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생애를 알고 나면 작품도 새롭게 읽힌다
마거릿 올리펀트는 평생 120권가량의 엄청난 다작을 했다. 소설만 쓴 게 아니라 역사, 종교, 평론, 시사 등 다양한 분야에 저서를 남겼다. 거의 살아 있는 인쇄기에 가까울 정도로 써댔고, 따라서 평생 마감에 시달리며 글쓰기 노동을 했다. 전성기 때에는 현재 체감 가치로 수억 원대에 달하는 거액을 순수 원고료로 벌어들였다고 하니, 그 정도면 그렇게까지 빡세게 글 안 쓰고 그동안 번 돈 갖고 적당히 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언니 인생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
마거릿 올리펀트의 남편인 프랜시스 윌슨 올리펀트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드는 예술가였다. 남편이 결핵 요양차 갔던 로마에서 사망했을 때 마거릿의 나이는 겨우 31세였다. 마거릿은 셋째를 임신한 만삭의 몸으로 큰딸 매기와 큰아들 시릴을 데리고 쓸쓸히 영국으로 돌아온다(《도서관 창문》의 주인공이 인도에서 아이들만 데리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장면과 오버랩되는 부분이다). 이미 21살 때 첫 소설을 출판한 작가이자 당대 영국의 유명한 출판사인 '블랙우즈(Blackwood's Magazine)'의 고정 필진이었던 마거릿은 남편의 결핵 치료비와 요양 비용을 갚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글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다. 어차피 남편 살아있을 때에도 벌이가 일정치 않아 애초부터 집안 경제의 기둥은 마거릿이었다.
이제 좀 먹고 살만 하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친정에서 ㄸ투척이 들어온다. 마거릿에게는 오빠 톰(Thomas Wilson)과 존(John Wilson)이 있었는데, 톰이 캐나다에서 사업을 말아먹고 두 아이(발렌타인과 프랭크)들을 올리펀트네 집에 던져놓았던 것이다.
마거릿은 조카들을 키우면서 오빠가 남긴 막대한 빚까지 떠안게 되었다. 문제는 이때가 마거릿의 큰아들 시릴이 이튼 스쿨(영국 왕족 귀족 및 상류층 자제들만 다닌다는 그 유명한 곳)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마거릿은 큰아들 시릴과 작은아들 프랜시스는 물론 조카인 프랭크까지 이튼 스쿨에 보내고 집도 이튼과 가까운 윈저로 옮겨 애들 교육에 헌신했다. 교육열이 얼마나 강했는지 애들이 성적 좀 떨어지고 공부 소홀히 하면 글 쓰다 말고 애들 방에 들어가 폭풍 잔소리를 했다고 한다. 가뜩이나 교육비가 어마어마한데 오빠 빚까지 떠안게 되니 마거릿은 정말 기계처럼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이렇게까지 교육을 시켰으면 애들이 커서 빨랑 돈 벌어 어머니의 근심걱정을 덜어 드려야 했을 텐데...
시릴은 어머니의 기대대로 이튼과 옥스퍼드를 졸업하고 법학을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려고 했다. 머리는 좋았는데, 문제는 의지박약과 알코올 중독이었다. 엄마가 밤새 글 써서 돈을 풍족하게 대주니까, 굳이 이 악물고 일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게다가 몸도 약해서 제대로 슬롯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비실비실 앓다가, 결국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죽기 전까지 엄마한테 얹혀살면서 용돈을 받아 썼으니 엄마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지 상상할 수 있다.
프랜시스(애칭은 세코)는 형보다 훨씬 성실하고 재능도 있어서 윈저 성의 왕실 도서관(Royal Library) 등에서 일하기도 했고, 엄마의 집필 작업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얘 역시 결핵을 앓고 있었고 몸이 너무 약해서 번듯한 풀타임 온라인 게임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결국 엄마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시릴이 죽고 4년 뒤, 형을 따라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당시 이튼과 옥스퍼드를 나온 도련님들은 가오 떨어지게 '아무 일이나' 할 수 없었다. 귀족 가문 자제들과 어울리다 보니 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졌는데, 품위 떨어지는 하급 관직이나 일반 회사원은 하기 싫고, 번듯한 자리는 몸이 안 따라주거나 경쟁에서 밀리니 결국 "돈은 엄마가 잘 버니까 일단 집에서 쉬면서 준비할게요" 하는 고학력 백수가 되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올리펀트도 나중에 자서전에 "내가 아이들을 너무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웠다. 그 애들의 날개를 꺾은 건 나였다"라며 피눈물 나는 후회를 남겼다.
이튼을 졸업한 조카 프랭크는 다행히 게으르거나 나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주 유능하고 몸도 건강했다. 그는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인도로 건너가 온라인 게임도 잡아 집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나 싶었다.
그런데 얘는 인도로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풍토병에 걸려 20대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객사하고 말았다. 자식들 학비 대느라 등골이 휘어지며, 조카 이튼 학비까지 대며 온 힘을 쏟았던 올리펀트 입장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발렌타인은 오빠 프랭크가 인도에서 사망하고, 올리펀트의 친아들들마저 줄줄이 요절하는 비극적인 집안 상황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발렌타인은 말년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고 외로워진 고모 올리펀트의 곁을 지키며 수발을 들었고, 올리펀트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해 준 유일한 핏줄이었다.
결국 올리펀트가 평생을 바쳐 이튼 스쿨에 보내고 최고로 키우려 했던 세 명의 소년들(아들 둘, 조카 하나)은 단 한 명도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전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자기가 번 돈으로 일가를 일으키고 자식들을 상류층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대치동 엄마'의 꿈이 현실에서는 너무나도 잔인하게 무너져 내린 셈이었다. 게다가 작은오빠 존마저(!) 목사가 된다고 신학 공부하다 때려치고 손대는 사업마다 족족 파산해서 결국 온 가족을 데리고 윈저의 마거릿네 저택에 들어와 얹혀살았다고 하니 돈을 벌어도 벌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마찬가지였다(그리고 존 오빠는 평생 마거릿한테 빨대 꽂고 살며 경제 활동은 1도 하지 않았다...).
(이런 거 보면 도서관 창문의 조상 여자네 오빠들을 그따위로 묘사한 것도 좀 이해는 간다)
제인 오스틴의 생애를 다룬 영화(팩트에 기초한 픽션) 《비커밍 제인(Becoming Jane)》에는 오스틴이 자신의 롤모델인 고딕 소설 작가 앤 래드클리프(Ann Radcliffe)를 팬이자 후배 작가로서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래드클리프는 18세기말 고딕 소설의 전성기를 이끌며 당대 최고 수준의 원고료를 받았던 작가였고 대표작인 《우돌포의 비밀》을 쓸 때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금액인 500파운드를 받았다.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에서 에드워드 페라스(제인 오스틴 소설 남주 중 최고로 븅신 같은 놈인데 영화에서는 휴 그랜트가 연기하는 바람에 그 븅신 같음이 묻혀 버렸다)가 목사 연봉에 여기저기서 땡긴 돈과 채권 다 모아 연수입 450파운드가 되자 겨우 "이만하면 검소하게 살면 먹고는 살겠다"라며 엘리너와 결혼한 것을 생각하면, 소설 하나 쓰고 거의 일반인 연봉만큼 받았다고 보면 된다.
래드클리프보다 100년쯤 후에 활동한 작가였던 올리펀트는 래드클리프처럼 원고당 단가가 톱클래스인 작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워낙 다작을 한 탓에 연간 총수입으로 보면 당대 남성 작가들 못지않은 어마어마한 고소득자였다. 어느 정도로 벌었는지 한번 보도록 하자.
올리펀트가 한창 잘 나가던 1860~1870년대(40대 무렵)의 수입을 보면
소설 한 편당 가격: 보통 장편 소설 한 편을 출판사에 넘길 때 400파운드에서 많게는 1,500파운드를 받음
연간 총수입: 소설 외에 평론, 에세이, 전기 등을 닥치는 대로 썼기 때문에 일 년에 보통 2,000~3,000파운드를 벌어들임
19세기말 2,000~3,000 파운드면 런던 금융가 고위급 임원 연봉에 해당하니 현대로 치면 대기업 임원급으로 번 셈이다.
래드클리프나 《미들마치》를 쓴 조지 엘리엇(올리펀트와 동시대 활동) 같은 작가들은 작품 하나를 내놓을 때마다 엄청난 거액의 계약금을 받는 '단가가 높은 작가'였다. 특히 조지 엘리엇은 평생 단 7편의 소설을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편당 5,000 파운드가 넘는 거액을 받았다. 그러나 마거릿 올리펀트는 출판사들과의 관계에서 그 정도의 파워를 가지진 못했기 때문에 많이 벌려면 그만큼 많이 써야만 했다.
매년 수억 원을 버는 올리펀트가 늘 돈 걱정을 했던 이유는 고정비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이 둘과 조카의 이튼 스쿨 & 옥스퍼드 학비와 품위 유지비를 대고 오빠 빚을 갚으면서 윈저의 거대한 대가족 살림(자기 아이들, 큰오빠 아이들, 작은오빠와 그 식구들까지)을 혼자 꾸려야 했다. 자기 작품이 조지 엘리엇처럼 비싸게 받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았기에 올리펀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럼 내가 더 많이 쓰지 뭐"하며 몸을 갈아 원고지 매수를 채워 나갔다.
올리펀트는 동시대에 가장 잘 나가고 문학성을 인정받던 조지 엘리엇을 보며 부러움과 동시에 엄청난 자괴감을 느꼈다. 독박 가장인 올리펀트와는 달리 조지 엘리엇은 사실혼 관계였던 조지 헨리 루이스의 든든한 정서적,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한 편 한 편을 공들여 완성하는 스타일이었다. 올리펀트는 자서전에서 이 환경의 차이에 대해 자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조지 엘리엇은 남편의 보호 속에서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한 편의 걸작을 쓰기 위해 온 세상을 차단하고 완벽하게 몰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빚독촉 속에서 밤새도록 펜을 굴려야 했다. 만약 나에게도 그녀 같은 환경이 주어졌다면, 나 역시 그런 위대한 걸작을 남길 수 있었을까?"
올리펀트 스스로도 자기가 돈 때문에 글을 너무 많이, 빨리 쓰느라 조지 엘리엇만큼의 문학적 명성을 얻지 못했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아들들과 조카(남자)는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게 했지만 딸 매기와 조카딸 발렌타인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올리펀트 본인도 독학파 지식인인 어머니에게 집에서 교육받았다. 어머니는 당시의 평범한 여성들과 달리 정치, 역사, 시사 문제에 엄청나게 관심이 많았고 신문도 많이 읽었다. 아침에는 스코츠먼을 읽고 저녁에는 더 타임스를 읽는 메리 고모의 모습에는 아마도 어머니가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여자아이들이 갈 수 있는 여학교도 있긴 있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자면 제인 에어가 다녔던 환경 더럽게 안 좋은 기숙학교 같은 곳을 떠올리면 되겠다. 이런 곳은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그저 돈 많은 신사와 결혼하기 딱 좋은 교양을 가르치는 곳에 불과했다. 외국어, 악기 연주, 우아한 자세와 자수 그리고 가계부 쓰는 법 등. 올리펀트 노년이 되어서야 거튼이나 뉴넘 같은 여자 대학교가 생기고, 남자들처럼 수학, 라틴어, 과학 등 진짜 학문을 가르치는 명문 여자 사립학교가 생겼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집에 바카라 많아, 자기는 지식 풍부해, 여자애들을 수준 낮은 야매 학교에 보내서 어설픈 공부를 시키느니 당대 최고의 평론가인 올리펀트 본인이 집에서 가르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올리펀트의 집은 환자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올리펀트가 글을 쓰고 돈을 벌려면 누군가는 집안을 돌보고 아픈 사내놈들을 돌봐야 했다.
올리펀트가 정말 너무너무 아끼던 엄청 똑똑했던 큰딸 매기는 겨우 11살에 로마에서 원인 모를 열병으로 발병한 지 4일 만에 죽고 말았다. 매기는 5년 전에 로마에 묻힌 아버지와 같은 무덤에 합장되었고, 올리펀트는 멀쩡하던 아이가 나흘 만에 갑자기 죽자 충격으로 정신을 잃었다. 남편과 딸 말고도 올리펀트의 가족사를 보면 무슨 놈의 인생이 이렇게 험한가 싶은데,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854년 (올리펀트 26세): 어머니 마거릿 에반스 윌슨 사망. 올리펀트에게 문학적 영감을 준 정신적 지주였음.
1855년 (27세): 딸 마조리 -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남. 같은 해에 태어난 아기도 태어나자마자 사망.
1857년 (29세): 아들 스티븐 토마스 - 태어나서 하루밖에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
1859년 (31세): 남편 프랜시스 윌슨 올리펀트 - 로마에서 결핵으로 사망. 빚 200파운드와 만삭의 아내(세코 임신)를 남김.
1864년 (36세): 딸 매기(향년 11세) - 로마 여행 중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사망. 올리펀트가 가장 사랑했던 딸.
1875년 (47세): 오빠 톰 윌슨 - 사업 실패 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 조카들은 이미 올리펀트가 거두어 키우고 있었음.
1879년 (51세): 조카 프랭크(향년 27세) - 인도에서 풍토병(장티푸스로 추정)으로 사망.
1890년 (62세): 큰아들 시릴(향년 34세) 옥스퍼드까지 나왔으나 직업을 못 잡고 방황하다가 결핵으로 사망.
1894년 (66세) 막내아들 세코(향년 35세) 본명 프랜시스. 올리펀트의 마지막 희망이자 든든한 조력자였으나, 역시 결핵으로 사망.
1897년 (69세): 마거릿 올리펀트 본인 - 마침내 아이들 곁으로 떠남.
막내아들 세코 사망 후, 올리펀트는 자서전에 "나는 여기 홀로 남았다. 더 이상 쓸 수가 없다"라고 썼다. 이 자서전은 원래 아들들에게 남겨주기 위해(특히 세코에게 보여주려고) 쓰기 시작했는데 그 글을 읽어줄 아들이 죽어버린 것이었다.
"이 글은 원래 내 가여운 아이(세코)가 읽어주길 바라며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의 삶을 그 아이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것을 읽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내가 왜 더 글을 써야 한단 말인가?"
"내 모든 삶의 동력이 사라졌다. 나는 평생 오직 내 아이들을 지키고,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펜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제 내 집은 텅 비었고,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벌어들인 돈도, 명성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나는 이제 그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자서전의 이 마지막 파트는 글자마다 그녀의 눈물과 무력감이 그대로 묻어있다. 아래는 올리펀트의 자서전 마지막 부분이다.
그 애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모든 일을 나와 상의했고, 언제나 내가 곁에 있기를 바랐으며, 나와 함께 걷고 이야기 나누기를 원했다. 오직 내가 다른 일로 불려 가거나 바쁠 때만 심술을 부리곤 했다. 그 애는 집을 비울 때면 매일 내게 편지를 썼다.
내가 밖으로 나갈 때면 언제나 그곳에 서서 내게 팔짱을 끼워주곤 했다. 지금도 그 느낌이 선연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그 다정하고, 말랐지만, 단단했던 팔의 느낌이.
시릴이 우리 곁을 떠난 후 마지막 4년 동안, 우리는 점점 더, 더 가깝게 붙어 지냈다. 내가 입버릇처럼 "세코와 나(Cecco and I)"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 동안 그 아이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알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제 나는 여기 완전히 홀로 남았다.
나는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올리펀트의 자서전은 딱 여기까지 쓰여 있다.
더욱더 슬픈 일은, 그렇게 삶의 의미를 통째로 잃어버렸는데도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계와 빚을 청산하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계속 글을 써야만 했다는 사실이었다.
《도서관 창문》은 세코가 죽고 나서 2년 후, 올리펀트 본인의 사망 1년 전에 쓰인 작품이다. 모든 자녀를 잃고 혼자가 된 노년의 작가가 소녀의 눈으로 도서관 창문을 상상하며 쓰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소설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자신의 바카라에 완전히 몰입한 도서관의 남자의 모습도 어쩌면 조지 엘리엇처럼 시끄러운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어 학문이나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올리펀트의 부러움과 이상이 투영되어 있을 수도 있다. 신문을 정독하는 메리 고모의 모습에는 올리펀트의 어머니의 모습이, 에스코트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대학 도서관에는 아들들은 들어갈 수 있었지만 자신은 들어가 보지 못한 학문의 장소에 대한 상상이, 그리고 남편을 잃고 인도에서 슬프게 돌아오는 주인공의 모습에는 로마에서 남편을 잃고 두 아이들과 뱃속의 아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돌아오던 자신의 모습이.
올리펀트는 1897년,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Diamond Jubilee) 축제로 시끌벅적하고 화려하게 들끓던 주간에 윔블던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다. 그녀는 이튼 묘지(Eton Cemetery, Windsor and Maidenhead)의 두 아들(시릴과 세코) 곁에 묻혀 있으며, 그 영혼과 문학적 뿌리인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성 자일스 대성당(St Giles' Cathedral) 내부에는 올리펀트를 기념하는 대리석 기념비(Memorial / Plaque)가 헌정되어 있다.
(작가 사후 100년도 더 지났으므로 저작권 free)
THE AUTOBIOGRAPHY AND LETTERS OF MRS M. O. W. OLIPHANT
올리펀트의 외사촌 애니 루이자 워커(Annie Louisa Walker, 결혼 후 이름 Mrs Harry Coghill)의 편집본으로 archive.org에서 조회 및 PDF판 다운로드 가능.
다음으로는 번역하고 특히 삽화 그리느라 개고생한 마봉의 후기가 이어집니다(7/10(금) 19:00).