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맞아

해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17화. 네가 맞아

‘그 여자는 아직도 내가 다른 여자를 찾는 줄 알아.’

해원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바로 위에는 더 위험한 문장이 있었다.

‘5년이나 봤는데 어떻게 포기해.’

5년.

해원과 태헌이 알고 지낸 시간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했고, 자신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두려웠다.

해원은 몇 번이나 답장을 쓰다 지웠다.

‘누군데?’

너무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아 지웠다.

‘혹시 나야?’

이건 더 못 보내겠다.

결국 해원이 보낸 것은 엉뚱한 한마디였다.

‘장 다 봤어?’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해원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미쳤다. 해원.”

하필 장은 무슨 장이야.

잠시 후 태헌의 답이 왔다.

‘갑자기?’

‘명절 장 보러 다닌다며.’

‘그 얘기하고 싶어?’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무슨 얘기해?’

태헌에게서 답이 없었다.

1분.

2분.

3분.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았을 몇 분이 길었다.

그러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였다.

태헌.

해원은 화면을 보다가 받았다.

“왜?”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태헌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긴.”

“바쁘다며.”

“바쁜데 전화했어.”

“왜?”

“너 도망가잖아.”

해원이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뭘 도망가.”

“내가 조금만 진지한 얘기 하면 딴소리하잖아.”

“아닌데?”

“아니긴.”

태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해원아.”

그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해원의 가슴이 이상하게 내려앉았다.

“응.”

“모르겠어?”

해원은 알았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싶었다.

“뭘?”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태헌이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약간의 체념도 섞여 있었다.

“진짜 어렵다, 너.”

“그러니까 쉬운 여자 만나.”

말이 떨어지자마자 후회했다.

또 밀어냈다.

태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해원이 먼저 입을 열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싫어.”

태헌이 말했다.

“뭐가?”

“쉬운 여자 만나는 거.”

“왜?”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어려운데 어떻게 해.”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었다.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밖에서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흘러가는데, 해원에게는 방금 아주 큰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태헌아.”

“응.”

“그 여자…….”

말끝이 흐려졌다.

태헌이 기다렸다.

“누군데?”

결국 물었다.

태헌이 헛웃음을 쳤다.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해?”

“말 안 하면 어떻게 알아.”

“너 알잖아.”

“몰라.”

“알면서.”

“모른다니까.”

또 침묵.

그리고 태헌이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너야.”

해원은 눈을 감았다.

짧은 두 글자가 이상할 만큼 깊게 들어왔다.

너야.

화려한 고백도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어떤 말보다 선명했다.

“해원.”

“왜.”

“네가 맞아.”

해원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울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누군가에게 선택받는 일이 이렇게 낯설었나.

오래 살아오면서 많은 역할을 했다.

딸이었고.

엄마였고.

누군가의 아내였고.

일하는 사람이었고.

버텨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태헌은 그 많은 이름을 다 떼어내고 오직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원.

그 여자.

“왜 나야?”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태헌이 잠시 생각했다.

“글쎄.”

“그것도 몰라?”

“예뻐서라고 하면 믿을래?”

“끊는다.”

태헌이 웃었다.

“봐. 이럴 줄 알았어.”

“장난치지 말고.”

태헌의 웃음이 멈췄다.

“네가 네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서.”

해원은 가만히 들었다.

“힘들어도 남한테 기대려고 하지 않고, 자기 일은 자기가 하고.”

“그게 뭐가 좋아.”

“좋아.”

“미련한 거지.”

“그것도 맞고.”

“야.”

“근데.”

태헌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러면서도 안 무너지는 척하는 게 자꾸 보여.”

해원의 손끝이 굳었다.

“나 안 힘들어.”

“또.”

“진짜야.”

“해원아.”

“왜.”

“나한테까지 그러지 마.”

그 말에 해원은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힘들다고 말하는 것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감정이지만,

힘들다는 말은 자신의 약한 곳을 보여주는 일이니까.

해원은 평생 그것을 잘하지 못했다.

“나 지금 끊어야 돼.”

태헌이 말했다.

“왜?”

“다음 집 가야지. 아직 몇 군데 남았어.”

해원이 웃었다.

“그러니까 누가 일곱 군데나 다니래.”

“어른들이 기다리잖아.”

“운전 조심해.”

“응.”

태헌이 전화를 끊으려다 말했다.

“해원아.”

“응.”

“대답은 천천히 해.”

“무슨 대답?”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거.”

해원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나 대답하라고 안 했는데?”

“언젠가는 해야지.”

“싫으면?”

“그것도 대답이고.”

“그러면?”

“받아들여야지.”

그 말이 뜻밖이었다.

해원은 태헌이라면 조금 더 밀어붙일 줄 알았다.

자신감 있는 사람이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냥 포기한다고?”

“네가 싫다는데 내가 뭘 해.”

태헌은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좋아하는 거랑 가지는 건 다른 거잖아.”

해원은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좋아하는 것과 가지는 것은 다르다.

젊었을 때는 몰랐다.

좋으면 가져야 하는 줄 알았고,

사랑하면 함께 있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지 못하면 실패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사랑에도 예의가 필요했다.

상대의 마음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어른의 사랑인지도 몰랐다.

“끊어.”

해원이 말했다.

“알았어.”

“운전 조심하고.”

“응.”

“밥도 먹고.”

“응.”

“그리고…….”

“그리고?”

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나도 생각해 볼게.”

전화기 넘어가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태헌이 말을 잃은 모양이었다.

해원이 웃었다.

“왜 말이 없어?”

“좋아서.”

“뭐가.”

“네가 도망 안 가서.”

해원은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빨리 끊어.”

“알았어.”

전화가 끊겼다.

해원은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집 안에는 정리하다 만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버릴 것.

남길 것.

누군가에게 줄 것.

해원은 바닥에 앉아 물건들을 하나씩 다시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웃었다.

사람 마음도 이렇게 분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릴 마음.

남길 마음.

놓아줄 사람.

곁에 둘 사람.

그런데 태헌은 어디에 놓아야 할까.

해원은 작은 상자 하나를 닫다가 손을 멈췄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까운 사람.”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다.

해원은 아들에게서 연락을 받고 상봉 쪽으로 나갔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주차가 복잡할까 봐 서둘렀더니 너무 빨리 와버렸다.

차 안에 혼자 앉았다.

아들은 여자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여자친구는 러시아 사람이었다.

채식을 한다고 했다.

아들은 그녀와 함께 살면서 먹는 것도 조금씩 달라졌다고 했다.

버섯도 안 먹고.

마늘도 안 먹고.

파도 양파도 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해원은 웃었다.

사랑의 힘이 참 크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먹던 것도 바꾸고,

생활도 바꾸고,

자신의 습관까지 조금씩 고친다.

해원은 운전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바라봤다.

문득 태헌이 생각났다.

나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

태헌은 나에게 무엇을 바꾸라고 할까.

그때 메시지가 왔다.

태헌이었다.

‘뭐 해?’

‘아들 기다려.’

‘어디?’

‘상봉.’

‘혼자?’

‘응.’

잠시 뒤 태헌이 물었다.

‘한 시간이나?’

해원은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아?’

‘너 원래 약속 있으면 일찍 가잖아.’

해원은 한동안 그 문장을 바라봤다.

그랬다.

태헌은 알고 있었다.

해원이 약속보다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커피는 뜨거운 것보다 미지근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여행 갈 때 짐을 거의 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것도.

피곤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도.

그리고 마음이 흔들리면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까지.

5년.

그 시간 동안 자신은 태헌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해원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태헌아.’

‘응.’

‘너는 내가 그렇게 오래 좋았어?’

한참 답이 없었다.

해원은 괜히 물었다 싶었다.

그때 답장이 왔다.

‘처음부터는 아니야.’

해원이 피식 웃었다.

솔직한 인간.

곧 다음 메시지가 왔다.

‘어느 순간부터 여자로 보였어.’

해원의 웃음이 사라졌다.

‘언제?’

이번에는 꽤 오래 답이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메시지가 왔다.

‘제주에서.’

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제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을 더듬었다.

몇 년 전.

태헌과 해원이 지금처럼 가까워지기 훨씬 전.

제주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함께했던 하루가 있었다.

해원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간 하루였다.

그런데 태헌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제주에서 언제?’

해원이 물었다.

태헌의 답은 짧았다.

‘기억 안 나?’

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기억 저편에서 오래된 장면 하나가 아주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가 오던 제주.

젖은 운동화.

작은 우산 하나.

그리고 자신에게 우산을 기울여주던 한 남자.

그 남자가 태헌이었다.

1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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