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이성을 잃지만, 산사의 수행자들은 그것을 마시고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하여 화두(話頭)를 쥐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술’이라 부르며 쾌락을 좇았고, 스님들은 그것을 ‘곡차(穀茶)’라 부르며 지혜를 구했다.
술이지만 술이 아니고, 차이지만 차가 아닌 기묘한 음료. 사찰의 곡차는 바로 그 경계 위에서 탄생했다.
조선 시대의 기인 중의 기인이자 명승이었던 진묵대사(震默大師)의 일화는 곡차의 본질을 꿰뚫는다.
평소 술을 즐기던 대사에게 주위 사람들이 계율을 걱정하며 술을 바치자, 대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것을 술이라 하면 나는 마시지 않을 것이요, 곡식으로 만든 차, 즉 '곡차'라 하면 마시겠노라."
이것은 단순히 계율을 피하기 위한 얄팍한 말장난이 아니었다.
대사는 이어 말했다.
"마셔서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면 술이고, 정신을 오히려 맑고 깨어있게 하면 차다."
본질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가짐에 있다는, 지극히 불교적인 깨달음이었다.
사찰에서 곡차는 혹독한 겨울 산사의 추위를 이겨내게 돕는 온기였고, 수행 중 막힌 기혈을 뚫어주는 약이었으며, 때로는 대자연과 하나가 되는 방편이었다.
본 연재는 차의 이름을 빌려 마실 수밖에 없었던 수행자들의 고뇌와 철학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고려 시대 최고 전성기를 누렸던 사찰 양조의 찬란한 역사와 현대까지 살아남은 명주들의 이야기를 추적할 것이다.
나아가 가을밤, 내 집 방 한 칸에서 직접 쌀을 씻고 누룩을 섞어 사찰의 풍류를 재현하는 친절한 안내서가 되고자 한다.
자, 이제 잔을 채울 시간이다. 당신이 들고 있는 그것은 술인가, 아니면 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