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회의 반란

찰카랑, 마음이 채워지는 소리

by빛나다온

찰카랑 찰카랑.

아침부터 카톡 알림음(돈 들어오는 소리로 설정)이 연신 울린다. 화면에 뜬 이름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로의 흑역사와 청춘을 함께 보낸 절친한 친구다.

"ㅎㅇ"
"오늘 저녁에 뭐 해?"
"저녁엔 셔플댄스 수업이 있지. 8시쯤 끝나지."
"운동 마치고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불금인데 하이볼 한잔하자!"
"오~~ 좋지! 씻고 바로 갈게"
"오~~ 예"

약속 하나 잡았을 뿐인데 하루 전체가 설렘으로 물든다. 하이볼 마실 생각을 하니 지인의 카페(나름 유명한 핫플)에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목이 마를 때면 직원들과 모히또(무알콜)를 만들어 마시곤 했었다. 영화 <내부자들>의 명대사처럼 "모히또 가서 몰디브나 한 잔 할까?" 하며 웃던 상큼한 기억이다.


하지만 요즘 내 입맛을 사로잡은 건 단연 친구가 만들어 주던 잭다니엘 애플, 산토리 하이볼이다. 편의점에 수많은 캔 하이볼이 넘쳐나도 내게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 '남이 만들어 주는 게 제일 맛있다'는 것. 일주일 동안 열심히 달린 나에게 주는 작은 보상을 위해 평소보다 더 신나게 셔플댄스를 췄다. 땀을 쏟아낸 후 가벼워진 몸을 안고 설레는 발걸음으로 친구 집에 도착했다.


"준비할 동안 TV 보고 있을래?"


친구도 퇴근하고 바빴을 텐데 고마웠다. TV를 전혀 보지 않는 나는 도와주겠다며 주방으로 갔지만 친구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타인에게 주방을 내주는 게 불편할 수도 있으니 더 말하지 않고 쇼파에 앉아 온라인카지노 앱을 열었다. 다른 작가님들의 글 속을 산바카라하는 동안, 주방에서는 뚝딱뚝딱 사각사각 무언가를 썰고 다듬는 정성이 끊이지 않았다. 한 시간 가까이 소리가 이어지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주방 쪽을 힐끗거리며 큰소리로 말했다.

"뭘 그렇게 정성스럽게 해~ 대충 해!"

친구는 거의 다 되었다며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주방에서 접시를 들고 나오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식탁 위에 펼쳐진 것은 음식이 아니라 근사한 미술 작품이었다. 친구의 손끝에서 탄생한 육회 3종 예술 작품이다.


"우와....세상에. 육회가 이렇게 예쁠 수가. 너무 예쁘잖아."




정갈하게 담은 육회 위에 노른자와 치즈 가루, 송송 썬 파를 올리고 치즈와 크래커, 무순과 배를 놓은 육회 카나페.




아삭하고 달콤한 배채 위에 양념 육회를 소복이 올리고 편마늘을 꽃잎처럼 둘러 만든 꽃이 핀 육회.




그리고 깻잎을 깔고 김부각과 김이 정갈하게 어우러진 정갈한 육회, 다진 청양고추를 육회에 버무려서 느끼함을 잡아준다고 했다.




너무 예뻐서 감탄사를 내뱉으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친구가 얼음이 가득 담긴 하이볼 잔을 내밀었고 탄산수 기포가 톡톡 올라오는 잔을 기울이며 부딪쳤다.


짠~ 짠!



시원하고 알싸한 잭 다니엘 애플 하이볼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피로가 거짓말처럼 녹아내렸다. 정성스러운 육회를 한 점씩 집어 먹으며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유명한 <할매 떡볶이> 한 접시만 있어도 세상을 다 가진 듯 깔깔거리던 시절. 수업이 끝나면 매점으로 달려가 초코파이나 몽쉘을 사 먹고, 시험공부를 한다며 친구 집에서 밤새 수다를 떨던 날들. 특별한 장소나 거창한 이벤트가 없어도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어느덧 어른이 되어 하이볼 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추억하는 우리.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보지 못했고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고단했을 테지만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헤어진 것처럼 편안했다.

- 내 집처럼 편히 쉴 수 있는 쇼파를 내어주는 친구
- 친구를 위해 정성껏 요리를 하는 친구.
서로의 시간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그게 바로 오래된 친구인가 보다. 친구는 한 시간 동안 육회만 만든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배를 채울 음식과 함께 마음을 온기로 채워줄 시간을 만들고 있었던 게 아닐까.



마지막 후식으로 만들어준 무화과에 고소한 견과류와 리코타 치즈, 향긋한 허브를 올린 무화과 치즈 카르파초까지 완벽한 코스를 완성했다.



집에 돌아갈 무렵, 학원을 마치고 친구의 딸이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용돈을 쥐어주며 따뜻했던 금요일 밤을 추억 앨범 속에 접어 넣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찰카랑 찰카랑.

내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로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추억이 마음에 차오르는 소리다.

"잘 가고 있지? 덕분에 나도 맛있는 거 먹었다."


"응~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육회를 먹었네, 고마워! 다음엔 내가 잔치국수해줄게 고기도 구워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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