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7
3주 전이었나. 이른 아침 수업을 들으러 교실로 들어갔더니 정장 차림의 모르는 남학생이 있었다. 나를 보더니 손을 내밀고 자긴 JD 1L(1학년)이라면서 반갑게 소개를 하더라. 모르는 학생들끼리 만나는 일이 워낙 자주 있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뭐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잠깐의 스몰톡이 끝나자 그가 본심을 드러냈다. 사실은 자기가 SBA(Student Bar Association) 1L President 선거에 출마한다면서 뽑아 달라는 거였다. 어쩐지, LLM 학생들과 친구하고 싶어서 아침부터 여기 온 건 아니었겠지만 씁쓸했다. 평소에는 우리에게 관심도 없다가 이럴 때만 LLM 학생 13표가 급한 거였겠지. 그래도 그가 소개해준 꽤나 유명한 한식 식당만은 인상에 남았다.
연재글을 몇 개 본 독자들에겐 뻔한 과거 회상의 레퍼토리겠지만, 갑자기 25년 전 내가 과대표로 출마할 때가 떠오른다. 원래 감투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과대 또한 전혀 할 마음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그냥 3학년 때 당시 과대랑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4학년이 되자 그 친구가 자신의 후임으로 나를 꼽았다. 그리고 몇 명의 다른 후보들도 나와서 투표를 했는데 거짓말같이 내가 됐다.
내가 과대였을 때 기억이 남는 장면은, 신입생 환영회 때 소주를 병째로 원샷하고 실려 나갔다는 거. 과 단합을 위해 남자들을 모아 대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한 거. 그리고 졸업 여행이라고 제주도 여행을 기획하고 추진한 거. 따지고 보면 다 노는 것밖에 없었다. 이력서에 적기도 민망한 경력이라 수십 년간 잊고 살았다.
그런데 로스쿨의 President는 좀 다른가 보더라. 로스쿨을 졸업하고 좋은 로펌에 취업하려면 학점과 각종 수업 외 활동 참여가 중요하다고 한다. Law Journal이나 이민법, 국제법 등 여러 학회 활동도 활발하다. 거기다 선거로 뽑히는 SBA 간부라면 평판이나 인지도 측면에서 이력서에 꽤 의미가 있나 보더라.
얼마 전에 그 President 후보 친구를 도서관에서 만났다. 나에게 먼저 아는 척을 하는데, 처음엔 누군지 기억이 안 나서 한참 긴가민가하다가 겨우 떠올렸다. 그래서 선거는 잘 됐냐 인사치레성으로 물어봤는데, 최종 2인 후보 안에 들어서 결선 투표를 하게 되었다고 또 잘 부탁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실 누가 되든 큰 관심이 없었는데 저렇게까지 한다니, 미안함도 들었다. 결선 투표에서는 그 친구를 뽑아줘야겠다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Good Luck!"
1L President 선거 결과, 그 친구가 졌다. 고백하자면, 그를 뽑으려고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었는데 투표 기간을 놓치는 바람에 투표를 아예 하지 못했다. 다시 만나면 어떻게 말해야 하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그는 더 이상 도서관에서 보이지 않았다. 역시 선거 때문에 온 것이었나.
이 글을 쓰고 나서 며칠 뒤에 그를 또 도서관에서 만났다. 선거 운동 기간에 봤던 말쑥한 차림과 달리 후줄근한 추리닝에 모자까지 눌러쓴 영락없는 로스쿨 학생의 모습이었다. 반갑게 나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는 그를 보면서, 그의 이름도 까먹은 내 자신에게 또 한 번 죄바카라감을 느꼈다. 미안하다 아무개야. 다음엔 뭐에 나오든 꼭 뽑아줄게!
반장선거(격하하는 건 아니고 이게 왠지 더 어울려서...)는 JD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우리 LLM 중에서도 Representative(대표)를 뽑으면 그가 SBA Vice President가 되는 거였다. 공부 말고 다른 거엔 워낙 관심이 없었던 터라, 이런 게 있다는 사실도 그 무렵 LLM 대표 후보에 나가는 친구에게 들어서 알았다.
그 친구는 도미니카였다. 이번에 SBA Vice President에 출마하게 되었는데 자기를 뽑아 달라는 거였다. 처음에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그가 Vice President가 되면 내가 그의 Representative(대리인)를 맡아 달라는 줄 알았다. 나를 이렇게 각별히 생각하다니 싶어 "I'm honored!"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다 걔가 당선되면 내가 무슨 한자리를 해야 하는 건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대화를 좀 더 하다 보니, 그냥 자기가 LLM Representative로 나간다는 거였다. 혼자 김칫국을 마신 거 같아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미니카도 나를 보고 얘는 혼자 왜 이러나 싶었을 거 같았다. 어쨌든 이렇게 말해주는 것도 고마워서 당연히 그를 뽑아주겠다고 그랬다.
그리고 며칠 지나니 LLM 대표로 도미니카 외에 터키랑 칠레도 나온다고 들었다. 터키는 각종 LLM 모임에 전부 참석하면서 우리의 의견을 학교에 전달하고, WhatsApp 단톡방을 만들어 운영하며, 매주 로스쿨 학생들의 모임에서 얻은 공부 방법이나 풋볼 경기 같은 정보들을 우리에게 공유해 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선거에 나간다고 단톡방에 딱 한마디 적은 이후로는 전혀 선거 활동을 하지 않는다. 자신감이 있는 건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선거에 몰입하지 않는 모습에 더 호감을 느끼는 LLM 동기들이 꽤 있다.
그리고 칠레는 후보 중 유일한 여성으로 굉장히 사교적이고 LLM 내에서도 어울리는 여자 친구들이 많다. (우리 LLM은 여성이 많다!) 나한테도 항상 웃으며 반갑게 인사하는 등 친구들에게 다정다감하고, 각 나라의 문화에 호기심이 큰지 이것저것 많이 물어본다. 공부와 공부 외 활동 둘 다 적극적으로 잘 해내고 있어서 비법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본인은 잠을 별로 안 잔다고 한다. 그녀는 나한테 지지해 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나는 이런 적극성을 높게 평가하는데, 다른 친구들은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았다.
도미니카는 아예 대놓고 단톡방에다 선거 운동을 했다. 본인 사진이 걸린 선거 포스터와 공약을 만들어 뿌렸다. 그리고 도미니카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외향적인데, 다만 LLM보다 JD들이랑 더 자주 어울리는 편이다. 로스쿨 주변에는 항상 도미니카가 누군가와 함께하고 있다. 한 번은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학생들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만약 LLM 대표를 우리끼리가 아니라 로스쿨 학생 전체가 투표하는 거였다면, 무조건 도미니카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방식으로는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남의 반 선거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우리 반 LLM 친구들의 선거는 혼자 상상해도 너무 재미있었다. 판세 분석과는 관계없이, 나는 약속대로 도미니카를 뽑았다.
며칠 후 도서관에 있는데, 칠레 친구가 와서 말을 걸었다. 이번 LLM 대표 선거에서 터키랑 자기랑 결선 투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미니카가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보고 본인을 뽑아 달라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도미니카를 뽑았다. 하지만 이게 동네 반장선거도 아니고 LLM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는 거라니깐 좀 더 고민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칠레에게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더니, 나중에는 노란 포스트잇에다 자길 뽑아 달라는 손글씨를 적어서 전해주는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안 뽑아주기도 쉽지 않았다. 우리 반의 실질적 리더인 터키냐 손글씨의 칠레냐. 고민이 깊어져 간다.
LLM 대표 결선 투표 기간 동안에 도미니카를 만나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래도 내가 약속대로 너를 뽑았었다고 했더니 너무 고마워했다. 그러면서도 자기도 학업에 너무 바빠서 LLM 대표가 된다 해도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었단다. 떨어지고 나서 그런 말을 하니 괜히 아쉬워서 그러는 것 같아 보였지만, 모르는 척 격하게 공감해 주면서 우리는 공부나 열심히 하자고 했다.
그나저나 LLM 대표 결과는... 다음 주를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