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포기한 사람을 쉽게 판단할까
식품영양학자가 동화를 읽는 방법 ⑲
제목 : 여우의 신포도
부제 : 우리는 왜 포기한 사람을 쉽게 판단할까
이솝 우화 중 「여우와 신포도」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다.
어느 날 여우가 포도나무에 탐스럽게 매달린 포도를 발견한다. 먹고 싶었다.
여우는 포도를 향해 뛰어오른다.
한 번.
두 번.
몇 번을 뛰어도 포도에는 닿지 않는다. 결국 여우는 돌아서면서 말한다.
“저 포도는 분명 신 포도일 거야.”
그리고 우리는 이 장면을 아주 익숙하게 해석한다.
자신이 얻지 못한 것을 갖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는 것.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인지부조화와 자기합리화의 맥락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원했던 것을 얻지 못했으니 마음이 불편하니, 마음은 간단한 해결바카라을 찾는다. “사실 별로 원하지 않았어.”
그런데 다시 읽다보니 이젠 새로운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여우가 포도를 먹는다고? 육식동물 아니었어?
그런데 찾아보니 여우는 유연한 식성을 가진 동물이었다. 주로 작은 포유류나 새, 곤충 같은 동물성 먹이를 먹지만 생각보다 훨씬 식물성 먹이도 상당히 다양하게 이용한다고 한다. 특히 지중해 지역에서 여러 육식성 포유류가 어떤 과일을 먹는지를 조사했더니 여우가 먹는 과실이 30종이 넘는다는 연구가 있었다. 그러니 여우가 포도를 먹는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거다
게다가 포도는 수분과 당분이 많은 과일이다. 여름철 덥고 건조한 지중해 기후에서는 목마르고 굶주린 여우에게 수분을 공급하면서도 빠르게 에너지원을 만들 수 있는 당분까지 들어있어 여우에게 어쩌면 진짜 필요한 과일이 바로 포도 아니었을까?
그러니 이해가 되었다. 포도를 먹기 위해 왜 그렇게 몇번씩이나 뛰어오르며 포도를 먹으려고 했는지.
또 하나 드는 의문. 여우가 이렇게 말했다
"저건 시어서 맛없을 거야!"
그런데 여우가 진짜 신맛을 알기나 하는걸까?
그런데 뜻밖에도 포유류에게 신맛은 꽤나 중요한 감각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맛은 먹이가 덜 익었거나 상한 것인지 등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감각 정보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리고 나는 또 궁금해졌다.
그렇게 날렵한 여우가 포도 몇 송이를 정말 못 딸 만큼 둔한 동물이었을까?
여우는 먹이를 사냥할 때 높은 수직 점프를 하기도 하고, 실제로 약 1m 높이의 장애물도 너끈히 뛰어넘을 만한 순발력을 가지고 있던 동물이다. 그런 여우가 포도 몇 송이를 못 따서 포기했다니.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왜 그 포도 하나 제대로 못 따서 포기해야만 했을까?
알고 보니 여기에도 이유가 있었다.
고대 지중해에서는 포도 덩굴을 키가 큰 나무에 올려 재배하는 방식이 있었다. 나무 위로는 포도가 열리고, 그 아래 땅에서는 밀이나 보리를 함께 재배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다보니 포도송이가 사람 키를 훌쩍 넘는 2.5m~3m 이상의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리는 구조였다. 그렇다면 아무리 날렵한 여우라도 바닥에서 수직으로 뛰어올라 닿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릴 때는 이 우화를 읽으며 여우를 나무랐다.
포기하지 말고 더 노력했어야지.
조금 더 열심히 도전했어야지
그러고는 닿지 않는 포도를 신포도라고 말해버리다니. 비겁한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상황들을 알고나니 여우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탈수와 허기로 체력이 바닥난 야생에서, 구조상 닿을 수 없는 3m 높이의 포도를 얻겠다고 온종일 바닥에서 뛰어오르기만 했다면 여우는 오히려 더 탈진하지는 않았을까?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한계와 마주했을 때, 빠르게 판단하고 "저건 지금 내게 필요 없는 신포도일 뿐이야"라고 규정하며 쿨하게 돌아서는 것은 나를 지키는 가장 영리하고 건강한 전략 아니었을까?
사실 우리가 살다보면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다.
그럴때 몇번 도전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괜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말고 가끔 여우처럼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말할 줄 알아야 정신건강에 더 좋은 것 아닐까?
"에이, 저 포도는 떫고 시어서 어차피 못 먹었을거야.!"
그날 여우가 포도를 포기하고 돌아선 것은 실패였을까?
어쩌면 그것은 현실을 인정하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지혜였는지도 모른다.
가끔은 여우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도 있지 않을런지.
이렇게 이솝이 나에게 또다른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