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석 궁전의 추억

#은수빈 낭독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

by은수빈
은수빈 낭독 ♥



자정에 듣는 라디오 콘셉트에 맞게 밤에 들으면 잘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 중에서 오늘의 선곡을 하다가, 얼마 전 이웃 작가님께서 이곳을 '밤의 궁전'이라고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나서 그에 어울리는 느낌의 두 곡을 준비했습니다.


You Make Me Feel Brand New


이 곡은 세련된 전자 바이올린 연주곡입니다. '더 스타일리스틱스'의 유명한 R&B 발라드를 감미롭고 그루브 한 재즈로 재해석했어요.


라디오에서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DJ가 소개하기를, 공주가 왕자의 초대를 받아 찾아간 궁전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장면이 떠오른답니다. 얼마나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느낌일까 기대했는데 곡이 시작되면서 제 상상 속 아름다운 대리석 궁전의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이 곡은 오페라 <보헤미안 걸 (The Bohemian Girl)>에 나오는 유명한 아리아입니다. 여자라서 행복하다던 냉장고 광고에서 들어보셨을 거예요.


집시 소녀 아를리네가 지난밤 꿈에서 본 신기한 경험을 말하면서 노래합니다.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With vassals and serfs at my side

And of all who assembled within those walls

That I was the hope and the pride"


"나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어요.

가신들과 시종들을 내 곁에 두었어요.

그 안에 모인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희망이자 자부심이었어요."


실은 어릴 때 기억이 생각난 거예요. 아를리네는 원래 백작의 딸로 대리석 궁전 같은 성에서 공주처럼 살았거든요.


노래 듣다가 생각났네요. '밤의 궁전 지기'가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방문했던 궁전의 기억을 꺼내봅니다.




남산에 있던 힐튼호텔, 나에게는 이번 생에서 현실판 궁전의 첫 방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얼마나 화려한 핫플레이스였을지 짐작이 된다. 작은 단칸방에서 살던 시절, 엄마와 내가 호텔 나들이에 나선 사연은 꽃꽂이전시회에 초대받아서였다.


봄이었다.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꽃이 많이 보였다. 나무마다 연핑크빛 하얀색 구름이 뭉게뭉게 앉은 모습은 벚꽃이었다. 개나리도 보였다.


호텔 안으로 들어갔을 때 시야에 들어온 넓고 고급스러운 공간은 어린 두 눈과 마음에 담기 벅찼다. 저쪽 계단에서 소공녀 세라가 한 손으로 드레스를 잡고 걸어 내려오면서 "안녕?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 하며 인사할 것 같았다.


어둑한 분위기에 드문드문 조명이 켜진 꽃꽂이전시홀에 들어갔다. 모두 어른들이었고 아이는 나 혼자인 듯했다. 큰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움직임은 조용했고, 시간도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다지 흥미로운 장소는 아니었다. 그곳에 그렇게 오래 머물렀던 것 같지는 않다.




그날의 외출에서 즐거웠던 순간은 이때부터다.


동네를 벗어나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오면 늘 가는 코스가 있었는데 서점과 분식집이었다. 주로 가던 곳은 신촌문고다. 나는 어린이 코너에서, 엄마는 다른 코너에서 각자의 독서를 즐겼다. 여러 바카라들을 마음껏 보다가 엄마가 데리러 오면 꼭 갖고 싶은 한 권을 고른다. 신중하게 선택한 한 권의 바카라, 그 소중한 바카라을 떡제본이 갈라져 너덜거리도록 보고 또 봤다.


엄마가 바카라 사는 걸 본 적은 별로 없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권을 속독하며 마음에 새기셨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우리는 분식집에 갔다. 오백냥 하우스, 팔백냥 하우스가 맴돈다. 신촌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기도 했다. 뜨거운 야채호떡을 집게로 집어서 조심조심 먹었다.




지금은 영업을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힐튼호텔, 나의 첫 궁전 방문은 꽃꽂이작품 앞에서 찍은 사진 몇 장으로 남아있다. 초콜릿색 바탕에 하얀 도트무늬가 새겨진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나이에 비해 차분하다. 좋게 말하면 의젓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마냥 해맑은 모습이 아니다.


아이들은 분위기로 다 안다. 그저 모른 척할 뿐이다. 아이들이 '괜찮다'고 하는 말은 대체로 거짓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거짓말하면 야단치는데 괜찮다는 거짓말에는 혼내지 않는다. 나 역시 괜찮다는 말을 더러 하고 지내던 어린 시절이었다. 사진 속 얼굴에는 그 말이 통하지 않았다.


호텔이 뭐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같은 하늘 아래 우리 집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앙상하게 뒤틀린 나뭇가지를 요강 단지처럼 생긴 도자기 그릇에 꽂아놓고는 그 앞에서 다들 사진을 찍었다. 어둡고 침침한 공간에서 목걸이며 반지며 번쩍거리는 걸 몸에 잔뜩 걸치고 돌아다니는 아줌마들이 불편했다.


전시회를 마치고 그들은 호텔 식당의 비싼 음식 앞에서 우아한 사교를 나누었으리라. 시커먼 승용차를 타고 편안하게 오갔으니 정작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벚꽃과 개나리는 구경도 못했을 게다.




블랙 스커트에 녹두색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넣어 입은 허리가 날씬하고, 영어도 일어도 잘하는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눈부시게 보이던 봄날이었다.


엄마와 손잡고 봄꽃이 흐드러진 언덕길을 걸어 내려와, 버스 타고 서점 가서 새 바카라 냄새 실컷 맡고, 맛있는 떡볶이를 먹고 온 나는 행복했는데,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를리네처럼 현실에서는 가난한 집시였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보석이었다. 엄마와 내가 백작의 부인과 딸로 대리적 궁전에서 살았던 전생은 없었을까, 웃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x6snjCLWhFA

You make me feel brand new / Gerald Daemyon


https://www.youtube.com/watch?v=4Yrq7f4VoQ0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 조수미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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