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늪지공원에서 만난 뜻밖의 가을꽃

가을엔 민들레뿐인 줄 알았던 늪지 산바카라로에서 발견한 또 다른 꽃

by김종섭

오랜만에 늪지공원을 걸었다. 무더웠던 여름 날씨에서 이젠 제법 선선한 가을로 접어든 데다, 오늘은 날씨까지 흐려 여름 햇살만큼이나 강한 가을 햇살을 피해 편안한 마음으로 산바카라로를 찾았다.

불과 얼마 전 여름에 찾았을 때만 해도 잔디와 풀들이 바짝 타 들어가 황량한 겨울 채비를 하는 듯했으나, 어젯밤 내린 가을비 덕분인지 습지 주변 풀밭은 어느새 파릇한 빛깔을 되찾아 마치 봄날의 생기를 되찾은 모습이었다.

가을 늪지공원 산바카라로에서 기대할 수 있는 꽃이란 보통 민들레 정도가 전부인 줄 알았다. 가을이 깊어지면 민들레나 이름 모를 잡풀만 소박하게 피어날 것이라 생각하며 걷고 있었는데, 산바카라로 가장자리에 유난히 화려하고 이채로운 빛깔을 띤 뜻밖의 들꽃 무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흔히 '숙근스위트피'나 '갯잔두구'라 불리는 다년생 덩굴식물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자리를 잡은 포기마다 피어난 꽃의 빛깔이 저마다 달랐다.

막 봉오리를 터뜨린 포기에서는 선명하고 화려한 짙은 자홍빛 꽃들이 피어나고, 옆 포기에서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연분홍빛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아래 또 다른 포기에는 흰빛에 가까운 옅은 분홍을 머금은 꽃들이 수줍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가을꽃이라곤 민들레의 단조로운 노란빛만 생각했던 늪지공원에서, 짙은 핑크와 연분홍, 흰빛 분홍까지 세 가지 색을 다채롭게 선보이는 이 꽃은 참으로 뜻밖의 가을 선물이었다.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포기마다 개화 속도를 달리하며 저마다의 빛깔로 제 몫의 계절을 채워가고 있었다.

개화 상태와 포기마다 자홍색, 연분홍, 옅은 핑크의 다채로운 색감을 보여주는 숙근스위트피.

아내는 씨앗을 따가자고 했다. 콩깍지처럼 생긴 씨주머니를 손에 쥐어보니 꽈배기처럼 나선형으로 마구 비틀려 있었고, 정작 안에 있어야 할 씨앗은 없었다. 처음엔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줄로만 알았으나, 알고 보니 씨앗을 멀리 퍼뜨리기 위해 스스로 껍질을 꼬아 튕겨낸 뒤였다.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지 못하는 대신, 제 몸을 비틀어 땅 위에 씨앗을 내려놓음으로써 다음 해의 생명을 기약하는 자연의 생존 방식이었다. 한편 옆에 달린 또 다른 씨주머니는 아직 꼬이지 않은 채 통통한 씨앗들을 알알이 품고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산바카라을 나설 때 울창한 나무와 고운 단풍이 반기는 숲길을 먼저 찾곤 한다. 솔직히 늪지 산바카라로는 숲처럼 화려하게 낙엽이 물드는 풍경도 없고, 다소 심심하여 산바카라로서의 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늘 마주한 늪지는 숲과는 또 다른 뜻밖의 매력을 품고 있었다. 붉게 물드는 단풍은 없어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길목 한구석에서 저마다의 색으로 단단하게 피어난 들꽃이 기대 이상의 아늑함과 생동감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산바카라을 하면서도 화원이나 꽃집에 깔끔하게 정돈된 꽃들에만 익숙해져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름조차 생소한 들꽃이라도 습지의 찬 바람 속에서 제 때를 기다려 꽃을 피우고, 껍질을 비틀어 씨앗을 터뜨리는 강인한 생태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들판의 모든 식물이 달라 보였다. 무심코 지나치던 길가 들꽃 한 송이에도 저마다 삶을 이어나가는 명확한 이유가 담겨 있었다.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계절을 건너는 들꽃의 단단한 생명력 앞에, 오늘은 차마 손을 내밀어 꽃을 꺾지 못하고 가만히 눈으로만 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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