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은 마음이 안전하냐고 묻는 뇌의 언어이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가 통증을 결정한다

by미리나


​통증이 심한 날은 혼자 있거나 불편한 사람과 있을 때 몸이 알아서 비상벨을 터뜨린다.​뇌라는 녀석은 눈치가 빠르다 못해 병적으로 예민하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거나, 그다지 친하지 않아 영혼의 영점 조절이 안 되는 사람과 한 공간에 갇히면 뇌는 즉시 비상벨을 눌러댄다.


​“여기 안전지대 아니다. 긴장해.”


​그러면 자율신경은 눈치 빠르게 교감신경을 풀가동하고,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이라는 스트레스 즙을 있는 대로 짜낸다. 온몸의 근육은 빨래를 짤 때처럼 비틀려 딱딱해지고, 혈관은 졸아들어 좁아진다.




​통증 센서의 볼륨이 최대로 올라간다. 평소 같으면 “좀 뻐근하네” 하고 넘어갈 자극도, 이 순간만큼은 아주 예리한 송곳으로 찌르는 기분이 된다. 감정과 통증이 같은 신경 회로망을 나눠 쓰는 게 확실하다. 기분이 별로면 몸도 진짜 아프다. 뇌는 억울함을 참지 않는다.



​반대로 최애의 사람들과 있을 때 몸은 통증 수신 거부를 한다.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 내 밑천을 다 보여줘도 안심이 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뇌는 비로소 경계를 푼다.


​“이제 누워도 되는구나.”


​뇌가 부교감신경을 작동시키면 내분비계는 기다렸다는 듯 옥시토신과 도파민을 내놓는다. 그리고 천연 진통제인 엔도르핀을 폭포수처럼 퍼부어 척수와 뇌 사이에 있는 ‘통증의 문’을 쾅 닫아버린다.


몸에 염증이 부글부글 끓고 있어도 뇌가 통증 신호를 아예 ‘

스팸 처리해 버리기 때문에 나는 내 몸이 멀쩡하다고 착각하게 된다.





​나를 온전히 수용해 주는 존재는 그 자체로 훌륭하고 돈 안 드는 생물학적 마약이다. ​문제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여럿이 몰려오거나 수다의 데시벨이 올라갈 때 발생한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한 신경계를 가진 사람에게 감각의 과부하는 쥐약이다.



​통증이 매운맛일 때 한두 명과의 깊은 티키타카는 치료제지만 세 명만 넘어가도 뇌는 ‘

분위기라는 이름의 데이터 폭탄을 맞는다. 아무리 애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해도 대화의 틈을 파고들 타이밍을 재거나 산만해진 공기를 견디는 순간, 뇌는 은밀하게 에너지를 갈아 넣으며 다시 방어태세를 갖춘다.


​“집에 가고 싶다.”


​잠가두었던 ‘통증의 문’이 열려, 천국이었던 모임이 순식간에 몸살의 현장으로 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결국 통증이라는 건, 뇌와 신경계가 지금 이 환경을 얼마나 ‘안전’하게 느끼는지 ‘위협’으로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는 지극히 솔직한 성적표다.





​혼자일 때 느끼는 고독과 불편한 사람이 주는 긴장감은 신경계에 독극물처럼 작용해 통증을 부풀린다. 그러나 온전한 내 편이 주는 안정감은 그 어떤 알약보다 확실하게 통증을 꺼버린다.


​그러니 “마음 편할 땐 안 아픈데, 나 혹시 엄살인가? 정신병인가?” 하며 스스로를 검열할 필요가 없다.



뇌는 꾀병을 부리는 게 아니다. 오직 진짜 안전한 관계에서만 진통제 버튼을 눌러주는 까다롭고 솔직한 독재자일 뿐이다.


​병보다 먼저 회복해야 할 것은 “나는 지금 안전하다”라고 느끼는 생명의 감각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안전한가? ​요 며칠, 나는 세상이 너무 위험하다고 느끼며 힘들어했다. 악몽에 시달리고, 눈을 뜨면 흐느껴 울며 시작하는 아침이 괴로웠다. 참다 참다가 오전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 또한 버거웠다.


​


오랜만에 또 열이 났다. 예전처럼 다시 비상 상황이 시작될까 봐 겁이 났다. 원장님이 열이 몇 도였냐고 물으셨고 나는 37.9도라고 말씀드렸다. 다시 통증과 열이 시작되면 어떡하냐고 조바심을 내자 원장님은 무슨 소리냐라며 넘기셨다. 사실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풀로 주사를 놓아주셨다고 한다.


​‘안전하다.’


열도, 주사도 참 오랜만이다.
​‘오랜만’이라는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본다. ​시간을 본다.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계속 흘러온 시간. 나는 아직 그 시간의 깊이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나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 어둡고 힘들었던 때를 버텨내고 이미 지나온 사람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매일 조금씩 그 사실을 다시 믿어가는 일이다.




​삶은 늘 이렇게 시험하는 것 같다. 완전히 끝났다고 확신을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며 절망에 빠뜨리지도 않으면서 그 사이의 좁은 자리에서 오늘 하루를 또 살아보라고 권한다.



2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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