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아 미안해

2026. 8. 16.

by킹오황

다음 주에는 UGA 로스쿨 오리엔테이션이 열린다. 수목금 장장 3일 동안 아침 9시 반부터 오후 4시까지 이어지는데, 규모가 상상 이상이다. 하긴 우리 같은 LLM 과정만이 아니라 JD를 포함한 전체 로스쿨 신입생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다. 학교 소개부터 수업 방식, 변호사시험, 장래 진로까지 안내하고, 심지어 판례 공부 방법까지 설명하는 시간도 있다. 대충 참석해서 시간만 때우는 행사가 아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월요일, 24일부터 바로 수업이 시작된다.


즉, 오리엔테이션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생각보다 숙제를 할 여유가 그렇게 많진 않다는 뜻이다. 여기서 숙제라 하면, 보통 수업 시간에 다룰 내용을 미리 예습하기 위해 교과서나 논문 같은 걸 읽어오는 것이다. 어떤 수업은 자기소개와 최근 행정 관련 신문 기사 등을 요약해서 발표를 준비하라고 하기도 했다. 미국 로스쿨 수업은 소크라테스식으로, 학생들이 교수의 질문에 대답하고 서로 토론하며 진행된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아무 말도 못 하는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교수가 읽으라고 하는 건 다 읽어야 한다. 문제는 그 양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Constitutional Litigation Seminar 수업에서는 Constitutional Torts라는 교과서 30페이지를 읽어오라고 했는데, 어제 오전 내내 읽었는데도 10페이지를 채 다 못 읽었다. 미국 연방대법원 판례, 그것도 1960년대 판례를 당시의 시대적 배경까지 알아가며 이해해야 하는 건데, 챗지피티가 없었으면 말도 안 되는 분량이었고, 그나마 AI의 도움으로 꾸역꾸역 읽던 거였다. 그렇다고 한국어로 해석해 달라 해서 그것만 읽으면 의미가 없는 게, 어차피 숙제를 하는 이유는 수업 시간에 교수가 무작위로 던지는 질문에 대답하고, 학생들과 토론하기 위한 건데 이때 알아듣고 내 의견을 말하기 위해선 영어로 반드시 읽어야 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 LLM 동기들에겐 다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물론 개중엔 영국이나 호주처럼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배신자)들도 있긴 하다. 그래서 지금 동기 단톡방인 WhatsApp에서는 완전 비상 걸렸다. 다들 숙제는 어디서 확인하냐, 교과서는 어떤 거냐, 어디서 샀냐, 읽을거리가 많은데 우리 모임을 미루는 거 어떠냐 같은 대화로 채팅 알람이 종일 울렸다. 어차피 다음 주에 오리엔테이션을 하고, 학기가 시작되면 응당 고생해야 하는 것이긴 하나, 지금 숙제가 뭔지 몰랐다면 마지막 한 주라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데, 괜히 빨간 약을 먹는 바람에 벌써부터 마음을 졸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거 내 잘못이다. 원래라면 아직 오리엔테이션도 하지 않은 지금 타이밍에는 아무도 UGA 로스쿨 포털의 존재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고, 실라부스도 잘 몰랐을 거였다. 그런데 내가 지난주에 LLM 졸업생인 한국 분과 연락하면서 실라부스가 올라와 있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이걸 LLM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다가 단톡방에 퍼지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교과서도 미리 준비해 놓고, 수업도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알아 놓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가벼이 말했던 건데, 미국 변호사를 꿈꾸는 동기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마음이 급했다.


IMG_0054.jpegNorth Campus Parking Deck. 실내 주차장을 배정받아 좋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그 졸업생은 자기는 개강하고 나서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면서, 벌써부터 이렇게 과열된 모습을 보고는 다들 대단하다고 그랬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래.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나중에 돌이켜보면 한 주라도 빨리 공부를 시작한 게 좋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동기 모임까지 취소하자, 미루자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인 걸 보면 내가 괜히 친구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죄바카라감도 좀 들었다. 그들에게 들리진 않겠지만, 여기다가 내 마음을 남길게. I'm so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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