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16화. 가까운 사람

‘다음에는 조금 더 욕심내도 돼?’

태헌이 보낸 그 한 줄은 며칠이 지나도 해원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밤,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손을 잡았고.

서로를 오래 바라봤고.

태헌이 조금 가까이 다가왔고.

해원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그러자 태헌은 정말 거기서 멈췄다.

그게 오히려 해원을 더 흔들었다.

젊었을 때 만났던 남자들은 멈추라는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싫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다른 뜻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했고, 여자의 망설임을 허락이라고 착각하기도 했다.

태헌은 달랐다.

멈추라고 하면 멈췄다.

그러면서도 돌아서지는 않았다.

기다렸다.

해원이 다시 한 걸음 다가올 때까지.

어쩌면 해원이 태헌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몰랐다.

그날 아침.

해원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태헌에게서 온 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잘 잤어?’

별것 아닌 말이었다.

그런데 해원은 웃었다.

‘응.’

답장을 보내려다 한 줄을 더 적었다.

‘너는?’

보내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의 아침이 궁금해진 것이.

곧 답장이 왔다.

‘잘 잤지.’

그리고 바로 한 줄이 더 왔다.

‘꿈도 좋았고.’

해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꿈?’

‘말 못 해.’

‘그럼 말하지 마.’

‘네가 나왔는데?’

해원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아?’

해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전혀.’

태헌의 답은 빨랐다.

‘거짓말.’

해원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이 남자는 참 이상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보다 훨씬 어른 같다가도, 이렇게 장난을 시작하면 영락없이 한 살 어린 남자였다.

‘아침부터 까불지 마.’

‘한 살밖에 차이 안 나.’

‘한 살이 어디야.’

‘그러니까 누나.’

해원의 표정이 굳었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죽을래?’

태헌에게서 웃는 이모티콘이 여러 개 날아왔다.

해원도 웃었다.

오전이 지나고 점심 무렵이 되었을 때 태헌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사진 한 장이었다.

도로.

그리고 멀리 보이는 산.

‘어디야?’

해원이 물었다.

‘장 보러.’

‘뭘 그렇게 멀리 가?’

‘명절이잖아.’

‘몇 군데 가는데?’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일곱 군데.’

해원은 눈을 크게 떴다.

‘미쳤네.’

‘겁나 힘들어.’

해원은 피식 웃었다.

여행을 다닐 때의 태헌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몇 주씩 외국에 머물고, 낯선 곳을 돌아다니고, 마음에 드는 곳에서는 며칠 더 머물렀다.

회사도 그가 없어도 돌아갔다.

시간도 있었다.

돈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일일이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삶.

해원은 가끔 그런 태헌이 부러웠다.

그런데 명절이 되니 이 집 저 집을 챙기느라 일곱 군데를 돌아다닌단다.

‘안 외롭겠네.’

해원이 보냈다.

태헌의 답이 왔다.

‘바쁜 거랑 안 외로운 건 다른 거야.’

해원의 손이 멈췄다.

또 그 말이었다.

혼자 잘 노는 사람이 안 외로운 건 아니다.

전에 태헌이 했던 말.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태헌이라는 남자는 혼자 있는 데 익숙한 것이지, 외롭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다.

잠시 뒤 태헌이 물었다.

‘너는 뭐 해?’

‘집 정리.’

‘또?’

‘이번 추석은 그냥 집에 있으려고.’

‘왜?’

해원은 한참 생각하다 솔직하게 적었다.

‘몸도 마음도 좀 지친 것 같아서.’

이번에는 답장이 늦었다.

태헌이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래. 쉬어.’

그리고 조금 뒤.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해원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쉬울 것이다.

하지만 해원에게는 어려웠다.

늘 뭔가를 해야 했다.

일을 해야 했고.

집을 정리해야 했고.

누군가를 챙겨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고.

내일을 준비해야 했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불안했다.

해원은 답했다.

‘집이라도 정리하려고.’

‘뭘 그렇게 정리해.’

‘좀 가벼워지려고.’

‘왜?’

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적었다.

‘그래야 어느 날 갑자기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보내고 나서 스스로도 그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몰랐다.

제주일 수도 있었고.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작은 도시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냥 바다가 보이는 곳.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태헌에게서 답이 왔다.

‘그럼 떠나.’

해원이 웃었다.

‘어디로?’

‘아무 데나.’

‘혼자?’

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

‘왜 혼자 가.’

해원의 심장이 아주 조금 빨라졌다.

‘그럼?’

숫자 1이 사라졌다.

태헌은 읽었다.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해원은 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이 남자는 꼭 이럴 때 사람을 기다리게 했다.

몇 분 뒤 진동이 울렸다.

‘카라반 여행 해봤어?’

해원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카라반?

‘한 번도.’

‘한번 해봐.’

‘너 아직 가지고 있어?’

‘응.’

‘운전은?’

‘내가 하지.’

해원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몇 명이서 가는데?’

이번에는 태헌의 답이 빨랐다.

‘나 혼자.’

해원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혼자.

그 말이 왜 좋았을까.

곧이어 태헌이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안쓰러우면 주변 여자들한테 연락해 봐.’

해원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강태헌이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 마음을 묘하게 만들어놓고 꼭 이런 식으로 빠져나갔다.

‘많을 듯^^’

일부러 가볍게 답했다.

‘뭐가?’

‘너랑 여행 갈 여자.’

‘1도 못 만나봤는데.’

해원은 화면을 보며 웃었다.

‘이제 직접 대시해. 마음에 드는 사람 있으면.’

보내고 나니 묘했다.

정말 태헌이 다른 여자에게 대시한다면?

예쁘고 젊은 여자.

여행을 좋아하고, 태헌의 생활을 이해하고, 돈도 밝히지 않는 여자.

그런 여자를 만나면?

해원의 웃음이 조금씩 사라졌다.

자신이 소개해주겠다고 해놓고 왜 기분이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태헌에게 메시지가 왔다.

‘러시아 여자도 괜찮던데.’

해원이 피식 웃었다.

아들의 여자친구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소개해줘?’

‘해주기나 하고 얘기해.’

‘직접 찾아.’

‘싫어.’

‘왜?’

한참 뒤 답이 왔다.

‘귀찮아.’

해원이 웃었다.

‘결혼할 여자를 찾는다며.’

이번에는 답이 없었다.

조금 후.

‘찾는다고 찾아지냐.’

해원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럼?’

태헌의 답은 한동안 오지 않았다.

해원은 집 정리를 계속했다.

옷을 버리고.

오래된 서류를 정리하고.

언젠가 쓸 거라며 쌓아놓았던 물건을 상자에 담았다.

한참 뒤 휴대전화가 울렸다.

태헌이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 있나 싶기도 하고.’

해원의 손이 멈췄다.

그 문장을 읽었다.

다시 읽었다.

무슨 뜻이지?

해원은 물어보고 싶었다.

가까이에 누가 있는데?

그 여자가 누구인데?

하지만 묻지 않았다.

대신 장난스럽게 답했다.

‘그럼 가까이서 찾아.’

태헌은 읽었다.

그리고 한동안 답이 없었다.

해원은 또 기다렸다.

이제는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알 것 같았다.

태헌의 대답이 아니라,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

한참 뒤 메시지가 왔다.

‘찾은 것 같기도 해.’

해원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누구냐고 물어야 할까.

모르는 척해야 할까.

태헌이 또 메시지를 보냈다.

‘근데 그 여자가 좀 어렵다.’

해원은 결국 웃었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확인하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에 이름이 생길 것 같아서.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웠고,

연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아무 약속도 없었다.

해원은 천천히 답장을 썼다.

‘어려우면 포기해.’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다.

잠시 후 태헌의 답이 왔다.

‘싫은데.’

해원의 심장이 다시 뛰었다.

‘왜?’

이번에는 태헌이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문장이 도착했다.

‘5년이나 봤는데 어떻게 포기해.’

해원의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질 뻔했다.

5년.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시간과 같았다.

해원은 화면만 바라봤다.

태헌이 또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입력 중이라는 표시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해원은 숨을 죽였다.

한참 뒤 마지막 문장이 도착했다.

‘그 여자는 아직도 내가 다른 여자를 찾는 줄 알아.’

해원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집 안에는 버릴 물건들이 가득했지만,

그 순간 해원의 머릿속에서는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았다.

설마.

나야?

1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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