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페이지
초등학교 고학년이 다닌 컴퓨터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게임은 뭐니 뭐니 해도 램페이지였다. 킹콩과 공룡, 거대 늑대인간이 나와서 빌딩을 부수는 내용이었는데, 원초적인 파괴 본능을 자극한다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3인 동시 플레이가 된다는 점이었다. 당시에는 네트워크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하나의 키보드를 셋이 동시에 붙잡고 플레이를 했다. 옹기종기 붙은 세 사람의 플레이는 이 게임만의 독특한 풍경이었다. 더운 여름에는 옆 친구의 땀과 열기 때문에 살짝 불쾌한 느낌도 있었다. 빌딩 안에서 사람이 고개를 내밀고 도와달라고 외치기도 했고 헬기나 탱크가 총을 쏘며 막으려고 했지만, 거대 괴수가 된 우리를 막을 존재는 없었다. 시원하게 모두 때려 부수다 보면 어느새 수업 시간이 되었고 언제나 아쉽게 플레이를 종료하고는 했다.
오랜만에 둘째 외삼촌 집에 놀러 간 어느 날, 사촌인 백곰 형이 PC를 샀다고 자랑했다. PC가 있는 방에 가자마자 제일 먼저 했던 질문은 당연했다. 그래서, 게임은 뭐 있어? 형이 몇 가지를 보여주었는데, 그 와중에 백곰의 동생인 불곰 형이 끼어들었다. 그런 거 말고 우리 셋이 하기 딱 좋은 게임이 있어! 백곰 형은 인상을 쓰며 그건 야만적이라며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에 호기심이 더해진 나는 백곰 형을 졸랐고, 결국 마지못해 틀어준 게임은 학원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하던 램페이지였다.
불곰형과 나, 그리고 동생까지 셋은 백곰 형의 PC를 빼앗아 그날 저녁까지 램페이지를 계속 플레이했다. 컴퓨터 학원에서는 수업 시간 때문에 중간에 끊겼지만, 외삼촌 집에서는 질릴 때까지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날, 돌아가기 전에 불곰 형이 비밀스럽게 나와 동생을 불렀다. 우리, 비밀 인사를 만들자! 엥? 그게 뭐야? 우리 중 누군가가 외계인이 몸을 빼앗을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주먹을 부딪치며 손 인사를 하는 거야. 불곰 형은 자신이 구호를 생각했다고 했다. 누구든 ‘램페이지!’라고 외치면 우리 셋이 각자 자기가 조작한 캐릭터 이름을 하나씩 말하며 주먹을 위아래로 좌우로 부딪치는 방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불곰형은 자신 있게 자기 캐릭터 이름을 외쳤다. 킹콩! 하지만 동생과 나는 당황했다. 우리는 캐릭터 이름을 모르는데 어쩌지? 우리의 불안을 눈치챈 불곰 형은 캐릭터 이름을 알려주었다. 네 캐릭터 이름은 워억! 그리고 네 캐릭터 이름은 끼꼭! 이야. 엥? 그 이름이 맞아? 맞다니까! 그날 이후, 우리 셋이 만나면 비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램페이지! 킹콩! 워억! 끼꼭!”
나중에 알았지만 당연히 캐릭터 이름은 셋 다 틀렸다. 불곰 형이 순간적으로 대충 지어낸 것이다. 원래 이름은 조지, 랄프, 리지였다. 그래도 ‘램페이지 조지 랄프 리지’ 보다는 ‘램페이지 킹콩 워웍 끼꼭’이 더 암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날 때마다 구호를 외치다 보니 어느새 내 기억 속에는 전체가 하나의 단어처럼 박혀 버렸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지만 훗날, 불곰 형은 불교에 귀의했고 속세를 떠난 스님이 되었다. 분명히 법명도 가지고 있는 스님이신데, 그 형을 떠올릴 때마다 빌딩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램페이지 킹콩 워웍 끼꼭’이 떠오른다. 불경하게도.
.
.
.
마이즈의 30가지 메모리 -1988
램페이지. PC. 미드웨이.
1986년 아케이드로 제작된 게임을 1988년 PC로 이식한 작품. 킹콩과 공룡, 거대 늑대인간이 건물을 때려 부수는 콘셉트로 작게 보여서 잘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생각보다 잔인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특징은 3인 플레이라는 점으로 하나의 키보드로 셋이 플레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여럿이 모이는 장소에서 주로 선택되는 게임이기도 했지요. 2018년에 이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습니다. 주연은 무려 드웨인 존슨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