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함께 떠나는 사람이 되었다

by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

30화. 우리는 함께 떠나는 사람이 되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윤해원은 창밖을 바라봤다.

며칠 전 제주로 갈 때와 같은 하늘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돌아오는 자신의 마음은 전혀 같지 않았다.

제주에 갈 때까지만 해도 해원은 계속 생각했다.

강태헌을 좋아하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다른 일이라고.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시간을 나눠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해서 한집에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오래 함께하고 싶다고 해서 결혼이라는 답을 선택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가지는 달라졌다.

이제 혼자 살아가고 싶다는 말속에

강태헌이 없어야 한다는 뜻은 들어 있지 않았다.

혼자일 수 있는 자유와,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행복.

둘 중 하나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해원은 이제 알 것 같았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췄다.

태헌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끝났다.”

“뭐가?”

“첫 여행.”

해원이 웃었다.

“며칠 갔다 온 게 무슨 대단한 여행이라고.”

“나한테는 대단했는데.”

“왜?”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윤해원이 나랑 여행을 왔잖아.”

“그게 그렇게 대단해?”

“응.”

“왜?”

“처음에는 카라반 가자는 말에도 도망갔던 여자니까.”

해원이 피식 웃었다.

“내가 언제 도망갔어.”

“여행 얘기만 하면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생각은 해봐야지.”

“그래서 베트남도 생각해 볼 거야?”

해원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그건 가서 일정부터 보자.”

태헌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은 간다는 거네?”

“왜 그렇게 결론이 빨라?”

“이번 여행에서 배웠어.”

“뭘?”

“윤해원이 ‘생각해 볼게’ 하면 반은 된 거고.”

“또?”

“‘응’ 하면 끝난 거고.”

“또?”

태헌이 웃었다.

“먼저 손 잡으면 완전히 내 편.”

해원이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꿈 깨.”

태헌이 웃었다.

“아프다.”

해원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

“팔?”

“아니. 네가 때린 데.”

“강태헌.”

“알았어.”

둘은 웃으며 비행기에서 내렸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다시 서울의 공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은 빠르게 걸었고,

휴대전화는 계속 울렸고,

각자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헌이 물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해원이 잠시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괜찮다고 했을 것이다.

혼자 갈 수 있다고.

굳이 돌아가지 말라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응.”

태헌이 해원을 바라봤다.

“뭐?”

“데려다줘.”

“진짜?”

“싫어?”

“아니.”

태헌이 웃었다.

“좋아서.”

해원은 먼저 걸었다.

“빨리 와.”

그 말이 이제 자연스러웠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기울고 있었다.

태헌이 차에서 내렸다.

“가방 줘.”

“이거 하나야.”

“그래도.”

“내가 들 수 있어.”

태헌이 해원을 빤히 바라봤다.

해원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들어.”

태헌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이것도 연습해야 돼.”

“뭘?”

“남한테 맡기는 거.”

“너 남 아니야?”

말이 먼저 나왔다.

둘 다 멈췄다.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태헌도 해원을 바라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 말 안 했어.”

“했는데.”

“잘못 들었어.”

“윤해원.”

“왜.”

태헌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나 남 아니야?”

해원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말했다.

“들어오기 싫으면 가.”

태헌이 웃으며 따라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집 안은 며칠 전 그대로였다.

그런데 해원에게는 조금 달라 보였다.

태헌이 앉았던 소파.

함께 커피를 마셨던 식탁.

처음 조금 길게 키스했던 자리.

태헌이 신발을 벗었다.

해원이 말했다.

“커피 마시고 갈래?”

“피곤하지 않아?”

“조금.”

태헌이 웃었다.

“이제 잘 말하네.”

“뭘.”

“피곤하다고.”

해원도 웃었다.

“배웠어.”

“누구한테?”

“한 살 어린 사람한테.”

태헌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수강료 비싼데.”

“얼마인데?”

“평생.”

해원의 손이 잠시 멈췄다.

예전 같으면 그 단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평생.

너무 길고,

너무 무겁고,

지킬 수 있을지 모르는 약속.

그런데 오늘은 웃음이 났다.

“바가지네.”

그게 전부였다.

태헌도 더 말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던 중 해원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일과 관련된 연락이었다.

해원은 통화를 하고 메모를 했다.

태헌은 조용히 기다렸다.

전화를 끊자 해원이 한숨을 쉬었다.

“또 바빠지겠네.”

“일?”

“응.”

“며칠?”

“한동안.”

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베트남은 조금 미루면 되겠다.”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왜?”

“바쁘다며.”

“그렇다고 안 간다는 건 아닌데.”

태헌의 눈이 커졌다.

“갈 거야?”

“응.”

“언제?”

“일 정리하고.”

“진짜?”

해원이 웃었다.

“왜 자꾸 물어.”

태헌은 잠시 해원을 바라보다 말했다.

“좋아서.”

그 말.

처음에는 참 낯간지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해원도 알고 있었다.

태헌에게 ‘좋아서’는 이유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이라는 뜻이었다.

해원이 물었다.

“그 여행 끝나면?”

“뭐가?”

“다음에는 어디 갈 건데?”

태헌이 웃었다.

“알래스카.”

“진짜?”

“오로라 보러.”

“추운데.”

“붙어 있으면 되지.”

“또 시작이네.”

“싫어?”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를 마셨다.

태헌이 웃었다.

“그다음은?”

이번에는 해원이 물었다.

“몽골?”

“좋지.”

“그다음은?”

“유럽.”

“너 돈 많아?”

“벌어야지.”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돈 벌러 가야겠네.”

“그러니까 우리 각자 열심히 벌자.”

“각자?”

“응.”

태헌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돈은 네가 벌고, 내 돈은 내가 벌고.”

“여행비는?”

“그건 그때 싸우자.”

해원이 웃었다.

“벌써 싸울 계획까지 있어?”

“싸우면서 가는 거지.”

“싫은데.”

“그럼 네가 다 내.”

“강태헌.”

“알았어. 내가 조금 더 낼게.”

“왜?”

“한 살 어리니까.”

“그게 무슨 논리야.”

둘이 한참 웃었다.

태헌이 돌아갈 시간이 됐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었다.

해원이 문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봤다.

며칠 동안 계속 같이 있었는데 이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묘했다.

그렇다고 붙잡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싫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헤어지는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태헌이 일어섰다.

“갈게.”

“응.”

“내일 연락할게.”

“응.”

“보고 싶으면?”

“연락해.”

“그럼 지금 보고 싶은데.”

해원이 웃었다.

“지금 보고 있잖아.”

“집에 가면.”

“그때 연락해.”

태헌이 문을 열었다.

그때 해원이 불렀다.

“태헌아.”

“응.”

“조심해서 가.”

“응.”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그리고.”

태헌이 기다렸다.

해원은 웃었다.

“사랑해.”

태헌의 표정이 멈췄다.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한 번 더.”

“싫어.”

“잘 못 들었어.”

“들었잖아.”

“못 들었는데.”

해원이 문을 닫으려 했다.

태헌이 급하게 문을 잡았다.

“잠깐.”

“왜.”

“나도.”

“뭐가?”

이번에는 태헌이 웃었다.

“사랑해.”

해원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말했다.

“알아.”

문 밖에서 태헌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날 밤.

해원은 제주에서 가져온 열쇠를 꺼냈다.

‘해원.’

작은 나무 열쇠고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집 열쇠 옆에 놓았다.

두 개의 열쇠.

하나는 자신의 집.

하나는 태헌이 열어둔 공간.

굳이 하나의 열쇠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각자의 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필요할 때 서로의 문을 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몇 달 뒤.

인천공항.

윤해원은 작은 가방 하나를 메고 출국장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도 짐은 많지 않았다.

태헌은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타났다.

해원이 그의 가방을 보고 웃었다.

“너 이민 가?”

“한 달 간다며.”

“누가 한 달 간대?”

“나.”

“나는 2주라고 했어.”

“그래서 협상하려고.”

“이미 비행기 타는데 무슨 협상이야.”

태헌이 웃었다.

“가서 하지 뭐.”

해원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못 말린다.”

태헌이 물었다.

“여권?”

“있어.”

“휴대전화?”

“있어.”

“충전기?”

“있어.”

“옷?”

“있어.”

“진짜?”

“있다니까.”

태헌이 해원의 작은 가방을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해원이 먼저 말했다.

“그 질문하면 혼자 간다.”

태헌이 입을 다물었다.

해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학습했네.”

“연애도 공부야.”

“누가 그래?”

“강태헌이.”

“신뢰 안 가.”

익숙한 대화였다.

그래서 더 좋았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전 두 사람은 잠시 멈췄다.

태헌이 물었다.

“긴장돼?”

“조금.”

“무서워?”

“조금.”

“후회해?”

해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랑 이렇게 오래 여행하는데?”

“그러니까 조금 무섭지.”

“싸우면?”

“각자 다니자.”

“진짜?”

“응.”

“내가 길 잃으면?”

“찾아오겠지.”

“네가 길 잃으면?”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그리고 웃었다.

“네가 오겠지.”

태헌도 웃었다.

“응.”

“갈게.”

그 한마디면 됐다.

둘은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았다.

해원은 문득 몇 년 전 제주를 떠올렸다.

비가 쏟아지던 날.

젖은 운동화.

작은 우산 하나.

그리고 자신의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던 남자.

그때는 몰랐다.

그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일이 이렇게 긴 이야기가 될 줄은.

그날 강태헌은 해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해원도 그에게 걸어갔다.

누군가 먼저 시작했지만

결국 사랑은 가운데에서 만나는 일이었다.

“해원아.”

“응.”

“우리 어디까지 갈까?”

태헌이 물었다.

해원은 출국장 너머를 바라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목적지를 말했을 것이다.

하노이.

사파.

쿤밍.

혹은 그다음 도시.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하고 싶었다.

“갈 수 있는 데까지.”

“나랑?”

해원이 태헌을 바라봤다.

“응.”

“진짜?”

“응.”

태헌이 웃었다.

“그럼 오래가자.”

해원도 웃었다.

“천천히.”

“알았어.”

둘은 다시 걸었다.

윤해원은 더 이상 누군가의 인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강태헌도 그녀를 자신의 방식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지고 있었다.

각자의 집이 있었고,

각자의 일이 있었고,

각자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길 사이에,

서로에게로 가는 길 하나가 생겼다.

어떤 날은 태헌이 걸어왔고,

어떤 날은 해원이 달려갔다.

어떤 날은 기다렸고,

어떤 날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했다.

소유하지 않고.

재촉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외면하지 않고.

해원은 태헌의 손을 조금 더 꼭 잡았다.

태헌이 바라봤다.

“왜?”

해원이 웃었다.

“그냥.”

태헌도 웃었다.

“또 그냥?”

“응.”

“좋아서?”

해원은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리고 말했다.

“응.”

“좋아서.”

그 말이면 충분했다.

스무 살의 사랑은 영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랑은 오늘 함께 걷는 것을 선택했다.

내일도 걷고 싶으면 다시 손을 잡고,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하는 날에는 보내주고,

다시 보고 싶어지면 찾아가는 것.

그렇게 하루씩 선택하다 보면

어쩌면 그것이 영원이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출국장 끝에서 태헌이 물었다.

“해원아.”

“응.”

“다음 여행은 어디 갈까?”

해원이 웃었다.

“이번 여행부터 갔다 오자.”

“그래도 생각은 해보자.”

“또?”

“응.”

해원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남자.

때로는 아이처럼 웃고,

때로는 자신보다 훨씬 어른처럼 기다려준 사람.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옆에서 함께 걸어갈 사람.

해원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디로?”

해원은 웃었다.

“우리 다음 이야기로.”

사랑은 정착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를 잃지 않은 채,

누군가와 함께 떠날 수 있게 되는 일이었다.

30화 완결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작가의 말

서른 편의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을 쓰면서 저는 사랑의 시작보다, 나이가 든 뒤 누군가를 다시 마음 안으로 들이는 일에 대해 더 오래 생각했습니다.

젊은 날의 사랑은 좋아하면 달려가고, 보고 싶으면 만나고, 영원을 쉽게 약속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살아낸 뒤의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마음 하나를 내어주는 데도 망설임이 생기고,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살아온 삶과 나만의 시간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윤해원도 그랬습니다.

혼자 할 수 있다는 말이 익숙했고, 힘들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대었다가 상처받느니 스스로 견디는 편을 택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런 해원 앞에 강태헌이 왔습니다.

한 살 어리지만 서두르지 않는 사람.

잡고 싶으면서도 놓아줄 줄 알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해원에게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오라고 하지 않고,

“네 삶 옆에 내 삶 하나 놓고 싶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마지막을 결혼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에서 더 중요했던 것은 두 사람이 어떤 이름의 관계가 되었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느냐였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집이 있어도 좋고,

혼자 떠나는 날이 있어도 좋고,

서로 다른 일을 하며 살아도 좋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보고 싶으면 만나러 가는 것.

한 사람이 지치면 다른 사람이 조금 더 걸어주는 것.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상대 쪽으로 기울여주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조금씩 가운데로 다가가 함께 그 우산을 쓰는 것.

저는 그런 사랑도 충분히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을 한 곳에 정착시키지 않고 다시 길 위에 세웠습니다.

윤해원에게 사랑은 이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강태헌에게 사랑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는 일이 아닙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소유하는 대신,

함께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후반부에 필요한 사랑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잃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아가는 모습을 좋아해 주는 사람.

혼자서도 잘 살아온 나에게 무조건 기대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힘든 날에는 기대도 괜찮다고 알려주는 사람.

그리고 내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가지 마.”가 아니라

“같이 갈까?”

하고 물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한 명 있다면,

나이는 사랑을 시작하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오래 살아보았기에 더 천천히,

더 조심스럽게,

그리고 더 제대로 사랑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윤해원과 강태헌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여행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노이에서도 싸울 것이고,

사파에서는 서로 말도 하기 싫은 날이 있을지 모릅니다.

길을 잃기도 하고,

각자 걷다가 다시 만나기도 하겠지요.

그래도 저는 믿고 싶습니다.

강태헌이 어느 날 또 물을 것이라고.

“해원아, 우리 어디까지 갈까?”

그러면 윤해원은 아마 예전처럼 오래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태헌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대답하겠지요.

“갈 수 있는 데까지.”

서른 편 동안 윤해원과 강태헌의 느린 사랑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은 꼭 뜨거워야만 사랑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기다려주는 것이었고,

때로는 찾아가는 것이었으며,

때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옆에 앉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사랑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나인 채로 누군가와 함께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는 아직,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을 마치며

기억을 꿰매는 사람 황미순



작가의 말

서른 편의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른」을 쓰면서 저는 사랑의 시작보다, 나이가 든 뒤 누군가를 다시 마음 안으로 들이는 일에 대해 더 오래 생각했습니다.


젊은 날의 사랑은 좋아하면 달려가고, 보고 싶으면 만나고, 영원을 쉽게 약속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살아낸 뒤의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마음 하나를 내어주는 데도 망설임이 생기고,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살아온 삶과 나만의 시간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윤해원도 그랬습니다.


혼자 할 수 있다는 말이 익숙했고, 힘들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대었다가 상처받느니 스스로 견디는 편을 택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런 해원 앞에 강태헌이 왔습니다.


한 살 어리지만 서두르지 않는 사람.


잡고 싶으면서도 놓아줄 줄 알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대답을 재촉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해원에게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오라고 하지 않고,


“네 삶 옆에 내 삶 하나 놓고 싶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마지막을 결혼식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이야기에서 더 중요했던 것은 두 사람이 어떤 이름의 관계가 되었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느냐였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집이 있어도 좋고,


혼자 떠나는 날이 있어도 좋고,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기억을 뀌메는 사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186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9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89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