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러온 것들이 더는 눌리지 않을 때

방어벽이 풀리는 곳에서 진짜 내가 나온다

by미리나


2026년 6~7월, 신기루를 건너 영원으로 이어지는 다리

오랜만에 글을 쓴다. 그동안 좌충우돌, 나름대로 잘 지냈다. 정말로 힘들 때면 온라인카지노를 찾고 싶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하지만 도통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땐 기꺼이 사라지고 싶다는 감정적인 글만 잔뜩 토해낼 게 뻔했으니까. 고통스러울 때마다 글을 쓰고 싶다. 정확히는 '싸지르고 싶다'. 억울하다고, 나 이렇게 힘들다고, 단 한 사람이라도 제발 내 이면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그동안 참 많이도 알았고, 그만큼 나를 되돌아보았으며, 때로는 내 존재 자체에 가치가 없다고까지 생각했다.


모든 게 뜻대로 풀리는 일은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다. 뜻대로 되지 않는 걸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나는 잠시 착각 속에 살았다.


올해는 3월부터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리고 있다. 대상포진에 다리 통증, 꼬리뼈 통증까지 꽤나 호되게 고생을 치렀지만 그 와중에도 신기하게 즐거운 일들은 가득했다. 요즘은 병원을 오가며 원장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환자분들과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눈다. 이러다간 정말 병원에 정식으로 취직을 했거나, 아니면 아예 여기서 살림을 차렸다고 해도 믿을 판이다.




이런 병원이 세상에 버젓이 존재한다는 건 여전히 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 유토피아 같은 곳. 이런 의사 선생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건 더 황당하다. 의사라면 원래 진료실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을 만큼 냉혹하고 건조해야 국룰 아니던가. 그런데 환상 속 위인전에서나 튀어나올 법한 사람이 매번 진심을 다해 눈을 맞추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사람의 온기라는 게 원래 이렇게 불쑥불쑥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었던가. 닳고 닳아 무뎌진 줄 알았던 감각이 이 따뜻한 병원 공기 앞에서 자꾸만 무장해제된다. 익숙해지지 않아서 더 어쩔 줄 모르겠는 이 묘한 생활. 이러다 정말 이 병원과 사랑에라도 빠지면 그땐 정말 답도 없을 노릇이다.

이미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나를 훅 빼앗아 간 즐거운 일들이 그만큼 넘쳐났다는 뜻일 테다. 그러나 눈을 뜨자마자 통증이라는 징그러운 놈은 어김없이 출근 도장을 찍으며 온몸을 산산조각 내놓고는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넨다. 통증이 짓누르고 감정이 엉망진창인 날은 병원 갈 엄두조차 나지 않고 힘이 빠져 주저앉는다.



무릎으로 기어가 침대에 눕는다. 어느 날은 내 꼴이 너무 어이가 없어 속상할 겨를조차 없다. 하루 온종일 통증이라는 감옥에 갇혀 만기 출소를 까마득하게 기다리던 옛날에 비하면 요즘은 양반이라지만, 그래도 어쩐지 억울한 건 어쩔 수 없다.



그 지독한 놈이 잠시 딴청을 피우며 스쳐 지나가는 감질나는 틈새에 겨우 감지덕지하며 마음을 붙여본다. 그래 봤자 불시에 들이닥치는 짙은 통증 앞에선 홀로 견디기엔 너무 아릿하고 야속하게 대바카라 없이 당하고 말지만.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온 제대로 작정한 '마라맛' 악몽. 눈을 뜨고도 고약한 여파가 가시지 않아 묵직하게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느라 하루의 출발부터 진이 다 빠진다.

“이 굴레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하나.”


이제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잊을 만하면 어김없이 도지는 두려움 앞에서 나는 매번 속수무바카라으로 한참을 작아진 채 서 있다.



찌름한 악몽에서 깨어나면 순식간에 오감 깨우기 루틴에 돌입한다. 감정에 잠식되지 않으려 몸을 일깨우는 아주 고상하고 우아한 방어기제다. 욕실로 직행해 양치를 하고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넘긴다.

‘봐라, 목구멍으로 차가운 물이 넘어가잖아? 여긴 현실이야.’


협탁 위 로션을 정성스레 바르고 보들보들한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려 그 포근함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느껴지니? 이 폭신함? 너는 지금 아주 안전한 침대 위에 있단다.’




악몽에 질까 봐 아침부터 오감을 총동원해 "나 안 무서운데?" 하고 애쓰는 꼴이, 꼭 골목길에서 왈왈 짖는 조그마한 푸들 앞에서 발버둥 치는 모양새다. 물 한 모금에 구원받은 척, 로션 향기에 평정심을 찾은 척, 이불 촉감에 온 세상을 다 얻은 척하는 기만일지라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몸을 속여서라도 하루를 시작해야지. 어쨌든 차가운 물과 로션 향, 협박에 가까운 세뇌 덕분에 무사히 생환했다.



조금 찌질하면 어떤가, 살아남았으니 됐다. 그리고 가만히 주문을 되뇌어 본다.

"악몽은 밤이 만든 신기루일 뿐이야. 내 방은 나를 해치지 않아."


말이 되뇜이 되고, 되뇜이 믿음이 될 때까지 소리 내어 말하고 기도한다.




꿈의 조각들을 종이에 적어 힘껏 구겨 버린다. 손끝을 떠난 것은 종이 한 장뿐이지만 무거운 에너지를 몸 밖으로 추방하여 마음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드는 나만의 의식이다. 자기 전 보는 자극은 꿈의 재료가 되기에 잠들기 30분 전에는 스마트폰을 멀리하려 애쓴다. 집안일은 엉망일지라도 물소리나 클래식, 무해하고 다정한 에세이 한 구절로 마음의 방을 따뜻한 조명으로 채워본다.



일을 완전히 놓은 지 몇 달,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암울하다. 작년 퇴원 뒤 꼬리뼈 통증은 줄었지만, 통증이 비워낸 자리엔 무력감이 들어차 몇 달을 버텨야 했다. 3월 다시 대구로 내려와 치료 패턴을 보며 조절해 갔다. 이제는 원장님께 주사를 매일 맞고 싶다고 불안해하지 않으니 큰 발전이다.


걱정은 내일을 앞당겨 오지 못하고 오늘의 힘을 앗아갈 뿐이라는 걸 안다. 급하게 피어나는 힘은 쉽게 꺾이지만 차곡차곡 쌓인 힘은 오래 견딘다.




3년 동안 자율신경실조증과 무기력은 정말 많이 좋아졌다. 초요즘은 병원에서 늦게까지 놀다 오기도 한다. 덕분에 바보가 되어간다는 생각도, 아픈 것도 잊는 시간이 생긴다.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어떻게 되더라도 나를 받아줄 것 같은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기절하듯 녹초가 되어 2~3일은 누워서 쉬어야 하지만 행복하고 즐거우니 몸을 구박할 수도 없다.



치료나 병원 이야기를 글로 쓰다가 요즘은 영상으로 만든다. 편집하는 게 이토록 재밌을 줄 몰랐다. 체력이 야속할 뿐이다. 자고 일어나면 주 3회는 팔다리가 뻑뻑하고 힘이 풀려 과거의 증상과 공포가 나를 잠식한다. 자기 전에도, 아침에 눈을 떠도 아파서 울게 되는 날엔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다. 정상이라는 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저 반쯤이라도 정상인처럼 걸어 나가고 싶어 밖에서는 나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을 연기한다.



"어제 잘 놀던데." "아까는 괜찮아 보였는데." 누군가는 그렇게 묻는다. 그 순간에도 나는 그저 버티고 있었을 뿐인데. 왜 아픈지 모르겠다는 뉘앙스를 마주할 때 말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외로워진다. 나조차 모르기에 더는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와 다른 텐션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의 가장 외로운 고통은 나조차 그 이유를 몰라주거나 외로이 외면해 버리는 고통이다. 나 자신에게 이해받을 가치가 있는 고통만이 행복한 고통이 될 수 있다.



아무리 깊고 무거운 아픔일지라도 나를 온전히 바라보며 "그동안 참 애썼다. 네가 왜 아팠는지 내가 다 안다" 하고 안아줄 수 있다면 그 고통은 단순한 상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어서 사라지면 좋겠다.



어느 날 아침, 존재의 온기가 채 스미기도 전에 발끝 어딘가 깊고 어두운 구멍에서 시작된 고통이 뼈와 신경, 세포의 마디를 칼처럼 뚫고 지나간다. 고통은 몸이라는 얇은 껍질을 넘어 영혼이라 불러도 좋을 안쪽까지 닿아 무거운 침묵으로 눌러버린다. 고통은 고독하며 그 무력함의 심연으로 나를 끌어내리려 한다.



그러나 칠흑 같은 암전 한가운데서 내 영혼은 지고한 진실 하나에 눈을 뜬다. 이토록 눈부시게 강렬한 통증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지독하리만치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신성한 증거라고. 무력함이라는 허무에 나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영혼의 의지를 불러일으켜 몸을 바로 세운다. 비록 흙으로 돌아갈 이 육신이 다시 비틀리고 바닥에 주저앉을지라도. 고통이라는 수수께끼를 뚫고 일어서려 했던 그 안간힘이야말로 내 영혼이 가장 맑게 깨어 있던 시간이었다.




삶은 끊임없이 끊어지고 나는 끊임없이 넘어졌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음속엔 보이지 않는 다리 하나가 놓였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다리. 아무도 놓아주지 않았기에 내가 놓았다. 나는 얼마나 비할 데 없이 강인한 존재인가. 이 외침만은 꺾이지 않았다. 넘어짐이 있었기에 다리를 놓을 수 있었고, 끊어짐이 있었기에 이어 붙일 수 있었다. 고통은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것 같지만, 나를 깨우는 스승임에 틀림없다.



마음속에 마귀가 빼곡히 들어앉은 것 같아 원장님께 털어놓았다. 나에게는 태풍처럼 크고 무서운 일이었는데, 원장님은 웃으시며 치료 초기에 자주 들었던 "병아리!"라는 따뜻한 잔소리를 건네셨다.



나의 태풍이 웃어넘길 수 있는 작은 일로 축소된다고 생각해 예전 같았으면 서운함과 외로움이라는 파도에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토록 크게 느껴졌던 것이 실은 병아리만큼 작은 것이었다는 사실이 내가 그 무게를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처럼 느껴져 뿌듯했다.



원장님 앞에서는 평소 애써 제어하던 방어벽이 무너진다. 이곳이 안전하다고 몸이 먼저 알아채기에, 머리로 정리되지 않은 말들과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는 고백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온다. 당황스럽고 입을 꿰매고 싶을 때도 있지만 원장님은 내가 쓴 글을 자꾸 반복해서 읽으라고 눈을 크게 뜨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지나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힘이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다시 발견하라는 뜻이었으리라.




오랜만에 예전 글을 다시 읽었다. 그때의 오만함과 확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부끄러움은 성장의 증거다. 우울증이라는 진단명을 임의로 붙였던 건 그 프레임에 갇히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날마다 나를 향하던 모진 화살과 비난을 멈출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내가 우울해서 이러는구나.” 그 이름 하나를 붙여주어야만 내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이 아닌 질환의 증상으로서 비로소 나를 연민의 눈으로 불쌍히 여겨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울과 온몸을 지배하는 통증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고 반나절을 날려버렸다. 원장님은 생각이 깊어질수록 부정적 패턴을 재생하는 뇌의 고리를 의도적으로 끊어야 한다고 하셨다. AI가 명확한 프로토콜을 수행하듯 의도적이고 건설적인 언어를 반복 입력해 새로운 회로를 만들고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분비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비록 오늘은 음식조차 삼키기 힘들어 그저 이렇게 글을 적어 내려가고 있지만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7월 말, 원장님은 3개월 넘게 이어진 통증이라며 이제는 섬유근육통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증을 내리셨다. 그리고 그동안 그토록 약 쓰기를 아끼시던 분이 이제는 약과 수면제를 함께 먹어보자고 먼저 제안을 하신다.


​원장님께서 이 약들을 장기간 쓰지 않으실 거라는 걸 안다. 나 역시 그 작은 알약들에 마냥 의존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통증이 극에 달할 때 수면제나 우울증 약이 몸을 다독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들 하는데 과연 내게는 어떤 바람을 가져다줄지 모르겠다.




내가 너무 힘들어 당장이라도 약을 먹고 싶다고, 제발 살려달라며 울며불며 매달릴 때 느꼈던 그 절박함과, 막상 원장님의 입에서 먹어보자라는 말이 나왔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참 다르다.


​막상 약봉지를 손에 쥐자니 덜컥 머뭇거려지는 이 마음. 참 청개구리 같기도 하지. 이 거부감은 어쩌면 약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은 내 삶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마지막 자존심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괴롭히는 통증과 불편함을 잠시 내려놓고 쉬어가려 한다.


생각을 끊어내고 나를 살리는 고결한 언어를 다시 입력하자.


Interrupt the thought. Repeat the prompt.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