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과 착각
2000년대 중반, 중국의 인터넷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정부를 칭찬하는 댓글을 하나 달 때마다 5마오, 우리 돈으로 100원 남짓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우마오당〉, 다섯 마오의 무리라고 불렀다. 정부를 비판하는 글 아래 어김없이 나타나 반박하고 싸우는 익명의 무리. 오랫동안 그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었다.
2014년, 중국 남부의 한 지방 선전 부서에서 수천 통의 내부 이메일이 유출된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게리 킹 연구진은 이 자료를 분석해 놀라운 결론을 내놓는다. 우마오당은 실제로 있었다. 그들은 1년에 4억 개가 넘는 게시물을 올리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댓글 하나에 돈을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아니었다. 대부분 업무 시간에 이 일을 하는 평범한 공무원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비판하는 사람과 싸우지 않았다. 논쟁하지도 않았다. 대신 민감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일제히 다른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라의 발전을 축하하는 글, 영웅을 기리는 글, 명절을 반기는 밝은 글. 사람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선동은 반박이 아니라 주제를 바꾸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2013년 무렵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사무실 건물에서 수백 명이 하루 12시간씩 가짜 계정 수십 개를 돌려 가며 글을 올렸다. 그들은 하나의 진실을 믿게 만들려 하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를 끝없이, 빠르게, 여러 곳에서 동시에 쏟아냈다. 미국의 한 연구소는 이것을 〈거짓의 소방 호스〉라고 불렀다. 목적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며 지쳐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속임수는 인간만의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바람까마귀는 미어캣 무리 곁을 맴돈다. 진짜 매가 나타나면 누구보다 먼저 경보를 울려 미어캣들을 구해 준다. 그래서 미어캣들은 이 새의 목소리를 믿는다. 그런데 미어캣이 맛있는 먹이를 찾아내면, 바람까마귀는 하늘에 매가 없는데도 경보를 울린다. 미어캣이 먹이를 버리고 굴로 달아나는 사이, 바람까마귀는 내려와 먹이를 가로챈다. 거짓 경보가 잦아져 미어캣들이 더 이상 속지 않으면, 바람까마귀는 목소리를 바꾼다. 다른 새의 경보를, 미어캣 자신의 경보를 흉내 낸다. 하나의 목소리가 신뢰를 잃으면 다른 목소리로 같은 거짓말을 한다. 수백 개의 가짜 계정을 돌리는 댓글 공장과 다르지 않다.
왜 이런 방법이 통하는가. 인간은 왜 이렇게 쉽게 휩쓸리는가.
1951년,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는 대학생들을 한 방에 모은다. 그리고 카드에 그려진 선 하나를 보여 주고, 옆에 있는 세 개의 선 가운데 길이가 같은 것을 고르게 한다. 누구나 맞힐 수 있는 쉬운 문제였다. 그런데 방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짜 참가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연기자였다. 연기자들은 일부러 틀린 답을 하나같이 말했다. 진짜 참가자의 4분의 3이 적어도 한 번은 다수를 따라 틀린 답을 골랐다. 그들은 눈으로 본 것보다 옆 사람의 목소리를 믿었다. 댓글 창에 같은 의견이 수십 개 달려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수십 명의 목소리라고 믿는다. 그것이 한 사람의 손가락이라는 것을 모른 채.
반복도 우리를 속인다. 1977년, 미국의 심리학자 린 해셔 연구진은 사람들에게 참인지 거짓인지 애매한 문장들을 몇 주에 걸쳐 여러 번 보여 주었다. 같은 문장을 다시 볼수록 사람들은 그것을 더 사실이라고 믿었다. 처음 들으면 의심하고, 두 번 들으면 고개를 갸웃하고, 열 번 들으면 상식이 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진실 착각 효과〉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인간은 편을 가른다. 1970년대 영국의 심리학자 헨리 타지펠은 소년들에게 추상화 두 점을 보여 주고 어느 그림이 더 좋은지 고르게 했다. 그리고 그 답에 따라 두 무리로 나눴다. 소년들은 서로 얼굴도 몰랐고, 그림 취향 말고는 아무 공통점도 없었다. 그런데도 소년들은 돈을 나눌 기회가 오자 자기 무리에게 더 많이 주었다. 심지어 자기 무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 무리와의 차이를 벌리는 쪽을 골랐다. 우리 편이 생기는 데는 그림 한 장이면 충분했다.
선동은 이 모든 것을 이용한다. 다수의 목소리, 끝없는 반복, 그리고 우리와 그들.
그런데 정말 날카로운 사실은 따로 있다.
선동당하는 사람은 늘 남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어리석은 건 저쪽 사람들이고, 나는 속지 않는다고. 나도 그랬다. 뉴스를 보며 혀를 차고, 댓글을 읽으며 저런 말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선동당한 사람들 가운데 그 순간 자신이 선동당하고 있다고 느낀 사람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자신이 진실을 안다고 믿었을 것이다. 깨어 있는 건 자신이고, 속고 있는 건 반대편이라고.
그러니 가끔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지금 이토록 확신하는 이 생각은 정말 고민 끝에 얻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 자주 들어서 익숙해진 것일까.
이 글을 읽으며 〈맞아, 저쪽 사람들이 딱 이렇지〉라고 생각했다면, 잠시 멈춰 보자.
선동은 언제나,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