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가 한쪽으로만 흐를 때
건물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사람이 온다.
손을 문에 대고 잡아준다. 그 사람이 고맙다는 눈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그런데 그 뒤로 한 사람이 더 온다. 이미 잡고 있으니 놓기가 애매하다. 그 사람도 지나간다.
그 뒤로 일행인 듯한 세 명이 줄줄이 온다. 걸음이 빠르지도 않다. 나는 문을 잡은 채로 서 있다.
마지막 사람이 지나가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간다.
길게 잡아도 30초쯤이다. 아무 일도 아니다. 그런데 들어가면서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문을 잡아준 사람은 나인데, 그동안 밖에 서 있던 것도 나다.
괴로움의 원인은 대개 바깥에 있지 않다. 일어난 일 자체보다, 그 일을 어떻게 읽었는가가 괴로움을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읽는 법을 배운다. 상대를 오해하지 말자,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자.
그리고 실제로 열심히 헤아린다.
연락하기로 한 사람에게서 답이 오지 않으면 바쁜가 보다 한다. 약속이 미뤄지면 사정이 있겠거니 한다. 말이 퉁명스러우면 오늘 피곤한 모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같은 일이 나에게서 일어나면 어떤가.
내가 답장을 이틀 미뤘을 때 나는 나에게 바빴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무심했다고 한다. 내가 약속을 미루면 변명처럼 들릴까 봐 문장을 몇 번이나 고친다. 내가 퉁명스러웠던 날은 며칠씩 마음에 걸린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상대의 행동은 사정으로 읽고, 내 행동은 결과로 읽는다.
사정으로 읽으면 사람이 남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사람이다. 결과로 읽으면 잘못이 남는다. 이틀이나 답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같은 일인데 한쪽에는 사람이 남고 한쪽에는 잘못이 남는다.
우리는 이것을 겸손이라고 부르며 살아왔다. 남에게 너그럽고 나에게 엄격한 것이 성숙한 태도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잣대가 두 개인 상태다.
남에게는 해주는 말을, 자기에게는 하지 않는 상태다.
이해를 잘한다는 말은 칭찬으로 쓰인다. 실제로 좋은 능력이다. 상대의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쉽게 화내지 않고, 주변 사람도 그 곁을 편하게 여긴다.
다만 이해에는 방향이 있다.
대개 밖으로만 흐른다.
문을 잡아주는 손과 같다. 손을 대고 있는 동안 문은 계속 열려 있고 사람들은 그 문으로 지나간다. 그동안 문을 잡아준 사람만 문 밖에 있다.
이해를 상대 쪽으로 내주는 동안, 내 차례는 뒤로 밀린다.
억울한 일은 아니다. 문을 잡아준 것은 내가 한 일이고, 지나간 사람들은 부탁한 적도 없다.
다만 언제 손을 놓아도 되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