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과 끝을 잘라내
원근을 잃어버린 비에 젖은 가을이
그림자들과 떨고 있다
붉어질 수 있을 때 붉어지고
물들 수 있을 때 물드는 일은
자기와 자기가 제법 어울리는 뭉클함
지구에서 산다는 것은
태초부터 존재하는 혼돈이
각자의 몫으로
있는 힘껏 흔적을 남기는 한바탕 꿈
어쩌면 지금이 그때인지
여기가 거기인지
내가 나인지도 모를 일
인생은 낡고 오래된 가죽옷을 입고
어느덧 훌쩍 커버린
외로움과 나란히 앉아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저절로 위로가 되는 사랑 하나
풍경으로 남긴 채
다리를 꼬며 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