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창문: 번역 계기와 삽화 그리기

만만하게 봤다가 쓰러짐

by마봉

번역 연재: 나는 어쩌다 이 짓을 하게 되었는가

사실, 《도서관 창문》번역 연재는 약간 심심해서 시작해 본 것이었다(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원래는 월터 스콧의 《웨이벌리》를 찾고 있었다. 20년 전에 국내에 번역본이 나온 적은 있지만 종이바카라은 웃돈을 주고 사야 하는 매우 오래된 버전만 남아 있었다. 짜증이 난 나는 차라리 내가 번역을 다시 해? 하고 웨이벌리의 원본을 찾아보았다. 그리고는...


아, 월터 스콧 님 죄송합니다. 그냥 계속 지나가겠읍니다.


구텐베르크에서 웨이벌리를 찾아보고는 조용히 닫았다. 아무리 단어 수대로 원고료를 받던 시대라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는 아저씨의 중간중간 장황한 자기 얘기(자랑 포함)와 스코틀랜드 사투리 풍족하게 처넣은 텍스트(그래서 매력 있긴 하지만... 번역하긴 어렵다), 웨이벌리 말고 좀 짧은 작품들도 찾으면 나오긴 나오는데 유명한 건 이미 국내에 번역이 되어 있다(물론 전자바카라으로 정말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구매 가능했다! 이거야말로 재능기부! 감사합니다!). 아무튼 아무리 내가 스코틀랜드 덕후라고 해도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아닌 것이 있는 법이다.


대신 다른 스코틀랜드 작가들의 좀 더 쉬운 작품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마거릿 올리펀트를 발견하게 되었다. 《도서관 창문》은 그중에서도 적당한 길이와 적당히 쉬운 내용으로 접근하기 쉬워 보였다. 좋아! 한번 내용이나 슥 살펴볼까? 일단 첫 번째 챕터부터...


- 30분 경과 -


어? 귀신 얘기치곤 특이하네? 그래서 그 남자가 누군데? 아놔 진짜 드럽게 질질 끄네 아 증말 이런 식으로 굴면 내가 뭐 끝까지 안 볼 것 같아? 쒸익쒸익 내가 말이야 학교 다닐때 다음 내용 궁금해서 수업 시간에도 만화바카라 읽은 사람이야(자랑이다).

올리펀트 "들어올 땐 네 마음대로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네 언니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 결국 끝까지 다 봤다 -


결말이 약간 김 빠지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읽는 사람 붙들어 놓는 기술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은 이런 재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작가에 대해 찾아보니 돈 벌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작품을 썼다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의 롤모델? 저분은 쓰는 것마다 출판사가 닥치고 받아간 모양이니 나도 닮고 싶었다.


그래 이런 기분 나만 느낄 수는 없지! 짧으니까 적당히 잘라서 연재물로 올려보자! AI 돌려 번역하고 문체랑 표현이랑 등장인물들 말투 좀 보완한 다음에 적당히 삽화나 그려서 올려버리자! 요새 글도 안 써지는데 잘됐어!


삽화의 지옥

남의 글 삽화가 그렇게 어려울 줄은 그땐 미처 몰랐다. 사실 나는 남의 글에 대한 삽화를 그려본 게 처음은 아니다. 나의 글벗이자 존경하는 작가인 @Outis 작가님의 글에 삽화를 그렸(고 더 그려야 하는데 영감(inpiration)이 떠오르지 않아 멈춰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AI 딸깍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가 묘사한 인물을 내가 제대로 표현했는지 수없이 점검하고 혹시 디테일에서 놓친 게 있을까 봐 텍스트를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내 캐릭터들은 내 소관이지만 남의 캐릭터는 그 사람 글에 행여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내 캐릭터보다 더 꼼꼼히 봐야 한다. 보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그려놨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 올리펀트의 글을 번역 연재하며 처음에는 귀찮아서 삽화도 넣지 말까도 생각했다. 그래도 이런 훌륭한 글에 심지어 번역도 AI 보조받아 했는데 그림도 없이 올리면 올리펀트 언니가 꿈에 나타나서 싸대기를 칠 것 같아 그리기로 결정했다.


그럼 어떻게 그릴까? 일단 《도서관 창문》은 올리펀트와 같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 즉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테니(어느 시대라는 언급은 없으니 동시대라고 가정) 그럼 주인공들의 모습도 그 시대 사람들의 복식대로 해야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뭐 입고 다녔더라?


- 이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


후기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머리와 의상

덕후들 중에 좀 마이너 하지만 복식사 덕후들이 있는데, 걔네가 뭐 하다가 덕후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왜 덕후가 되었는지 나도 이제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화보집 사 모으는 단계를 지나 재봉틀 돌리기 시작하면 인생 끝이라고 하던데 다행히도 나는 손재주가 곰손이라 그런 짓까진 안 한다. 일단은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머리와 의상은 정리하자면 이렇다.

후기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복장과 헤어스타일 레퍼런스 카드(번 헤어, 높은 목과 긴 소매, 차분한 색상)

내 짧은 상식 선에서 그나마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E. M. 포스터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 1985)에 나오는 루시 허니처치와 샬럿 바틀렛의 모습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도서관 창문보다 약 11년 후인 1907년(초기 에드워드 시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엄청나게 부풀린 소매나 허리를 잘록하게 보이도록 앞부분을 부풀린 블라우스 등은 올리펀트 시대와 맞지 않지만, 영화 속 루시의 머리는 에드워드 시대 특유의 깁슨 걸 스타일에 가깝고 그 뿌리가 되는 퐁파두르와 볼륨감 있는 업스타일은 이미 1890년대 후기 빅토리아 시대에도 유행하고 있었다. 말 나온 김에 루시 허니처치와 샬럿 바틀렛이 어떤 머리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나시는 분들을 위해 사진을 가져왔다.

영화 《전망 좋은 방》(1985) 스틸컷 출처: CinemaClock / Merchant Ivory Productions

좋아, 그렇다면 도서관 창문의 주인공들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 옷차림에, 1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주인공은 초기 깁슨 걸 헤어, 메리 고모는 그보다 조금 더 보수적인 번 헤어로 그려야겠다.


좋아! 그럼 바로 그리면 되겟꾼!


어? 근데 주인공은 어디에 앉아있어야 하지?


건축 양식 이야기

건축 얘기까지 하면 후기를 시리즈로 써야 할 것 같아서 짧게 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주인공이 도서관 창문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그 창가 자리(가장 중요한 장소)만은 반드시 베이 윈도우(Bay Window, 건물 외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온 창)여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면 베이 윈도우야말로 빅토리아 시대에 특히 널리 사랑받은 건축 요소이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바카라이며 바느질거리며 이것저것 늘어놓고 하루 종일 앉아서 바카라을 읽거나 수를 놓으며 노작거리고 싶어질 만큼 아늑한 장소가 바로 이런 베이 윈도우이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 베이 윈도우 구조, 장식 구성 요소 설명

당시 중산층 이상의 도시 주택에서는 거실이나 응접실을 한 층 높게 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이 스트리트에 지나다니는 사람들 눈에 집안 내부가 훤히 보여서는 안 되니 말이다. 게다가 그 시대에 1층은 거리에서 말똥냄새, 흙먼지 등이 죄다 들어오는 제일 안 좋은 층이었다. 그리고 대학 도서관처럼 중요한 곳 역시 주로 가장 좋은 층인 2층(얘네는 지상층이 Ground Floor니까 얘네 기준으로는 1층)에 있었다.


그러면 주인공은 건너편 도서관 창문을 같은 아이 레벨로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근데 아무리 해도 그게 수정이 잘 안 됐다. 어떻게 겨우겨우 거실을 2층으로 올려놨더니 이번에는 도서관 건물 양식이 애매했다. 아래 그림(1화 삽화)에서 주인공은 베이 윈도우 비슷한 곳에 앉아 있지만, 건너편 도서관 건물은 도서관보다는 조지안 양식의 타운하우스에 가깝다. 그거까지 고치면 손가락 다 뿌러질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웹툰작가들이 배경에 사용되는 건축물(냉혈남주 북부대공의 거대한 저택 등) 내외부 통일해서 전담하는 배경담당 어시만 따로 두는 이유도 진심으로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내 어시인 AI들은 내 말을 안 들어 처먹으니 그냥 넘어가야만 했다(그리고 이 무렵에 손가락 관절통증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해서 오래 하기도 힘들었다).

그리다가 지쳐서 적당한 선에서 합의 봐 버린 1화 삽화

내가 아무리 디테일 변태라고 자부하지만 2026년 현재 AI로 그리는 이미지에서 인물이나 옷차림은 원본 이미지 그대로 잘 유지하지만 건물 내외부 통일성 유지하는 것은 아직은 어나더 레벨이었다. 아마도 2027년 말쯤 AI가 좀 더 발달하면 아마 나는 이 연재물의 이미지를 싹 다 갈아엎을지도 모른다(게을러서 아마도 안 하겠지만). 아무튼 이것이 그리다가 지쳐 포기한 1화 삽화이며, 파일명은 '진짜 1화.png'이다(그전에 아마 1화-1-1-1-1-1-1까지 나왔었던 것 같다).

올리펀트에게 무릎꿇고 한 수 가르쳐 달라고 비는 마봉

다음 편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올리펀트 언니가 나노 단위로 묘사하는 바람에 죽어난 내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무튼 등장인물들의 모습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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