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않는 여행자

식물은 어떻게 세상을 여행하는가

by모모어린


식물은 움직이지 못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한번 뿌리를 내린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죽는다. 그러나 식물은 지구 위에서 가장 멀리 여행하는 생명이다. 다만 자기 다리로 가지 않을 뿐이다. 식물은 바람의 날개를, 바다의 물결을, 동물의 배 속을 빌려 세상을 떠돈다.


봄날 들판의 민들레를 보자. 꽃이 지면 그 자리에 하얀 솜털 공이 맺힌다. 씨앗 하나하나에는 백 가닥쯤 되는 가느다란 털이 우산살처럼 달려 있다. 2018년 영국 에든버러 대학의 연구진은 이 솜털 위에서 신기한 현상을 발견한다. 털 사이로 지나간 공기가 씨앗 바로 위에 작은 소용돌이 고리를 만들고, 그 소용돌이가 씨앗을 공중에 붙들어 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적 없는 비행 방식이었다. 민들레 씨앗은 바람을 타고 수 킬로미터, 때로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날아간다. 남극을 뺀 모든 대륙에 민들레가 피는 이유다.


어떤 씨앗은 바다를 건넌다. 열대의 강가에는 꼬투리 길이가 1미터를 넘는 거대한 콩이 자란다. 엔타다라는 이름의 이 콩은 강물에 떨어져 바다로 흘러간다. 씨앗은 단단하고 속이 비어 있어 몇 년 동안 물에 떠 있을 수 있다. 카리브해에서 출발한 씨앗은 멕시코 만류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노르웨이의 해변에 닿는다. 유럽 사람들은 수백 년 동안 이 씨앗을 〈바다의 심장〉이라 부르며 행운의 부적으로 지니고 다녔다. 서쪽 바다 너머에서 떠밀려 온 이 낯선 씨앗들이, 대서양 건너편에 미지의 땅이 있다는 소문에 힘을 보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야자열매도 같은 방식으로 수천 킬로미터의 바다를 건너 태평양의 섬들에 자리를 잡았다.


어떤 식물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다.


스스로 쏜다. 중남미의 숲에 사는 모래상자나무는 호박처럼 생긴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마르면 껍질 속에 엄청난 힘이 쌓이고, 어느 순간 총소리 같은 폭음과 함께 터진다. 씨앗은 시속 2백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날아가 수십 미터 밖에 떨어진다. 현지 사람들은 이 나무를 〈다이너마이트 나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식물이 가장 즐겨 타는 탈것은 동물이다.


새들은 빨간 열매를 먹고 멀리 날아가 씨앗을 떨어뜨린다. 씨앗은 새의 배 속을 지나면서 단단한 껍질이 얇아지고, 배설물이라는 거름까지 챙겨 땅에 내려앉는다. 식물은 열매의 달콤한 살을 차비로 내고 동물을 고용한 것이다.


차비를 내지 않고 몰래 올라타는 씨앗도 있다.


1941년, 스위스의 공학자 조르주 드 메스트랄은 개와 함께 산바카라을 다녀온 뒤 자기 바지와 개의 털에 잔뜩 붙은 우엉 씨앗을 떼어 내느라 애를 먹는다. 궁금해진 그는 씨앗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본다. 씨앗의 가시 끝은 모두 작은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 있었다. 지나가는 동물의 털에 걸려 멀리까지 실려 가기 위한 장치였다. 그는 이 구조를 흉내 내 새로운 여밈 장치를 만든다. 오늘날 우리가 신발과 가방에 쓰는 〈찍찍이〉, 벨크로다.

개미도 식물의 일꾼이다.


제비꽃이나 얼레지 같은 식물의 씨앗에는 작은 혹이 붙어 있다. 〈엘라이오솜〉, 그리스어로 〈기름진 몸〉이라는 뜻의 이 혹은 기름과 영양분으로 가득하다. 개미를 위해 준비한 도시락이다. 개미는 씨앗을 통째로 둥지로 끌고 가 도시락만 떼어 먹고, 씨앗은 둥지의 쓰레기장에 버린다. 그곳은 흙이 부드럽고 거름이 많으며, 다른 동물의 눈에 띄지 않는 땅속이다. 씨앗에게는 더없이 좋은 요람이다. 세계적으로 만 종이 넘는 식물이 이런 방식으로 개미에게 씨앗을 맡긴다.


어떤 식물은 여행 대신 행군을 한다.


일본에서 건너온 덩굴식물 칡은 19세기 말 미국에 관상용으로 소개되었다. 이후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앞장서 심었다. 그러나 칡은 하루에 한 뼘 가까이 자라며 나무와 전봇대와 버려진 집을 덮어 나갔다. 미국 남부 사람들은 칡을 〈남부를 삼킨 덩굴〉이라 부른다. 미국 유타주의 사시나무 숲 판도는 4만 그루가 넘는 나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땅속 뿌리로 이어진 하나의 생명이다. 이 숲은 수천 년 동안 뿌리를 뻗어 새 줄기를 올리며 조금씩 영토를 넓혀 왔다.


그리고 어떤 식물은 동반자와 함께 산다. 무화과 꽃은 열매 안쪽에 숨어 있어 바람도, 나비도 닿지 못한다. 오직 손톱보다 작은 무화과말벌만이 좁은 구멍으로 들어가 꽃가루를 옮긴다. 대신 무화과는 말벌에게 알을 낳을 방을 내어 준다. 무화과 한 종마다 그 짝이 되는 말벌이 따로 있다. 둘은 수천만 년 동안 서로 없이는 살 수 없는 관계로 함께 진화해 왔다.


씨앗은 공간만 여행하지 않는다.


시간도 여행한다. 1960년대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 유적에서 대추야자 씨앗 몇 알이 발굴된다. 2005년, 한 연구자가 이 씨앗을 심었다. 2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씨앗에서 싹이 텄다. 사람들은 이 나무에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인물의 이름을 붙였다. 므두셀라.


2012년에는 더 먼 과거에서 손님이 찾아온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은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속에서 3만 2천 년 전 다람쥐가 파 놓은 굴을 발견한다. 그 안에는 다람쥐가 겨울 양식으로 모아 둔 씨앗과 열매가 그대로 얼어 있었다. 과학자들은 그 조직을 되살려 키워 냈다. 매머드가 걷던 시대의 꽃이 다시 하얗게 피어났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식물은 다른 존재들과 손을 잡는 법을 배웠다. 바람과 바다와 새와 개미와 다람쥐가 식물의 다리가 되었고, 식물은 그 대가로 열매와 꿀과 그늘과 숨 쉴 공기를 내어 주었다.


우리가 걷는 숲의 참나무 가운데 많은 수는, 어느 해 가을 다람쥐가 묻어 두고 잊어버린 도토리에서 자랐다. 숲은 다람쥐의 건망증이 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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