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트랙
자글거리는 잡음 사이로 피아노 전주가 흘러나왔다. 민석의 손가락이 멈췄다. 성시경의 〈희재〉였다.
“하필이면.”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노래라는 게 참 이상했다. 몇 년 동안 잊고 살았던 장면도 첫 소절 하나에 불쑥 끌려 온다. 십오 년 전 겨울이었다. 병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다. 바깥은 겨울이었는데 아내는 자꾸 덥다고 한다.
“여보, 창문 좀 열어줘.”
“지금도 열려 있는데?”
“조금만 더.”
“감기 걸려.”
민석이 창문을 닫으려고 하자 아내가 손을 들어 말린다.
“더워.”
“나는 추워 죽겠는데.”
“그러니까 당신이 환자가 아니지.”
그 말에 둘은 잠깐 웃는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는 먹다 남긴 귤 하나가 놓여 있다. 껍질은 반쯤 벗겨진 채 말라붙었고 빨대가 꽂힌 우유는 그대로이다. 민석은 귤을 집어 든다.
“이거 버린다.”
“먹어.”
“다 말랐어.”
“그거 좀 먹는다고 안 죽어.”
그때는 그런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죽는다는 말. 살아 있다는 말. 그 둘 사이가 그렇게 가까워질 줄은 몰랐으니까. 민석은 귤을 한 조각 입에 넣는다. 아내는 피곤한지 눈을 감는다. 잠시 뒤 다시 입을 연다.
“선인장 물 줬어?”
“뭐?”
“베란다 선인장.”
민석은 잠깐 생각한다. 그런 게 있었나 싶다.
“선인장은 물 안 줘도 되잖아?”
아내가 눈을 뜬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뭘 맡기면 안 된다니까.”
“내일 줄게.”
“많이 주면 안 돼.”
“식물 키우는 것도 복잡하네.”
그날 무슨 이야기를 더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런 것만 남았다.
귤이 말랐던 것. 창문 사이로 겨울바람이 들어왔던 것. 선인장에 물을 많이 주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들었던 것. 정작 중요했을 것 같은 말들은 희미해졌는데 쓸데없어 보이던 장면들은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했다. 노래가 후렴으로 넘어갔다.
민석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차가 한강 위를 지나고 있었다. 검은 물 위로 건물의 불빛이 길게 흔들렸다.
아내가 떠난 뒤 그는 물건을 꽤 많이 버렸다. 옷도 버리고 신발도 버리고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것들도 버렸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집 안에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현관을 열었는데 아내의 운동화가 보이면 금방이라도 안방에서 걸어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버렸다. 사람은 생각보다 잘 적응했다. 그게 또 서글펐다.
“과장님.”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민석이 고개를 들었다. 같은 부서 김 대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안 내리세요?”
전광판에 ‘역삼’이라는 글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
민석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폰 줄이 가방 손잡이에 단단히 엉켜 있었다.
“아, 잠깐.”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뒤에서는 누군가 빨리 내리라며 몸을 밀었고 앞에서는 타려는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다.
“과장님, 빨리요!”
김 대리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민석은 엉킨 줄을 손에 쥔 채 겨우 승강장으로 빠져나왔다. 열차 문이 닫혔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민석은 잠시 벤치에 워크맨을 내려놓고 이어폰 줄을 풀었다. 한 번 꼬인 줄은 생각보다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안 오세요?”
몇 걸음 앞서가던 김 대리가 돌아보았다.
“가.”
민석은 한 번 더 줄을 잡아당겼다. 겨우 이어폰 줄이 풀리고 김 대리를 따라 걸었다. 워크맨을 두고 왔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세요?”
김 대리가 물었다. 퇴근 시간의 역삼동은 회사원들이 무리를 지어 횡단보도를 건넜고 골목마다 고깃집 간판이 불을 밝혔다. 열린 문 사이로 고기 굽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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