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소리 없는 끈기

by모모어린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솔을 뒤집어 보면 늘 같은 것이 감겨 있다. 머리카락이다. 몇 가닥이 솔에 걸리고, 그 위에 또 몇 가닥이 걸려 단단한 끈처럼 돌돌 말려 있다. 가위로 잘라 내야 겨우 풀린다. 테이블 다리 밑에, 문틀 틈새에, 이불 솔기 사이에 끼어 있는 머리카락은 아무리 쓸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가운데 이토록 끈질긴 것은 없다.


머리카락 한 가닥은 100그램 가까운 무게를 버틴다. 사람의 머리에는 10만 가닥쯤의 머리카락이 있다. 그것을 한데 묶으면 이론상 수 톤의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다. 같은 굵기로 따지면 구리선에 견줄 만큼 질기다.


머리카락이 잘 엉키는 데에도 이유가 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머리카락의 표면은 기와지붕처럼 얇은 비늘이 겹겹이 덮여 있다. 뿌리에서 끝 쪽으로 쓸면 매끄럽지만, 거꾸로 쓸면 비늘이 걸린다. 그래서 머리카락끼리 한번 엉키면 서로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청소기의 솔은 그 비늘에 걸리기에 꼭 알맞은 모양이다.


1783년, 스위스의 과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는 머리카락의 또 다른 성질에 주목한다. 머리카락은 공기가 습해지면 조금 늘어나고, 건조해지면 다시 줄어든다. 비 오는 날 머리가 부스스해지는 이유다. 소쉬르는 기름기를 뺀 머리카락 한 가닥을 바늘에 연결해, 머리카락이 늘고 줄 때마다 바늘이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정밀한 습도계였다. 머리카락 습도계는 지금도 박물관과 기상 관측소에서 쓰인다.


1989년, 알래스카 앞바다에서 거대한 유조선이 좌초해 원유가 바다로 쏟아진다. 미국 앨라배마주의 미용사 필 매크로리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기름을 뒤집어쓴 수달의 모습에 눈이 멈춘다. 털이 기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그는 날마다 미용실 바닥에서 쓸어 내던 머리카락을 떠올린다. 그날 밤 그는 손님들의 머리카락을 스타킹에 채워 넣고, 기름을 푼 물에 담가 보았다. 몇 분 만에 물이 맑아졌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미용실에서 모은 머리카락은 매트로 엮여 바다의 기름을 닦는 데 쓰인다.


머리카락은 썩지도 않는다. 이집트의 미라에서는 3천 년 전에 땋은 머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기억한다. 한 달에 1센티미터쯤 자라는 동안, 그 사람이 먹은 것과 몸에 들어온 약물을 한 줄의 기록처럼 차곡차곡 품는다. 과학자들은 머리카락을 잘게 잘라 분석해, 그 사람이 몇 달 전에 무엇을 먹었는지 읽어 낸다. 나폴레옹의 머리카락에서는 많은 양의 비소가 검출되었다. 그가 독살되었는지를 두고 지금도 논쟁이 이어진다.


2010년, 덴마크의 과학자들은 그린란드의 얼어붙은 땅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한 움큼을 분석한다. 4천 년 전 그곳에 살았던 한 남자의 머리카락이었다. 그 머리카락에서 과학자들은 고대인의 유전체 전체를 처음으로 읽어 냈다. 남자는 갈색 눈과 짙은 피부를 가졌고, 마른 귀지를 가졌으며, 나이가 들면 머리가 벗겨질 체질이었다. 머리카락 한 움큼이 4천 년 전 한 사람의 얼굴을 되살린 것이다.


19세기 영국 사람들은 이 끈질긴 물질에 기억을 맡겼다. 가족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라 정교하게 엮어 브로치나 반지, 목걸이를 만들었다. 남편 앨버트 공을 잃은 빅토리아 여왕도 평생 그의 머리카락이 든 장신구를 지니고 다녔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도, 머리카락은 남는다.


우리는 매일 머리카락을 잃는다. 하루에 50가닥에서 100가닥. 그것들은 소리도 없이 떨어지고, 소리도 없이 바닥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쓸려 나가고, 버려진다. 우리 몸에서 가장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소리 없이 버틴다. 소리 없이 엉키고, 소리 없이 자라며 우리가 지나온 날들을 기록한다.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난 어느 날, 소리 없이 간직해 온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가장 하찮게 버려지는 것이, 가장 끈질기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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