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5
어느덧 개강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오리엔테이션 때 선배들은 3~4주만 지나면 로스쿨 생활에 완전히 '적응'할 거라고 그랬었다. 그 약속의 시간이 온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속았다. 지금도 Constitutional Law II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콜드콜을 하려고 배치표를 보며 "미스터..."라고 말하면 덜덜 떨린다. LLM 학생은 부르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교수님이 깜빡했을까 봐 말이다. 적응은커녕, 머리가 간지러워도 내가 손을 든 것으로 오해할 것 같아서 긁지도 못하고 꾹 참고 있는 수준이다.
갑자기 25년 전, 대학생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때, 가장 친한 친구가 인생의 조언을 해줬다.
"슬롯 나가면 영어를 잘하는 게 정말 중요할 거야. 그래서 딱 1년만 미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거 어때? 그럼 나 정도 영어 실력은 될 거야."
그 친구는 영어를 참 잘했었다. 어릴 때 외국에서 10년 동안 지냈었기 때문이긴 했지만, 미국인처럼 영어를 쏼라쏼라 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당시 나는 중학교 때 학교에서 A, B, C를 배우던 세대였고, 거기다 고등학교 때 영어는 수우미양가의 '가'를 받을 정도로 처참한 실력이었다. 그런데 1년만 딱 투자해서 다녀오면 그 친구만큼 한다고? 완전 개꿀 아닌가. 친구 말만 믿고 곧장 휴학을 한 뒤 미국을 다녀왔다.
결과는 완전 속았다. 물론 어학연수 기간 동안 한국 사람은 피해 다니면서 영어를 배우고 익혔기에, 미국 드라마도 어느 정도 들리기 시작했고, 외국인을 만나도 곧잘 말이 나왔으니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친구만큼 할 줄 알았으니 큰 마음 먹고 갔던 거지, 이 정도 실력으로 돌아올 줄 알았으면 아마 안 갔을 것 같다. 돌아와서 보니 내가 10년을 다녀와도 못 따라갈 정도로 그 친구가 얼마나 영어를 잘하는지만 깨달았다. 나중에 친구도 본인이 좀 과장한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어쨌든.
이번 유학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최소 두 가지는 달성하자고 했다. 영어 공부와 법 공부. 학교 수업을 따라가려면 읽기, 듣기, 말하기는 기본이 되어야 했다. 문제는 로스쿨에서 쓰는 영어는 일반 영어와 다르다는 데 있었다. 예를 들어 motion은 동작이 아니라 법원에 하는 신청이고, battery는 배터리가 아니라 물리적인 폭행이며, damages는 무려 손해배상금이다. 아예 처음 보는 breach(계약 위반)나 pleading(소송 서류)은 일상적인 뜻은 모르겠고 법률 용어의 뜻만 외우고 있다.
이렇기에 미국 학생들도 처음 법률 용어를 접하면 많이 당황하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내 생각에 선배들이 말한 3~4주가 바로 그 시간이 아닌가 싶다. 영어에 무지한 나조차도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서당개 풍월을 읊듯 판례에서 익숙한 단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석이 잘 되는 건 아니다.
하긴 우리나라 판례도 한글인데도 그냥 읽으면 무슨 말인지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렵다. 문장 하나도 엄청 긴 데다가 어려운 단어도 많고, 현실에서 잘 안 쓰는 이중 부정도 흔하다. 고시 공부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 그렇게 많은 판례를 읽었지만 "위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뭐 이런 표현을 볼 때마다, 그래서 결론이 뭐인지 속이 갑갑해진다. 미국 판례도 이런 식으로 긴 문장에 말을 꼬아 쓰는 표현이 많은 것 같다.
어떻게든 한 달을 버텼지만, 드라마틱하게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았고, 그렇다고 법 공부도 원활한 건 아니다. 오히려 해야 할 게 너무 많은 나머지 점차 포기하는 부분이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교과서 30페이지를 읽으려면 먼저 영어 원문을 읽고, 해석이 잘 안 되는 문장만 AI에게 물어보고 이러면서 하루 종일 붙잡고 있었다. 고생한 만큼 수업 시간에 보람도 컸다. 질문을 해도 대답할 수 있었고, 교수님 말도 훨씬 잘 이해가 됐다.
그런데 점점 읽을 게 많아지고 숙제가 쌓이면서 그렇게 원칙대로 보는 게 불가능해졌다. 영어 공부하듯 독해하면 숙제를 다 해낼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에 맞춰 빨리 읽으면 정작 어떤 내용인지 남는 게 없었다. 고민 끝에 영어를 포기하기로 했다. AI에게 30페이지 해석을 먼저 맡긴 후, 해석본을 쭉 읽은 다음에 영어를 다시 보는 것이다. 그러면 영어는 몰라도 일단 교과서의 내용은 따라갈 수 있었다. AI가 없던 시절에 선배들은 어찌 살았나 모르겠다.
공부에 효율이 오르는 만큼, 죄바카라감도 늘고 있다. 미국까지 왔는데 법 공부한다고 영어 공부를 안 한다는 게, 왠지 이 좋은 기회를 잘 살리지 못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터키에서 온 LLM 동기는 처음에 AI를 적극적으로 쓰다가 공부에 방해되는 것 같아서, 지금은 정말 모르는 문장만 AI에 물어보고 혼자서 다 해내고 있다고 한다. 그러게 학생이면 AI를 최소한으로 써야 하는데 말이다. 그 친구 말을 듣고 나니 AI에게 통으로 해석을 맡기는 게 더 미안했다. 이러다 점점 매너리즘에 빠져서 나중에는 영어 교과서조차도 안 보게 될까 봐 두렵다. 이런 식으로 적응하고 싶진 않다.
확실히 요즘 수업 분위기는 학기 초와 차이가 많이 난다. 수업 시간에 결석하는 학생들도 많고, 교수님의 콜드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많다. 심지어 Civil Procedure 수업에서 한 남학생은 콜드콜을 받고 울었다고도 한다. 딴 거 안 하고 수업만 따라가기도 벅차다는 로스쿨인데, 젊은 학생들은 학회나 동아리 활동도 해야 하고, 친구들이랑 술도 한잔 하고, 연애도 하고, 게임도 하고,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을까. 점점 해이해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게 진짜 로스쿨 생활에 적응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정작 나는 언제 약속의 시간이 오려나. 오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