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대답하기 전에 한 번쯤 생각해 보려고 한다. 정말 괜찮은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지금 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한 뒤 대답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마음먹은 것과 실제로 그렇게 하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얼마 전에도 누군가 부탁을 했다. 잠깐 고민할 틈이 있었는데 입에서는 익숙한 대답이 먼저 나왔다.
"네, 괜찮아요."
대화가 끝나자마자 생각했다.
'아, 또.'
사실 그날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시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탁을 받는 순간에도 이것까지 하면 조금 빠듯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상대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안 된다고 하기에는 할 수 있을 것 같고, 된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럽다. 생각해 보겠다고 하기에는 이 정도 일로 시간을 끄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이럴 때 내가 가장 잘하는 대답이 나온다. "네." 참 빠르다. 내 마음이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대답은 벌써 끝나 있다. 예전 같았으면 그대로 했을 것이다. 조금 바빠지고, 조금 피곤해져도 내가 하겠다고 했으니 하면 된다. 실제로 그렇게 해온 일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은 한 가지가 달라졌다. "네."라고 말한 뒤의 마음이 보인다.
'사실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좀 힘든데.'
'왜 또 바로 대답했지?'
예전에는 부탁받은 일을 어떻게 할지만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가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 조금 답답해진다. 알면서 왜 또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은 꼭 거창한 부탁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이것 좀 해줄 수 있어?", "시간 조금만 바꿔도 괜찮지?", "네가 하는 김에 이것도 부탁해도 될까?" 대부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못 하는 일이 아니니 거절할 이유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또 "네."라고 한다.
그런데 꼭 못 해야만 거절할 수 있는 걸까. 하기 싫어서, 피곤해서, 오늘은 여유가 없어서 어렵다고 말하는 건 왜 그렇게 힘든 걸까. 아직도 나는 거절하려면 상대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 재미있는 건 다른 사람이 거절할 때다. "미안한데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아."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다. '그렇구나.' 하고 끝이다. 그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싫어해서 거절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른 방법을 찾거나 다음에 부탁하면 된다. 그런데 내가 거절할 차례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대가 서운해하면 어떡하지. 내가 너무 야박해 보이나. 이 정도도 못 해주나 싶을까. 혼자 이야기를 몇 단계나 앞서간다. 남의 "아니요."에는 그렇게 너그러우면서 내 "아니요."에는 왜 이렇게 엄격한지 모르겠다.
그래도 예전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적어도 이제는 "네."라고 말하고 나서 마음이 불편하면 그걸 모른 척하지 않는다. 또 그랬다고 자바카라하기보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본다. 아직 거절이 어려웠구나.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게 불편했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아직은 어색했구나. 오랫동안 익숙했던 대답이 몇 번 마음먹었다고 바로 바뀌는 것도 이상할 테니까.
아주 가끔은 달라질 때도 있다. 부탁을 받고 바로 "네."가 나오려는 순간, 잠깐 멈추고 말한다.
"확인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말하고 나면 별것도 아니다. 상대도 그냥 "네."라고 한다.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관계가 어색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면 조금 허무하다. 나는 그 짧은 말을 왜 그렇게 어려워했을까.
아마 앞으로도 또 "네."라고 말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집에 와서 '또 그랬네.' 싶을 때도 있을 테고, 괜히 일을 하나 더 만들어 놓고 후회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날의 나를 실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예전에는 "네."라고 대답한 뒤 곧바로 상대의 일을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 뒤에라도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오늘은 하기 싫었구나. 조금 버거웠구나. 다음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어쩌면 달라진다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아니요."를 잘하게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 "네."라고 말해 놓고 뒤늦게 알아차리는 날도 있고, 어느 날은 대답하기 전에 잠깐 멈출 수도 있다. 그러다 아주 가끔 다른 말을 해보는 날도 생긴다. 요즘 내가 하는 연습은 그 정도다.
"네."라고 말하지 않는 연습이 아니라, 그 말을 하기 전에 내 마음에도 한 번 물어보는 연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