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을 부를 때도 고모가 아니라 이모인데
엄마 쪽 자매인지, 아빠 쪽 자매인지, 혹은 삼촌의 아내인지 일일이 따져 이모, 고모, 숙모, 작은엄마 큰엄마로 무 채마냥 잘게 치는 한국어와 달리 영어는 이 모든 3촌 여자 친척, 아니 3촌뿐 아니라 5촌, 아니 친척도 아닌 엄마 아빠의 친구나 친구의 부인까지 다 aunt로 퉁친다.
그러나 한국어(혹은 우리말처럼 이모 고모 구분이 있는 중국어나 아랍어, 힌디어)로 번역하는 사람들은 이 고민을 피할 수가 없다. 이건 번역가들이 실제로 자주 부딪히는 문제이다. 영어 원문은 모호한데 한국어는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경우, 예를 들면 원문에는 없는 반말과 존댓말을 어떻게 구분해서 번역할 것인가? 영어에는 없는 이모 고모 구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번역자가 Aunt Mary를 이모나 고모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독자는 무의식적으로 그 친족 관계를 사실로 받아들여 버린다. 게다가 한국에서 고모와 이모는 정서적으로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식당에서 사장님을 부를 때도 이모라고 부르는 한국인들에게 이모와 고모는 같은 Aunt라도 느낌이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Aunt Mary를 '메리 고모'로 번역했다.
내가 그렇게 번역한 이유는 이렇다. Aunt Mary가 어머니 쪽 친척이고 이 집안 여자들에게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 전해져 내려온다면, 주인공의 어머니가 그 능력을 물려받지 않았을 리가 없다. 혹은 본인이 물려받지 않았더라도 언니나 여동생, 혹은 사촌언니인 메리가 남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같이 자라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결말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얘! 아빠가 당장 런던으로 오랜다!" 하며 데리러 왔을 때, 어머니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상관없는 제삼자처럼 표현되었다.
그날 어머니가 오셔서 나를 집으로 데려가셨다. 오신다는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도착하셔서, 아버지가 해외로 가기로 하셨으니 당장 저녁에 출발해 다음 날 런던에 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처음엔 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데리러 오셨는데 아무 이유 없이 거역할 권리가 소녀에게 어디 있겠는가.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야 했다.
That day my mother came and took me home. I had not heard she was coming; she arrived quite unexpectedly, and said she had no time to stay, but must start the same evening so as to be in London next day, papa having settled to go abroad. At first I had a wild thought I would not go. But how can a girl say I will not, when her mother has come for her, and there is no reason, no reason in the world, to resist, and no right! I had to go, whatever I might wish or any one might say.
어머니가 왜 이렇게 무심하게 표현되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어머니도 보는 능력이 있는데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Aunt Mary에게서 사태를 전해 듣고 "아이고 얘도 결국 그 양반 봤구나! 내 광속으로 데리러 갈게 언니!"하고 날아왔을 수도 있다.
또한, 주인공이 울다가 밥 먹으러 온 것을 보고 메리 고모가 말하는 것을 보면 Aunt Mary는 주인공의 엄마와 자매지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네 어머니의 아이가 내 집에서 울다니"라는 표현은 올케 딸이 아니라 언니나 여동생의 딸이라 저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오빠나 남동생 딸이었다면 다르게 말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인데 이것도 한국식 친족관계에 익숙해진 내 머릿속에서 나온 추론이니 이걸 갖고 이모다!라고 확신할 근거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저녁 식사에 늦었고, 환한 불빛이 비치는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는 당연히 울었던 흔적이 눈에 남아 있었다. 메리 고모가 마음껏 나를 살필 수 있고, 나는 도망칠 수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 고모가 말씀하셨다. "얘야, 너 울었구나. 네 어머니의 아이가 내 집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다니, 정말 마음이 아프구나."
I was late for dinner, and naturally there were some traces in my eyes that I had been crying when I came into the full light in the dining-room, where Aunt Mary could look at me at her pleasure, and I could not run away. She said, "Honey, you have been shedding tears. I'm loth, loth that a bairn of your mother's should be made to shed tears in my house."
***
loth: 꺼리는, 마음이 아픈.
bairn: 아이(스코틀랜드, 북잉글랜드 영어)
하지만 주인공이 글을 쓰는 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묘사한 것(큰 바카라상에서 글을 쓰고, 글 쓰다 말고 창가에 서서 멍 때리는 모습 등)을 보면 주인공은 성정이 아버지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아버지는 남자라 '우리 집안의 여자들'에게 내려오는 그 눈을 물려받지 못했지만 망상적 기질이나 남들과 다른 것을 보는 눈은 아버지 쪽 유전이지 않을까. 어쨌든 이런 이유로 Aunt Mary는 아버지 쪽 친척, 즉 아버지의 누나, 여동생, 혹은 사촌일 거라고 나는 추측했다.
물론, 마거릿 올리펀트에게 DM를 보내보기 전까지는 Aunt Mary가 이모인지 고모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영미권 비평가들은 Aunt Mary가 이모인지 고모인지에 대해 거의 문제 삼지 않는다. Aunt라는 단어는 그저 주인공을 지켜보고 보호하는 연상의 친족을 의미할 뿐이므로(한국인 번역가인 나만 이거 갖고 머리를 며칠 싸매고 있지 정작 소설이 쓰인 언어에서는 딱히 의미 없는).
주인공(화자)은 1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소녀이다. 소녀와 소녀가 묵고 있는 집의 여주인인 메리 고모와 그 친구인 피트밀리 씨(알고 보니 전남친)에 대한 묘사는 어떨까?
내 생각엔 고모도 젊은 시절엔 별별 일을 다 겪었을 것 같지만, 내가 거기 머물 때는 이미 나이 지긋하고 정적인 노인이 되어 있었다. (중략) 그때의 나는 나이 든다는 게 어떤 건지 몰랐기에, 그게 어떤 일이든 좋으니 제발 무슨 사건이라도 터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시절, 거실 창가의 깊숙한 자리는 나에게 정말 큰 위안이었다. 고모는 아주 고령이었고 아마 너무 나이가 많아서 그랬겠지만, 참 너그러웠다.
체구는 작지만 자세가 아주 곧은 피트밀리 씨가 그녀들 가운데 서서, 마치 노부인들 사이의 작은 신탁처럼 온화하면서도 권위 있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략) 피트밀리 씨는 사사건건 자기 말을 가로막던 칸비 대부인에게 정중히 팔짱을 내어주었고, 그렇게 차 모임은 끝이 났다.
"그러니 오늘 밤 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피트밀리 씨는 고모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받아치셨다. "한때 무도회의 꽃이었던 미스트리스 발카레스를 에스코트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옷을 갈아입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남들보다 고독을 훨씬 좋아할 거라 확신하긴 했지만, 혹시라도—그저 만에 하나라도—그곳에 그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자넷이 꺼내놓은 파란 드레스 대신 하얀 드레스를 꺼내 입었고, 너무 아까워서 평소엔 하지 않던 진주 목걸이도 걸었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소박하고 고른 광택이 도는 진짜 진주였다. 당시의 나는 내 외모에 그리 자신이 없었지만, 그때의 내 모습엔 분명 시선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다. 창백한 안색에 금세 발그레해지곤 하던 얼굴, 하얀 드레스와 하얀 진주, 그리고 어스레하게 드리워진 머리카락까지.
심지어 피트밀리 씨조차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기뻐 보이면서도 어딘가 안쓰러워하는 듯한, 마치 아직 너무 어려서 닥쳐올 고난을 알지 못하는 가련한 생명체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메리 고모가 나를 보셨을 때도 입가에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고모는 예쁜 레이스 옷을 입고 백발을 아주 우아하게 손질한,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모습이셨다. 피트밀리 씨 역시 아주 세밀하게 주름을 잡은 프랑스산 캠브릭 장식이 달린 셔츠에 다이아몬드 핀을 꽂고 계셨는데, 그 보석은 칸비 대부인의 반지 못지않게 반짝였다. 하지만 이 다이아몬드는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다정하게 빛나는, 마치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듯이 그 정직하고 성실한 노신사의 가슴 위에서 춤을 추는 듯한 보석이었다. 피트밀리 씨는 젊은 시절 고모의 연인 중 한 분이셨고, 여전히 세상에서 고모 같은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1. 메리 고모: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없지만 아주 나이가 많다고 나와 있으며, 젊었을 때 무도회의 꽃이었다는 언급으로 보아 나이가 많아도 여전히 미인일 것으로 추정. 칸비 대부인이 "메리 발카레스, 쟤 왜 저러니?" 하고 한참 손아래 사람에게 말하듯이 얘기하며, 모임에 있는 부인들에게 "내가 느네 엄마 시집가던 날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이야." 하는 것으로 보아 칸비 대부인은 나이가 상당히 많고, 고모 역시 대부인보다는 젊지만 나이가 꽤 있을 것으로 추정.
2. 피트밀리 씨: 체구가 작지만 자세가 곧음. '모턴의 피트밀리 씨'와 같이 이름 앞에 그를 대표할 수 있는 저택이나 영지의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그가 꽤 재산이 있는 지주라는 의미. 프랑스산 캠브릭 장식이나 다이아몬드 핀 등도 그의 재력과 안목을 뒷받침하는 아이템들임. 전여친인 메리 고모와 친구로 지내지만 여전히 고모 같은 여자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함(왜 결혼 안 하시나요 두 분ㅜㅜ). 자기한테 노망 났냐며 앞에서 대놓고 까는 칸비 대부인에게 팔을 내밀어 부축해 줄 정도로 성격 좋으신 분. 메리 고모와 피트밀리 씨는 둘 다 머리가 백발이라고 묘사되어 있음.
3. 주인공: 1인칭이라 자기 외모에 대한 묘사는 거의 없지만 평범한 외모에 안색은 창백하지만 금세 발그레해지는 얼굴. 파티에 가면 도서관의 남자를 혹시 만나게 될지도 몰라 갖고 있던 옷들 중 가장 좋은 흰 드레스와 진주 목걸이로 차려입었음.
세 이미지 둘 다 쉽지는 않았다. 특히 파티가 열리는 도서관에서의 주인공과 피트밀리 씨의 이미지에서는 AI가 젊고 예쁜 여자를 그리라고 하면 종종 실수하는 '상체가 너무 짧아 가슴 밑에서 바로 다리 시작하는 괴이한 인체'로 그려놔서(다른 작가님들 이미지에서도 종종 보이는 현상) 챗순이와 젬순이를 몇 번이나 오가며 수정했는지 모른다. 특히 젬순이는 이미지 수정을 여러 번 하다 보면 픽셀이 깨지며 색이 번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3회 이상 수정할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새로 그리는 것이 나았다.
피트밀리 씨에게 사심을 담아 그리다 보니 올리펀트가 묘사한 것보다 키가 커지고, 메리 고모는 나이가 더 많아야 할 것 같은데 칸비 대부인이 생각보다 너무 젊게 그려지다 보니 칸비 대부인과 동급으로 그릴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더 젊은 고모가 되었다. 그래도 다음에 나올 '도서관 남자'의 이미지에 비하면 메리 고모도 주인공도 피트밀리 씨도 정말 쉽게 그린 것에 해당한다...
다음 편, 마지막으로 '도서관의 그 남자' 이미지 그리기에 대한 고통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며, '도서관 창문' 번역 후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