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감기 된 계절들 1화

첫 번째 트랙

by바카라방별곡

낡은 파나소닉 은색 워크맨이었다.

오른쪽 모서리는 깨져 손톱만 한 틈이 벌어져 있었다. 테이프를 넣고 뚜껑을 닫아도 금세 툭 벌어지는 탓에 누군가 노란 고무줄을 서너 번 칭칭 감아놓았다. 버튼 위에 새겨진 PLAY, STOP, REW 글자는 손때에 닳아 희미했다. 그래도 이어폰 단자만큼은 멀쩡했다. 누군가의 외투 주머니에서, 혹은 열려 있던 가방 틈에서 미끄러져 나왔을 작은 기계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파도를 타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워크맨 안에는 카세트테이프 한 개가 들어 있었다. 하얀 라벨 위에 검은 볼펜으로 적힌 글씨. My Playlist. ‘Playlist’의 마지막 철자는 잉크가 번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글씨 아래에는 볼펜으로 그린 작은 별 하나가 있었다.

오후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지하철 2호선은 퇴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객실 안에는 젖은 코트 냄새와 커피, 향수, 오래 신은 구두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천장 환풍구에서는 미지근한 바람이 웅웅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민석은 한강 철교 위를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푸른 강물 위로 자동차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강변 아파트의 창문들이 하나둘 노란빛을 켜고 있었다. 저 창문 속에는 누군가 저녁을 차리고, 누군가는 텔레비전을 보고, 누군가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다투고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회사 단체 대화방이었다.

― 내일 오전 회의 자료 수정 부탁드립니다.

민석은 화면을 잠시 바라보다가 전원 버튼을 눌러 껐다. 오늘 하루 종일 숫자와 표를 들여다본 탓에 눈알 뒤쪽이 묵직하게 당겼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뒤통수를 차가운 유리창에 기댔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대학생이 급하게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커다란 백팩을 멘 남학생은 문이 닫히기 직전 사람들 틈을 비집고 합정역에 내렸다. 문이 닫히고 지하철이 다시 움직이자, 학생이 앉아 있던 자리에 은색 물체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민석은 처음에는 휴대전화 보조배터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워크맨이었다. 민석은 손가락으로 고무줄을 살짝 건드렸다.

“요즘도 이런 걸 쓰는 사람이 있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힐끗 내려다보더니 다시 휴대전화 화면으로 고개를 숙였다. 민석은 워크맨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뒤편에는 긁힌 자국이 가득했고, 배터리 덮개에는 반쯤 뜯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주인을 찾아주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객실 어디에도 방금 내린 대학생을 아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미 지하철은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민석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분실물 센터에 맡겨야겠네.”

대학교 1학년 때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처음 샀던 카세트 플레이어가 떠올랐다. 통학 버스 맨 뒷자리에서 이어폰을 나눠 끼고 노래를 듣던 시절도 함께 떠올랐다. 그때는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듣기 위해 테이프를 앞으로 돌리고 뒤로 감고 다시 재생해야 했다. 노래와 노래 사이의 공백까지도 음악의 일부였던 시절이었다. 민석은 자신의 귀에 꽂혀 있던 무선 이어폰을 빼 주머니에 넣었다. 워크맨에 연결된 검은색 줄 이어폰은 한쪽 솜이 벗겨져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딱 한 곡만 들어보자.”

PLAY 버튼을 누르자 버튼이 뻑뻑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치익―. 오래된 테이프가 돌아가는 소리가 귓속을 간지럽혔다. 자글자글한 잡음 사이로 피아노 전주가 흘러나왔다.

민석의 손가락이 멈췄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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