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강릉 단오제 기억

타임머신이 있다면...

by빛나다온

6월의 바람이 불어올 때면 마음이 들뜨면서도 또 이내 아려온다. 호국의 달이기도 하지만 음력 5월 5일이 가까워지면 내 머릿속에는 빛바랜 필름 같은 유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난생처음 엄마 손을 잡고 집을 벗어나 강릉 단오제를 찾았던 기억 때문이다.


남대천 1986년 강원 강릉
단오제 난장 1986년 강원 강릉


강릉 단오제는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 대표 전통 축제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고 2005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을 모셔오는 영신행차와 제례, 굿, 민속놀이가 어우러지는 큰 축제이지만 어린 시절의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단오굿 1986년 강원 강릉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는지 막 입학했을 무렵이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풍경 몇 조각은 아직도 선명하다.

강릉 남대천 둔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마치 온 세상의 사람들이 다 모여든 것 같았다.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중심으로 위아래가 온통 사람의 물결이었다. 까만 파도처럼 일렁이는 인파 속에서 엄마는 혹여 나를 잃어버릴까 봐 내 손을 꼭 쥐었다. 나 역시 엄마를 놓칠까 두려워 작은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고 엄마 손을 움켜잡았다. 어쩌면 지금도 무언가를 꼭 붙잡고 잘 버틸수 있는 힘은 그날의 손아귀 힘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강원 강릉 남대천 둔치



천막으로 얼기설기 지은 장터 사이에는 엿장수의 구성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솜사탕을 든 아이들은 부모 손을 놓칠까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녔다. 플라스틱 장난감과 고무공, 색색의 머리핀을 파는 좌판들이 길게 늘어섰고 어디선가 뻥튀기 기계가 "뻥" 하고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놀라면서도 깔깔 웃어댔다.


단오제 난장 1986년 강원 강릉



높이 치솟는 단오 그네 위에서는 한복 치맛자락이 바람처럼 흩날렸고 씨름판에서는 모래를 일으키며 넘어지는 사람들에게 환호성이 쏟아졌다. 품바 공연이 열리는 곳에서는 장구, 꽹과리 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른들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구경했다. 어린 내 눈에 단오장은 거대한 놀이동산이었다.

한가운데 우뚝 선 서커스 천막은 그 자체로 신비의 세계였다. 어스름한 천막 안에서 묘기가 펼쳐질 때마다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고 박수 소리는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약장수의 뱀쇼마저도 어린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신기한 공연이었다.


서커스 공연장 1986년 강원 강릉


단오제 난장 1986년 강원 강릉


단오제 난장 1986년 강원 강릉




천막 밖으로 나오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링 던지기와 야바위판 앞에는 사람들의 기대와 긴장이 가득했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호객 소리가 축제의 흥겨움을 더했다. 행운의 숫자를 기다리며 숨을 죽이던 사람들의 표정조차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단오제 난장 1986 강원 강릉


단오제 난장 1986 강원 강릉


단오제 난장 1986 강원 강릉




그리고 단오장에는 특별한 냄새가 있었다.
감자전을 부치던 고소한 냄새, 수리취떡 향기, 어른들이 마시던 신주(神酒)의 알싸한 향이 뒤섞여 있었다. 그 냄새는 지금도 문득 바람을 타고 찾아와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강원도 사람들에게 감자떡은 특별한 음식이다.
엄마도 감자떡을 자주 만들어 주셨다. 한 김 식은 감자떡을 손에 쥐고 배어 물면 쫀득한 식감과 달콤한 팥소가 입안 가득 퍼졌다. 지금도 엄마의 손맛이 많이 그립다. 그날 엄마는 넉넉하지 않았던 살림 때문인지 구경만 했을 뿐 뭘 샀던 기억은 없다. 그래도 엄마 손을 잡고 세상 구경을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감자송편(네이버 이미지)


한참을 걷고 구경한 뒤 우리는 강릉에 살고 계시던 이모님 댁으로 향했다. 엄마는 7남매의 장녀였다. 늘 동생들을 챙기던 큰언니였던 엄마는 이모네 집 문턱을 넘자 비로소 긴장을 풀고 환하게 웃었다.
이모는 허기진 우리를 위해 비빔국수를 뚝딱 만들어 주셨다. 매콤 새콤한 양념장에 채소를 넣어 슥슥 비벼낸 국수 한 그릇. 양 볼에 양념을 묻혀 가며 허겁지겁 먹었던 그 맛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여태 먹어본 수많은 음식 가운데서도 손꼽힐 만큼 또렷한 맛이다.


지금 누군가 내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돌아가신 엄마를 딱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고 싶어요."라고 말하겠다. 엄마가 되어 보니 그 시절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빛이 얼마나 깊고 따뜻했는지를 알겠다. 엄마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과 작별하셨다. 그래서인지 엄마와 함께한 작은 기억 하나하나가 내게는 유리구슬처럼 반짝인다. 그중에서도 빛나는 기억 한 조각이 바로 강릉 단오제다.

만약 과거의 어느 6월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엄마와 강릉 남대천 둔치를 걷고 싶다. 사람들 틈에서 내가 먼저 엄마 손을 꼭 잡고 엄마가 제일 좋아했던 달콤한 참외를 비롯해 그 시절 난장에서 파는 가장 맛있는 것, 제일 예쁜 것, 가장 좋은 것만 골라 다 사드리고 싶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단오제가 아니라 그날 내 손을 꼭 잡아 주던 엄마의 따뜻한 손길인지도 모르겠다.


2026년 강릉단오제 일정


아쉽게도 그 시절 엄마와 함께 걸었던 단오장의 빛바랜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기억은 선명한데 증명할 길이 없어 서운하던 차에 <7080 지나간 우리의 일상 자료집>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들을 발견했다.


흑백사진 자료출처: 7080 지나간 우리의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