이 늘 부족한 건조한 마을에서는 타들어 가는 날씨를 이겨내는 가뭄 저항성이 최고의 선택 기준이 된다. 비탈진 작은 밭에서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고 곧게 서 있는 강인함이 중요하고, 넓은 평야 밭에서는 기계나 일손으로 한꺼번에 수확하기 용이한 형태가 농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농민은 수확한 콩 전체를 가을철에 한꺼번에 쏟아부어 종자로 남기지 않는다. 가족이 먹고 살아갈 양식과 다가오는 봄날 밭에 뿌릴 씨앗을 엄격하게 갈라낸다.


그리고 다가올 해의 씨앗이 될 낟알들 가운데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다시금 매서운 눈으로 살핀다. 알이 충실하게 꽉 찬 것만을 가려내기도 하고, 상처 입거나 병든 알갱이를 정밀하게 솎아낸다. 꼬투리의 형태가 튼튼한 포기만을 골라 남기기도 하고, 유난히 밭 한가운데서 무성하게 잘 자란 포기만을 따로 모아 정성스레 말려두기도 한다.


이 주체적인 선발과 판단은 해마다 찾아오는 날씨와 환경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다. 어느 해에는 장마가 길어 물에 강한 콩 포기가 눈에 들어오고, 그다음 해에는 지독한 가뭄 때문에 마른 밭에서 끝까지 견뎌낸 다른 콩의 잠재력이 눈부시게 발휘된다. 어떤 해에는 무서운 병충해가 돌고, 어떤 해에는 가을 수확기에 장대비가 몰아친다. 농민은 단 한 해의 단편적인 성과만 보고 씨앗의 운명을 조급하게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흙을 일구고 사계절을 통과하면서 자기 밭의 미세기후와 토양에 가장 잘 들어맞는 생명을 몸으로 알아간다.


“우리 밭에서는 참 이상하게도 이 콩이 제일 잘돼.”

농민이 무심한 듯 던지는 이 짧은 한마디 속에는, 무수한 세월과 계절의 서사가 묵직하게 들어차 있다. 언제 씨를 심었는지, 어느 해에 비가 무섭게 쏟아졌는지, 어떠한 병충해가 밭을 쓸고 지나갔는지, 수확할 때 날씨가 얼마나 서늘했는지,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던 해에는 수확하기가 얼마나 수월했는지에 대한 평생의 농업적 경험이 그 한마디에 밀도 높게 겹쳐져 있는 것이다.


농민들이 가진 이 위대한 현장의 지식은 문자와 숫자로 정교하게 기록되지 않는다. 하지만 종이 위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깊은 경험과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매년 정직한 밭에서 몸으로 얻어낸 성찰은, 어김없이 다가오는 해의 씨앗을 고르는 가장 엄정한 기준이 된다.


하지만 씨앗을 고르는 이 위대한 선발의 역사는 결코 밭둑 위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수확한 콩을 바구니에 담아 부엌으로 들고 와 가마솥에 넣고 푹 삶아보면, 밭에서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차원의 성질이 눈부시게 드러난다. 어떤 콩은 적은 땔감으로도 쉽게 무르고 부드러워지는 반면, 어떤 콩은 오래도록 불을 지펴 삶아야 겨우 부드러운 식감을 낸다. 푹 삶아 메주를 만들었을 때 미생물의 발효가 깊고 구수하게 일어나는 콩이 있는가 하면, 발효가 더디고 겉돌기만 하는 콩이 있다. 장을 담갔을 때 깊고 감칠맛 나는 장맛을 내뿜는 콩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아낙들의 감각 또한 존재한다. 밥에 넣었을 때 고소한 식감이 뛰어나 어린 자식들이 군침을 흘리며 잘 먹는 콩을 따로 가려내어 솜주머니에 보관하는 세심함도 작동한다.


밭에서 농사짓기에 좋은 콩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기에 좋은 콩이 언제나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수확량이 아무리 압도적으로 많아도 입안에 씹히는 맛과 풍미가 떨어지면 식탁에서 외면받기 십상이고, 알갱이가 아주 작고 보잘것없어도 메주를 쑤어 장을 담그기에는 최고의 발효적 특성을 가진 콩이 존재한다. 농민에게 씨앗이 지닌 진정한 가치는 단지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라는 단하나의 상업적 숫자로 결정되지 않았다. 얼마나 풍성하게 거두어들이는가라는 생산성의 가치와 함께, 그것으로 어떤 음식을 풍요롭게 해 먹을 수 있는가, 추운 겨울 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다가오는 해의 농사에서 다시금 안정적인 결실을 가져다줄 수 있는가가 다각도로 고려되었다.


그렇기에 부엌에서 스며 나온 경험적 지혜는 다시 정직한 밭으로 돌아가 씨앗의 운명을 바꾼다. 어떤 콩으로 메주를 만들어 쉿분 장맛을 냈는지 기억하고, 어느 콩이 밥맛을 가장 훌륭하게 살려냈는지 마을 아낙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며, 어느 집 밭에서 가져온 종자가 가마솥에서 잘 무르는지를 비교해 본다. 그러므로 한 지역에서 '좋은 콩'이라는 말 속에는 단순한 농업 생산량의 수치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형성해 온 삶의 방식과 식문화 전체가 오롯이 담겨있는 것이다.


콩을 대량으로 재배하여 판매하는 마을과, 일상적으로 장을 쑤어 콩을 많이 소비하는 마을의 씨앗 선택 기준은 결코 같을 필요가 없다. 집집마다 대대로 장을 깊게 담그는 마을에서는 메주 발효에 최적화된 콩이 귀하고, 매일 콩밥을 즐겨 먹는 마을에서는 밥맛과 부드러운 식감이 최고의 기준이 된다. 콩떡이나 두부, 콩국수처럼 각 지역 특유의 향토 음식이 발달한 곳이라면 그 음식을 완성하기 위한 완전히 다른 선발 기준이 작동하게 된다.


결국 한 지역의 독특한 식문화는 씨앗을 밭두렁 위에 단단하게 붙잡아두는 가장 강력한 생태적 힘이 된다. 사람들이 특정한 향토 음식을 계속해서 만들어 먹는 한, 그 음식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씨앗 역시 밭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심어진다. 씨앗을 내던질 정직한 밭이 있고, 그 씨앗으로 가마솥을 지펴 만들 고유한 음식이 있으며, 그 음식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일상적 생활이 존재하는 동안 씨앗을 정성껏 가려내는 농부의 손길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반대로 그 음식이 사람들의 식탁 위에서 외면받고 완전히 사라져 버리면, 그 특별한 음식을 위해 대대로 남겨두던 토종씨앗의 설 자리 역시 현저하게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밭에서 아름다운 씨앗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비극은, 이처럼 우리 식탁의 단조로운 변화와 깊게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집집마다 마당에서 정성껏 장을 담그던 시절에는, 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콩의 미세한 성질을 온몸으로 숙지하고 있던 생활의 전문가들이 마을마다 존재했다. 어떤 콩이 메주를 만들 때 속까지 부드럽게 무르는지, 어느 정도로 말려야 곰팡이가 오롯이 피어나는지, 어떠한 포기에서 나온 알갱이를 다음 해 종자로 남겨야 하는지를 일상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러나 현대 슬롯에 이르러 이러한 식문화적 경험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씨앗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남기던 농민들의 오랜 기준 또한 함께 희미해지고 말았다.


지역의 씨앗은 결코 행정관청이 그어놓은 인위적인 경계선 안에서만 모범 답안처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시끌벅적한 5일장에서 다른 마을의 뛰어난 씨앗이 물물교환을 통해 흘러 들어오기도 하고, 건너편 이웃집에서 한 됫박 얻어온 낯선 콩을 자신의 밭에 시험 삼아 심어보기도 한다. 먼 곳에 사는 친척이 가져다준 고유한 콩을 나누어 심기도 하며, 시집오는 딸의 혼숫감이나 이사를 따라 씨앗이 전혀 새로운 흙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한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심어지던 씨앗이 낯선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타관에서 들어온 낯선 씨앗이 새로운 흙과 기후 속에서 수년 동안 정직하게 살아남아 그곳의 토종으로 안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지에서 들어온 씨앗이 그 즉시 그 지역의 진정한 '토종씨앗'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로운 밭의 토양과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면 다가오는 농사로 이어지지 못한 채 도태된다. 농민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부엌에서의 쓰임새가 떨어지면 정차 다른 씨앗으로 대체되어 버린다. 반대로 그 지역의 미세한 환경과 농사 방식에 완벽히 들어맞고, 그곳 사람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맛과 성질까지 갖추게 되면, 해마다 농부의 선택을 받아 다시 밭으로 나갈 확률이 비할 바 없이 커진다. 수많은 세대 동안 이 주체적인 채종과 선발 과정이 반복되면, 처음 그 씨앗이 어디서 건너왔는가 하는 출신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만큼 그 지역의 농사 및 생활과 깊숙이 얽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지역의 토종씨앗을 깊이 이해하고자 할 때, 그 씨앗의 단순한 지리적 출발지만을 살피는 것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 씨앗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 씨앗이 그 땅에서 과연 무엇을 마주하고 어떠한 시련을 통과해 왔는가를 입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어떤 토양의 밭에서 자랐는지, 어떠한 가뭄과 폭우의 날씨를 견뎌냈는지, 어떤 농민의 손길에 의해 가려졌는지, 부엌에서 무엇을 해 먹기 위해 남겨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이웃에게 따스하게 나누어졌는지가 한데 얽혀있기 때문이다.


다시 가만히 상상해 보자. 완벽히 동일한 콩 한 줌이 두 개의 서로 다른 마을로 나누어 들어갔다. 한 마을에서는 해마다 정성스럽게 장을 담그기 위해 발효에 뛰어난 콩이 지속적으로 선택받는다. 다른 마을에서는 매일 밥에 놓아 먹기 위해 씹는 식감과 고소한 맛이 뛰어난 콩이 종자로 남는다. 한쪽 마을에서는 가을비가 쏟아져도 꼬투리가 쉽게 벌어지지 않는 콩이 끝까지 살아남고, 다른 쪽 마을에서는 가뭄이 지독한 해에도 끝까지 영글어주는 콩이 남겨진다. 한쪽에서는 서리를 피해 일찍 익는 조생종이 귀하고, 다른 쪽에서는 조금 늦게 익더라도 수확량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만생종이 가치를 인정받는다.


단 한 해의 농사만을 놓고 보면 두 마을 씨앗의 차이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미할 수 있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도 외형적으로는 그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일한 가치관과 환경에 따른 선택이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세대 동안 반복되면 이야기는 완벽하게 달라진다. 씨앗 집단이 원래 품고 있던 무수한 유전적 변이 가능성 가운데, 그 마을의 환경과 삶에 들어맞는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 지속적으로 종자로 남으면서, 마침내 두 지역의 씨앗은 서로 완전히 다른 형태와 생태적 성질을 가진 고유한 '토종'으로 갈라지게 된다. 여기에 미세기후와 토양, 재배 방식, 그리고 이웃 마을과의 끊임없는 씨앗 교류가 함께 작용하며 생명의 다채로움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한 지역의 토종씨앗은 결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흙과 인간이 나누어온 정직하고 반복된 선택의 눈부신 결과물이다. 이 위대한 형성의 과정에서 농민은 옛것만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며 오래된 씨앗을 무조건 지켜내기만 했던 보수적인 수동자가 아니었다. 새로운 씨앗이 장터나 이웃을 통해 들어오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밭에 심어 시험해 보았다. 수확량이나 맛이 훨씬 뛰어난 우수한 종자라면 기꺼이 받아들였고, 자신의 밭환경에 들어맞지 않고 병해충에 약하면 정직하게 포기했다. 새로운 식문화나 음식이 유행하면 그에 어울리는 작물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아무리 오랫동안 심어온 고유한 씨앗이라 할지라도 농사의 조건과 삶의 양식이 변하면 과감하게 다른 씨앗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지상 위 농업의 위대한 역사는 단지 과거의 것을 원형 그대로 고존하는 동결 행위만으로 이어져 오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과감하게 바꾸며, 끊임없이 시험하고, 실패를 통과한 뒤, 다시 가장 소중한 것을 골라 남기는 정직한 행위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농민은 과거의 고유한 씨앗을 보존하는 파수꾼인 동시에, 자신의 현재 삶과 다가올 미래에 가장 잘 들어맞는 새로운 생명을 주체적으로 탐색해 내는 위대한 창조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 지역의 토종씨앗을 박물관 유리창 너머에 전시된 정적인 유물처럼 바라보는 시선은 심각한 한계를 지닌다. 씨앗은 마땅히 정직한 흙 속에 다시 심어져야만 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밭에서 작물이 자라나는 생생한 모습을 관찰해야 하고, 수확한 알곡을 부엌으로 가져와 음식을 만들어 직접 맛보아야 한다.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고 좋은 씨앗인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가려내는 정직한 인간이 밭둑 위에 존재해야 한다. 씨앗을 내던질 밭이 존재하고, 그 씨앗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과 삶의 자리가 살아 숨 쉬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종자은행이나 첨단 영하 냉동고 속에 씨앗을 정밀하게 보관하는 일은 생물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귀중한 유전 자원을 안전하게 보존하고, 다가올 미래의 과학 연구와 상업적 농업 개량에 활용할 가능성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가운 저장고 속에 동결되어 있는 씨앗만으로는, 그 씨앗을 둘러싸고 형성되었던 농민들의 정교한 농사 기술과 삶의 유기적 관계망까지 함께 지켜낼 수는 없다.


어느 절기에 씨앗을 심어야 하는지, 어떠한 흙에서 작물이 가장 무성하게 자라나는지, 어떠한 포기에서 다음 해 종자를 받아야 하는지, 수확한 곡식으로 어떠한 음식을 만들어 식구들을 부양할 것인지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은, 오직 밭과 부엌이 숨 쉬는 현장 속에서만 대를 이어 계승될 수 있다.


그리고 씨앗의 운명을 가르던 그 정교한 판단의 현장에는 결코 농부 혼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밭에서 거두어들인 콩을 가마솥에 넣어 삶고, 메주를 만들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장을 담그며, 정성스러운 한 끼의 밥을 지어 자식들과 가족들에게 먹여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가을 마당에서 수확한 콩을 정성껏 말려 곡간에 보관하고, 식구들이 먹을 양식과 다가오는 봄날 밭으로 나갈 씨앗을 정밀하게 가려내던 과정 속에도 수많은 이들의 세심한 손길이 깊숙이 스며있었다. 특히 집안의 일상 먹거리를 온몸으로 바카라임지며 콩을 매일 다루었던 여성들의 감각적 경험은, 과연 어떠한 콩이 우리 가문과 마을에 좋은 씨앗인가를 가르는 생활의 기준을 정립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그 수많은 선택과 판단들을 단 하나의 일방적인 기준으로 통틀어 묶을 수는 없다. 어떤 농부는 당장의 수확량과 생산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고, 어떤 아낙은 부엌에서의 부드러운 식감과 깊은 풍미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어떤 이는 다가오는 해의 혹독한 기후와 농사를 염려했고, 어떤 이는 당장 겨울을 버텨낼 일상의 양식에 더욱 마음을 썼다. 농민들의 주체적인 선택은 단 하나의 획일적인 상업적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다채롭게 작동했던 것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인간적 판단과 삶의 요구가 모여, 마침내 한 지역의 고유한 토종씨앗을 완성해 냈다. 그러므로 한 지역의 토종씨앗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지 그곳의 물리적인 흙과 땅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 땅을 스쳐 지나간 사계절의 날씨와 조상들의 독특한 농사 방식이 또렷이 보이고, 그곳 사람들이 대대로 무엇을 맛있게 만들어 먹었는가 하는 식문화의 서사가 눈부시게 드러난다. 어떠한 고단한 노동을 온몸으로 견뎌내었는지도 보이고, 도대체 무엇을 정직하고 훌륭한 농사라고 여겼는가 하는 농민들의 삶의 철학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토종씨앗이 품고 있는 그 작고 섬세한 차이들은 바로 이러한 인문학적 세월 속에서 만들어졌다. 알맹이의 크기가 조금 다르고, 겉껍질의 윤기와 색조가 조금 다르며, 가을날 익어 고개를 숙이는 절기의 시각이 조금 다르다. 그 미세하고 작은 차이 하나하나가, 실상은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인간의 주체적 선택과 정직한 일상의 삶을 고스란히 품어 안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콩 한 줌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두 마을의 밭으로 나뉘어 들어간 씨앗은 결코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는다. 한쪽 마을의 콩은 그 마을 사람들의 음식과 농사 방식에 맞추어 자신의 생명을 끊임없이 변주해 가고, 다른 쪽 마을의 콩은 또 다른 밭의 토양과 일상의 삶에 맞추어 전혀 다른 생명의 길을 걸어간다. 씨앗이 마을의 환경을 일방적으로 닮아가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씨앗의 생명을 제 마음대로 조작해 내는 것도 아니다. 사람과 밭, 사계절의 기후와 부엌의 음식이 서로 다정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깊은 관계망 속에서, 씨앗의 얼굴과 성질 또한 조금씩 눈부시게 달라져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콩'이라는 단 하나의 획일적인 식물학적 이름만으로는, 그 씨앗이 살아온 우주와도 같은 삶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이제 한 알의 콩을 손바닥 위에 고이 올려놓고, 그저 이 콩이 어느 지리적 출발지에서 건너왔는가만을 묻는 평면적인 질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작고 단단한 콩이 과연 어느 골짜기의 밭에서 자라났는지, 어떠한 가치관을 가진 농부의 손길에 의해 가려졌는지, 부엌에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해 끝까지 남겨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혹독한 계절의 시련을 통과하여 다가오는 해의 새로운 농사로 넘어왔는가를 깊고 다정하게 물어야 한다.


동일했던 한 줌의 콩이 서로 다른 마을의 고유한 토종이 되는 거룩한 문명사적 과정에는, 단지 겉으로 보이는 무심한 땅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그 씨앗을 주체적으로 고르고, 맛있게 나누어 먹고, 겨울 동안 정성껏 저장하여, 봄날 정직한 흙 속으로 다시 심어낸 따스한 사람이 그 길의 한가운데에 영원히 서 있었던 것이다.

월, 화, 수,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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